프롤로그
별 박힌 하늘 아래에서 성대한 불빛이 웅성거림과 함께 번졌다. 크로델리아 황궁의 연회 홀에 모인 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같은 주제로 열띤 뒷얘기를 펼치고 있었다.
한 남자의 놀란 목소리가 연회장에 쩌렁쩌렁 울렸다.
“아니, 카델라로트 공작이 누굴 데리고 왔다고?”
“파트너를 데리고 왔네. 여자를 데리고 왔다고!”
“뭐어? 헛소리 말게!”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지 않소. 나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모두가 봤네. 화장실에 간 자네만 빼고. 그러게 이런 날은 변비약 좀 챙기라니까 그러네!”
“좀 작게 말해 주오. 다들 이쪽을 쳐다보지 않나.”
머리가 벗겨진 백작이 주변을 흘겨보며 창피하다는 듯 말했다. 하지만 그러한 백작의 말과는 달리 다른 이들은 제각각 흥분해 이야기를 나누느라 이쪽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었다.
“본 적이 없는 얼굴이었어요. 전 보자마자 깜짝 놀랐지 뭐예요……. 사람이 어쩜 그렇게 생길 수가 있는지. 이런 게 사람에게 홀린다는 거구나 싶었어요.”
한 영애는 손에 든 샴페인 잔이 반도 비워지지 않았는데도 취한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녀 옆에 있던 남작 영애가 입가를 부채로 가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전 아무래도 공작님이 반반한 미모의 평민을 일회성으로 데려온 것 같아요.”
“네?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데요?”
“공작님은 연회에 오실 때마다 황후 폐하의 주선하에 다른 영애들과 엮이시잖아요. 그런데 공작님은 그걸 썩 좋아하지 않으셨단 말이죠.”
“그러니까…… 일종의 방패막이라는 건가요?”
“네, 그거예요! 그러지 않고서야 공작님 정도의 분이 우리가 모르는 영애를 데려왔겠어요?”
“아, 생각해 보니 그럴 수도…….”
“어머! 저기 오네요!”
남작 영애의 속삭임과 함께, 시선이 일제히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웅성거림이 잦아들고 연회 홀을 잔잔하게 흘러가게 하던 음악만이 남았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의 중심에는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불안하게 시선을 흘끔대는 여자가 있었다.
곳곳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눈처럼 새하얀 머리칼.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
소심해 보이는 태도이지만 대담하게 걸친 독보적인 코발트 물빛의 드레스까지.
“사람이…… 맞나요?”
누군가 중얼거린 물음에 아무도 섣불리 대답할 수 없었다. 신비롭도록 아름다운 외양을 가진 여자를 보았다면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테니.
그리고 그 옆에는 당연하게도 그녀에게 이목이 쏠리게끔 만든 당사자, 카델라로트 공작도 함께였다.
주변을 둘러본 공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시선이 너무 몰리는군.”
“…….”
“괜찮나?”
공작의 작은 속삭임에 그녀가 고개를 강하게 내저었다. 그 격한 반응에 공작이 걸음을 멈추자 그녀는 서둘러 그의 옷자락을 잡아 흔들었다.
“우리 어, 언제 돌아가……?”
“네가 하는 걸 봐서.”
뭐가 불안하기에 공작을 저리 간절히 올려다볼까.
사람들은 궁금했지만, 그들의 대화 소리가 너무 작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공작은 한숨을 내쉬더니 불안에 떠는 그녀를 달래려는 듯 그녀의 머리칼을 넘겨 주고 뺨을 쓰다듬었다.
늘 구기던 미간을 부드럽게 핀 다정한 미소를 지은 채.
지켜보던 사람들은 경악해 입을 벌렸다.
저렇게 친밀해 보이는 두 사람이 일회성의 관계일 리가 없다는 말이 떠돌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면 공작이 미친 게 분명하다는 말도 함께.
‘저게 다 무슨 소리야.’
유난히 청력이 뛰어나 그 모든 수군거림을 듣고 있던 여자는 혀를 깨물고 싶었다.
친밀해 보여?
“표정 좀 풀지. 경비대에 넘겨져 물고문이라도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릴 건가?”
이게, 친밀해 보인다고?
“미, 미안.”
“잘못을 알면 웃어. 무단 침입자.”
싸늘히 속삭이는 말에 여자는 울상 위로 미소를 애써 걸쳤다.
잘못 걸려도 심하게 잘못 걸렸다.
어쩌다 이 성격 나쁜 인간에게 걸리게 된 것인지……. 평소엔 한주먹거리도 안 되는 인간이고, 그녀가 입만 벌려도 무서워 기겁하는 인간이었는데.
“이제는 눈빛이 아주 잡아먹을 기세군.”
“……잘못 본 거야.”
그녀를 탐탁잖은 눈길로 내려다보던 공작은 퍽 진지한 투로 낮게 읊조렸다.
“나한테 허튼짓이라도 하려 했다간 내 고양이가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포악하게 생긴 건 물론이고 송곳니도 날카롭거든.”
“…….”
헛소리도 재주다.
지금 눈앞에 있는 게 제 고양이라는 걸 알고는 하는 말인지.
올해로 한 살. 막 성체가 되어 가는 수인.
공작이 정체도 모르고 오냐오냐 예쁘게 키우고 있는 반려동물.
……그리고 우연히 인간의 몸으로 그를 마주쳤다가 무단 침입자의 낙인이 찍힌 억울한 처지.
그 모든 말의 주인공인 아릴은 코웃음을 치는 대신 그 말 같지도 않은 위협에 겁먹은 척 공작을 바라봤다.
명색이 제국의 상업계를 거머쥔 대부, 카델라로트 공작은 본인이 키우는 고양이를 자랑한 게 뿌듯한지 흡족한 표정으로 아릴을 연회장 가운데로 이끌었다.
하여간 별종인 인간이었다.
아릴은 여기저기서 들러붙는 시선에 남몰래 입술을 깨물었다.
‘갑자기 고양이가 될지도 몰라…….’
불안한 마음에 아릴은 도망칠 구멍을 찾아 눈을 굴렸다. 하지만 이곳에도 인간, 저곳에도 인간.
여기 있는 모두가 아릴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인간들은 왜 이렇게 남 일에 관심이 많은 거야…….’
아릴은 막막함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와중에 또 어디선가 들리는 ‘방패막이’란 소리에 억울해지기까지 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녀는 지금 저들이 수군대는 방패막이가 맞을 것이다.
잘만 감춰 오던 인간의 모습을 이 인간, 이딜로스에게 들켜 협박당해 끌려온 것이니……. 이용의 목적이 아니라면 뭐란 말인가.
아릴이 이보다 나쁜 상황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를 이끌던 이딜로스가 갑작스레 걸음을 멈추었다.
“황후 폐하.”
혈통으로 치자면 황제의 조카이던 그가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황후에게 인사했다.
마찬가지로 황후를 본 아릴은 불안감에 침을 삼켰다. 저 여자와 엮이면 늘 안 좋은 일이 일어난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이보다 나쁠 수는 없는데…….
아릴은 애써 좋은 쪽으로 생각하며 눈치껏 미소로 무장했다. 그러곤 대화에 최대한 끼어들지 않으려 입을 꾹 다물고 얌전히 바닥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늦었지만 소개하겠습니다. 제 약혼녀입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아릴은 고개를 들었다. 그가 누굴 약혼녀라 지칭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인간은 내 건데 약혼녀는 또 누구야?’
기분이 와락 불쾌해진 아릴이 미간을 찌푸린 채 주변을 살폈다.
가뜩이나 웬 날파리가 꼬여 제 냄새로 치덕치덕 흔적까지 묻혀 놓았는데. 누가 또 그새 접근했단 말인가.
아릴은 여기저기 홀리고 다니는 이 지나치게 잘생기고, 냄새도 좋고, 손길도 수준급인 인간을 배신감 어린 눈길로 째려봤다.
그때, 황후가 기가 막힌 표정으로 아릴을 향해 삿대질했다.
“약혼녀? 약혼녀라 했느냐?”
“……?”
아릴은 황후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내렸다. 아주 명확하게 자신을 가리키고 있단 걸 확인한 그녀는 곧 멍하니 입을 벌렸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했다.
지금이 바로 그녀가 우려했던 ‘이보다 나쁜 상황’이었음을.
아릴은 당혹감 어린 눈으로 이딜로스를 올려다봤다. 부디 자신이 이해한 상황이 아니길 바랐다.
그러나 이딜로스는 답지 않은 미소를 띤 채 그녀를 바라보며 똑똑히 말했다.
“예. 제 약혼녀입니다.”
그는 아릴의 커지는 눈을 재밌는 구경거리라도 되는 양 즐거운 눈길로 바라봤다. 그러곤 다정히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처럼 그녀의 귓가로 고개를 내렸다.
다만 내려앉은 것은 듣기 좋은 목소리와 대비되는 싸늘함이었다.
“이제 그 잘난 도주 실력도 여기서 끝이겠어. 이 수많은 사람들 앞에서 내 약혼녀로 눈도장 찍혔으니.”
유감이라는 말과 함께, 이딜로스가 전에 없이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금색 머리칼만큼이나 화사하게 빛을 발하는 낯을 본 아릴은 창백하게 질렸다.
‘어떻게 일이 이렇게까지 꼬일 수가 있지……?’
아릴은 불안한 눈길로 마른침을 삼켰다.
돌이켜 보면 이건 다 그날로부터 이어진 일이었다.
아기 고양이 아릴을 무서워하던 그가 갑작스레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날.
아릴은 그날의 이유를 찾기 위해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처음 그의 집에 가게 되었던 날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