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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90화 (완결) (180/191)

190화

내가 어떻게 돌아오게 되었는지를 말해 보자면. 우선, 내가 죽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낯선 장소에 있었다.

꼭 깊은 잠을 자다가 깨어난 것처럼 몽롱한 상태로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일어났느냐?”

“당신은…….”

“나 참, 아버지라고 부르는 게 그리 어려운 건가.”

정신이 번쩍 들어 몸을 일으키자 바로 옆에 있던 신이 보였다.

그는 기다란 종이를 들여다보며 깃펜으로 무언가를 휘갈기다 말고 나를 바라봤다.

“저…… 어떻게 되었어요?”

“육신이 소멸했지. 그러니 네가 내 품으로 돌아온 것 아니겠느냐.”

그렇게 말하더니 그가 어깨를 으쓱했다.

“원래는 영혼도 함께 소멸하지만, 내가 널 급히 데려오느라 애를 좀 썼다.”

신은 나를 이대로 보내기가 마음 아파 흩어진 영혼을 모아 제 곁에 붙잡아 둔 것이라고 했다.

나는 정말 죽었고, 더 이상 내가 이딜로스의 곁에 돌아갈 길은 없었다.

그 사실에 절망하기도 잠시, 신은 얼마 안 가 내게 일거리를 떠넘겼다.

“……저 보고 이걸 다 하라고요?”

“그래. 신인 나도 일을 하는데 네가 가만히 있으면 내가 뭐가 되겠느냐. 백수처럼 있는 꼴을 보고만 있을 수가 없구나.”

“절 이곳으로 부른 건 아버…… 지잖아요?”

“부려 먹고 싶어 데려왔다. 됐느냐?”

결국 나는 신이…… 그러니까, 아버지가 시키는 것을 군말 없이 하기 시작했다.

정말 부려 먹기 위해 데려오기라도 한 건지, 며칠간은 이딜로스의 생각을 할 틈도 없을 정도로 정말 바빴다.

그렇게 이곳 생활에 정신없이 적응하게 되었다.

‘정말 예쁜 곳이긴 하네. 조용하기도 하고.’

이곳의 건물과 땅은 모두 구름이 아래에서 받치고 있었다.

일하기 싫을 때, 거대한 신전 뒤편에 있는 흰 구름 위로 올라가 자는 낮잠이 그렇게 좋았다. 폭신폭신하고 포근해서 등만 대도 잠이 솔솔 올 정도였다.

그런데 이곳은 지나치게 적적했다. 신이 왜 나를 부려 먹기 위해 데려왔다는 건지 이해가 될 정도로.

심지어 나와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다른 이를 본 적도 없었다. 대부분의 심부름은 뭉게구름이 했고, 수발을 드는 것도 그랬다.

이딜로스가 말하는 신의 현신, 데비드는 늘 자유로우며 사람들과 어울려 재미를 추구하는 것 같던데, 이렇게 외로운 곳에서 지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아버지, 못 보던 보고서가 있어요.”

그러다 내가 이곳에서 머무른 지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때였다.

그간 나는 아버지의 곁에서 여러 일을 도우며 많은 것을 배웠다.

특히, 내 글씨를 보곤 기함한 아버지가 내 글씨 교정에 힘써 준 덕분에 제법 봐 줄 만한 필체를 가지게 되었다.

“아, ‘인간계 세태 보고서’ 말이냐?”

“네.”

아버지는 내가 들어 올린 문서를 흘긋 보더니 별거 아니라는 듯이 대답했다.

“신전에 새로 태어난 수인이 올린 걸 거다. 내가 시켰거든.”

그날 나는 처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전에 새로운 수인이 태어났다니.

본래 수인이었던 내가 도중에 죽어 버렸으니 어쩌면 당연한 것이겠지만, 그 당시의 난 적잖은 충격을 받고 그대로 저편의 구름 섬에서 몇 날 며칠을 멍만 때리다가 돌아왔다.

실은 내심 희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쩌면 신의 곁에 머무르다가 내가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내가 비워 둔 자리는 이미 새로운 이가 차지하고 있었다.

더 이상 나는 돌아갈 자리도, 명목도 없었던 거다.

아버지가 날 어르고 달래고서야 나는 그 ‘인간계 세태 보고서’라는 것을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아천타 때와 같은 문제는 없는지 살펴보는 것이 내 일이었다.

그런데 그 보고서는 조금 이상했다.

빈민가부터 평민, 그리고 황실까지. 넓은 폭의 내용이 두루 적혀 있었지만 불친절하기 짝이 없었고, 이상한 부분에서 상세했다.

[카델라로트 공작. 오후 1시 8분, 오후 2시 47분에 각각 홍차 두 잔 마시며 집무. 일상생활에 어려움 겪는 중. 오후 3시경 사업처 중 에쥴라로트를 들려…….]

이딜로스를 대상으로 한 스토커 수준의 세세한 기록을 보고 나는 경악했다.

설마 이 새로 온 여우 수인이라는 게 이딜로스에게 눈독을 들이고 있는 건가. 이딜로스는 워낙 멋있으니 정말로 그럴지도 모른다.

나는 그 보고서를 들고 아버지를 찾아가 이것 좀 보라며 억울함에 울먹거렸다.

내가 없다고 다른 짐승이 내 반려를 채 가게 두려는 거냐고 화를 냈더니, 어째선지 아버지는 조금 당혹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그는 곧 해결해 주겠다며 나를 타일렀다.

그리고 받게 된 다음 세태 보고서에선 조금 특별한 점이 있었다.

지난 보고처럼 이딜로스의 하루를 초 단위로 들여다보는 수준은 아니지만, 이딜로스의 일상을 마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처럼 두루뭉술하게 적혀 있었다.

[오해 금지. 스토커 아님.]

거기다 깨알 같은 수인의 메시지를 보곤 나는 픽 웃었다.

그제야 알았다. 이 수인이 나를 배려해 이딜로스의 일상을 알려 주고 있었단 걸.

‘오늘도 이딜로스는 몽유병에 시달리고 있구나.’

나는 그걸 알고부터, 신의 곁에 있는 긴 세월 동안 그 보고서 속 이딜로스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낙으로만 지내었다.

하루하루 나를 그리워하는 이딜로스의 모습엔 나도 마음이 아파 견디기가 버거웠다.

그가 밤에는 잠 못 이루면서도, 낮에는 일상을 되찾으려는 노력을 보일 때는 그를 응원하곤 했다.

그렇게 내 하루의 절반 정도는 이딜로스의 일상을 엿보고. 또 되새기는 식으로 흘러갔다.

그렇게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났을까.

“네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3년째로구나.”

갑작스럽게 아버지에게 불려 간 나는 또 무슨 시킬 일이 있는 걸까, 의아해하며 그를 바라봤다.

“이제 때가 되었다.”

“때라니요?”

“내가 처음 널 데리고 왔을 때 네 영혼은 훼손이 아주 많이 된 상태였지.”

“네.”

“나는 그런 네 영혼을 다시 복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그리고 어제, 널 치료하는 게 끝이 났지.”

잠자코 아버지의 말을 듣던 나는 눈가를 살짝 좁히며 그를 바라봤다.

설마. 지금 신께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그래, 넌 이제 돌아갈 수 있다.”

나는 그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

“……전 돌아갈 곳이 없어요. 제가 있던 자리에 이제는 다른 수인이 있으니까요.”

한 세대에 수인이 둘일 수는 없다. 나는 돌아갈 명분이 없는 것이다.

음울하게 옷자락을 쥐었더니 아버지가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돌아갈 곳이 없기는 왜 없어? 버젓이 널 기다리고 있는 이가 있지 않으냐.”

“네……?”

“그러지 않아도 밤마다 널 데려와라, 다시 만나게 해 달라 내게 기도해 대는 놈이 있어 미칠 지경인데.”

아버지는 ‘하여튼 여전히 무서운 녀석’이라며 혀를 찼다.

나는 그가 내뱉은 말을 미처 한 번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입을 뻐끔거렸다.

그의 말이 주는 뉘앙스가 꼭…….

“아릴, 네가 돌아갈 곳은 수인의 자리가 아니다. 넌 이딜로스의 곁에 돌아가는 것뿐이야.”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봤다. 아버지는 나직이 웃더니 입을 열었다.

“놀랐느냐?”

“그게, 어떻게…….”

당황해 말도 잇지 못하는 나를 보며, 신이 근엄하게 목소리를 키웠다.

“오랜 굴레를 꺾고 아주 큰 공을 세운 내 아이야.”

“…….”

“인간계에 초래할 재앙을 막은 공으로, 너에게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 무엇으로 하겠느냐?”

“아, 아…….”

나는 순간 목이 메어 말을 제대로 꺼내지 못했다. 그는 언제까지고 나를 기다려 줄 기세로 인자하게 웃었다.

“이딜로스의 곁에서…… 저도 그와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몸으로, 평생을 함께하고 싶어요.”

“그래, 그럴 줄 알았다.”

아버지는 시원하게 웃으며 내 이마에 손가락을 짚었다. 그리고 속삭였다.

“아이야. 이번에는 네 소원을 모두 이루고 다시 보자꾸나. 행복하게 지내거라.”

그의 마지막 말을 끝으로 나는 신의 곁을 떠났다.

돌아온 나는 인간의 몸으로 다시금 그리웠던 모든 것들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새로운 삶의 시작이라고 해야 할까.

* * *

“그런 일이 있었던 거야.”

나는 이딜로스의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마쳤다. 침대에 마주 누워 있던 이딜로스는 나와 반지를 나눠 낀 손을 잡았다.

“신께서 자비를 베풀어 주셨군.”

“이딜로스, 설마 이제 신을 믿어?”

“글쎄. 내 신은 언제나 한 명뿐이라.”

그가 입매를 올리며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배시시 웃자, 그의 눈도 뒤따라 웃음을 머금었다.

“멀미는 괜찮아?”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의 몸이 되었더니 몸이 허약해지기라도 한 건지 별일 없을 것 같던 결혼식이 끝난 후, 뱃멀미를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딜로스의 부축을 받아 객실에서 쉬었더니 지금은 제법 괜찮아졌다.

“내가 정말 인간이 된 게 맞긴 한가 봐. 이딜로스가 걱정할까 봐 말 못 했는데, 실은 배에 타기 며칠 전부터 이랬어.”

한숨을 내쉬며 한 말에, 내 머리칼을 쓸어 주던 이딜로스의 손길이 멈칫했다.

“……너 아까 왜 멀미하는 것 같다고 했지?”

“마멜라가 건네준 카나페를 먹으려고 했는데…….”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딜로스가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어째선지 그는 벅참이 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응……?”

“식사할 때마다 많이 못 먹었던 게 속이 안 좋아서였고?”

뭐지, 어떻게 안 거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보자 이딜로스가 설렘이 어린 낮은 웃음을 흘리더니 내게 고개를 숙여 입을 연달아 맞추기 시작했다.

처음엔 당황했지만, 늘 있는 일이라 곧 그의 입맞춤을 달갑게 받았다. 그러다 의문을 참지 못한 나는 마구 뽀뽀를 퍼붓는 그를 막아서며 물었다.

“이딜로스, 내가 그런 거 어떻게 알았어?”

지척에서 나를 보며 그가 내 뺨을 쓰다듬었다.

“축하해, 아릴. 목표였던 열세 명 중에 한 명은 이룬 것 같은데.”

그의 말에 의아하게 눈을 깜빡이던 나는 곧 입을 틀어막았다.

“설마…… 진짜야?”

“우선 내일 검진해 봐야 알겠지만. 아마도.”

“어떡해……!”

나는 기분이 들떠 발을 방방거리다가 바로 앞에 있던 이딜로스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딜로스가 웃으며 나를 감싸 안았다.

“아릴, 이젠 행복하게만 해 줄게. 앞으로도 계속, 변함없이 사랑해.”

“응, 나도.”

내게 찾아온 깜짝 소식을 간직한 채로, 바다 위에서의 결혼식은 끝이 났고, 나와 이딜로스는 루다비토로 여행을 가 행복한 시간을 보내었다.

꿈만 같은 날들이 이어졌다. 하지만 나는 먼 미래에도 있을 나날 역시, 행복하리란 것을 직감했다.

나와 이딜로스가 수차례 운명을 거스르고 만들어 낸 미래였으니 말이다.

『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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