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이딜로스는 무력하게 목걸이를 바라봤다. 다시 보니 목걸이는 위험을 알리듯 요란하고도 필사적으로 번쩍거리는 것 같았다.
그의 눈가가 상심에 속절없이 허물어졌다.
안 돼, 아릴.
우린 평생을 함께하기로 했잖아.
내게 청혼하겠다고 했잖아.
난 네가 맑게 웃으며 내게 말해 주기만을 기다려 왔는데.
그런데 이리, 내 무능함으로 인해 널 구하지도 못하다니.
이럴 순 없었다. 이럴 순 없잖아, 아릴.
이딜로스는 제 목에 건 물방울 모양의 목걸이를 뜯어낼 기세로 세게 움켜쥐었다.
그는 격정을 터트리듯 목걸이를 쥔 손으로 땅을 내리쳤다.
“제발, 제발……!”
그는 간절하게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아펠리아가 알려 준 수식을 펼치고, 몇 번이고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대피한 사람들과 안전한 장소에 있었고, 그의 눈앞에 아릴의 모습은 없었다.
목걸이의 빛이 점차 꺼져 갔다.
이딜로스는 원통한 마음에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차라리 그가 아천타와 남고 아릴이 마멜라를 구하러 가는 것이 나았을지 모른다.
아니, 자신이 뭘 할 수 있었을까.
그건 그 자신이 생각해도 최악의 선택이었다. 아릴은 가장 나은 선택을 한 것일 뿐이었다.
“아릴…….”
네가 만약 내 곁에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네가 영영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나 역시 살 의미가 없어질 텐데.
제발 무사해 줘, 아릴.
이딜로스가 기진맥진하게 목걸이를 끌어안았다.
그때, 곳곳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상심에 젖어 있던 이딜로스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시야가 새하얗게 바뀌더니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것 같은 울렁거림이 느껴졌다.
아펠리아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워프에 성공했어!
그 말에 이딜로스가 숨을 들이마셨을 때, 새하얗게 변한 시야가 대번에 확 트였다.
이딜로스는 낯익은 장소에 있었다. 신궐 뒤편의 넓은 정원. 그리고 이딜로스가 마지막으로 아릴과 함께 있었던 그곳.
하지만 어째선지 그 장소는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정갈하던 풀밭이 이리저리 헝클어진 채로 들쑥날쑥 뜯겨져 있었다. 나무는 뿌리째 뽑혀 나갔거나 불규칙하게 절단되어 있었고, 주변에 보이는 건물은 심각하게 파훼되어 있었다.
어쩌다 보니 다 함께 워프된 사람들이 사태를 파악하곤 경악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일대를 훑던 이딜로스의 시야에 엉망진창이 된 아릴의 모습이 들어왔다.
“아릴!”
“……이딜로스?”
아릴이 돌아보자마자 아천타가 그녀를 공격했다. 아릴은 가까스로 그가 날린 창을 튕겨 내곤 뒤로 비틀거리며 물러났다.
이딜로스는 듣기 힘든 굉음과 거센 바람에 눈을 찡그렸다. 두 신격체가 부딪힐 때마다 땅이 괴롭게 진동했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에선 금방이라도 뇌우가 내리칠 것 같았다.
이딜로스가 불안하게 상황을 지켜봤다. 그가 저 사이에 끼어든다고 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짐짝만 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아천타는 이쪽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러니 차라리 얌전히 있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이딜로스는 아릴의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좇았다. 옷이며 머리며 멀쩡한 구석이 없었다.
‘아릴, 이겨야 해, 제발…….’
이딜로스는 초조한 심정에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진심을 담아 신에게 빌었다.
제발, 아릴이 무사하게 해 달라고. 아릴이 살 수만 있게 해 달라고.
필요하다면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해 간절한 기도를 외칠 수도 있었다.
이딜로스는 그 정도로 절박한 심정으로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때, 줄곧 위태로워 보이던 하늘이 우르릉, 뇌성을 터트렸다. 한순간 눈앞이 점멸하듯 번쩍였다.
이딜로스는 반사적으로 눈을 찡그렸다가 서서히 풀었다. 그러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아릴……!”
무너지듯 주저앉은 아릴과 그녀의 턱 아래, 창을 겨눈 아천타의 모습이었다.
아릴은 힘겨운 얼굴로 저편에 있던 이딜로스와 겨우 시선을 마주쳤다.
아릴이 입을 벌려 무언가를 말했다.
뻐끔거리는 그녀의 입 모양이 ‘사랑해’를 말하는 것을 알아본 이딜로스는 앞뒤 분간도 하지 않고 아릴에게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릴, 제발.
신이어도 좋으니 제발 누가 아릴이 죽지 않게 도와줘.
그러자 그의 손에서부터 붉은 뭔가가 세차게 날아갔다.
이딜로스보다도 빠르게 날아간 그것은 엄청난 힘으로 아천타가 들고 있던 창을 쳐 내고 그들 사이에 자리했다.
“그만하세요, 아천타 님.”
냉정하면서도 위엄 있는 목소리가 일대를 울렸다.
아릴은 제 앞에 선 누군가를 휘둥그레 올려다봤다. 이딜로스도 달려가던 것을 멈추고 그 사람을 바라봤다.
풀어 내린 긴 연갈색 머리칼과 푸른 눈.
꼭 아릴을 닮은 생김새를 한 여자가 아릴의 앞을 지키듯 가로막고 섰다.
아천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아펠리아……?”
“아천타 님은 무수히 많은 죄를 저지르셨어요.”
아천타는 정말로 당혹스러운 듯, 손에 들린 창이 날아갔다는 것도 모르고 흔들리는 눈으로 아펠리아를 바라봤다.
반면에, 아펠리아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그를 보며 손을 들었다.
그녀에겐 붉은 색의 검이 들려 있었다.
“아천타 님이 이리 변하신 것은 전적인 제 잘못이니…… 제가 책임지겠어요.”
아펠리아의 손에 들린 검이 순식간에 아천타의 복부를 꿰뚫었다. 정말로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날렵한 속도였다.
“당신과 함께 지옥으로 가는 건 아릴이 아닌, 저예요. 아천타 님.”
아천타는 눈을 설핏 좁히는가 싶더니, 손을 들어 아펠리아의 머리칼을 만졌다. 마치 이게 진짜인가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머리칼로부터 온전한 감촉을 느낀 아천타의 얼굴이 뭐라 정의할 수 없는 표정으로 뒤바뀌었다.
“아펠, 리아…….”
아펠리아는 아천타에게 더욱 깊숙이 검을 찔러 넣으며 말했다.
“당신의 반려인 저와 함께 가요.”
그 순간 아펠리아의 몸이 붉은 불길로 뒤바뀌었다. 그리고 아천타를 집어삼켜 맹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불길은 얼마 지나지 않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엔 아펠리아도, 아천타도 존재하지 않았다.
“아릴……!”
섣불리 다가설 수 없어 멈춰 섰던 이딜로스가 다시 아릴이게 달려갔다.
그녀에게 달려가는 내내, 그의 얼굴에 안도와 환희가 서서히 차올랐다.
아릴이 무사했다.
아천타가 소멸했다.
마침내 승리했다.
모든 것이 끝났다.
여러 개의 단편적인 문장이 뇌리를 빙빙 맴돌았다. 이딜로스는 아릴이 주저앉아 있는 곳으로 걸음을 서둘러 옮겼다.
그런데, 이딜로스가 다 와 갈 무렵 아릴의 몸이 옆으로 스르륵 쓰러지기 시작했다.
그에 놀란 이딜로스는 몸을 내던지다시피 달려 가까스로 아릴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품에 안는 순간 뭔가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뜨거운 무언가가 그의 옷을 흠뻑 적셨다.
막 피어나려던 희망은 곧 현실 부정으로 뒤덮였다.
“아릴……?”
“응…….”
아릴은 힘없이 대답했다. 색색 내쉬는 숨소리가 유독 힘겹게 느껴졌다.
떨리는 숨을 내뱉은 이딜로스는 다급히 아릴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다 그녀의 옆구리가 구멍이 뚫린 것처럼 휑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딜로스의 시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는 곧 아릴을 끌어안았다. 아무 소리도 내지 못한 채로 숨만 헐떡이며 아릴을 꽉 끌어안았다. 이딜로스의 무너진 눈썹이 가파르게 떨렸다.
그의 품 안에서 힘없이 꺼져 가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딜로스…….”
“응, 응. 아릴…….”
이딜로스의 목소리가 볼품없이 떨렸다.
그의 품에 파묻히도록 안겨 있던 아릴이 희미한 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얼굴 좀 보여 주면 안 돼……? 보고 싶어…….”
이딜로스는 곧장 아릴의 말대로 그녀를 살짝 떨어트려 얼굴을 보였다.
핏기가 고인 아릴의 입이 그를 보는 순간 웃음을 띠었다.
“이딜로스…… 울어?”
“…….”
이딜로스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떨리는 시선으로 그저 하염없이 아릴을 바라봤다.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는 손에 절박한 힘이 들어갔다.
그러다 아릴이 계속 대답을 기다리는 것을 알고, 그는 떨어지려는 눈물을 애써 참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다행이다……. 울면 마음 아프잖아. 울면 안 돼…….”
그녀는 손을 뻗어 이딜로스의 뺨을 살포시 감쌌다. 닿은 것 같지도 않은 힘이었다.
이딜로스는 간절히 그 손을 찾아 겹쳐 쥐었다.
“있잖아, 이딜로스…….”
“응.”
“나…… 너랑 마멜라를 만나서 행복했어.”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이딜로스는 참지 못하고 눈물을 후드득 떨어트렸다.
그럼에도 초점이 흐려진 아릴의 눈은 그가 울었다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후회도 많았지만…… 난 내 삶이 나쁘지 않았다고 생각해.”
“응…… 넌 못 한 거 하나도 없어. 넌 모두 다 잘했잖아. 지금 이렇게 많은 사람들도 구하고, 아천타를 몰아내기까지 했잖아…….”
이딜로스의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가파른 호흡을 들은 아릴이 짤막하게 웃었다.
“이딜로스…… 안 우는 거 맞아?”
이딜로스는 입술을 세게 물었다. 그리고 곧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니, 울고 있어. 아릴, 가는 것처럼 얘기하지 마. 그러지 마, 제발……. 제발, 가지 마…….”
그가 울음과 함께 헐떡였다. 아릴의 뺨에도 그가 떨군 눈물이 서너 방울 떨어졌다.
아릴은 그와 겹쳐 쥔 손을 움직여 이딜로스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딜로스는 놓칠 수 없다는 듯이 아릴의 꺼져 가는 온기에 더욱 뺨을 기대었다. 아릴은 흩뿌리듯 희미하게 웃었다.
“이딜로스, 나 사랑해?”
“응…… 사랑해. 무척 사랑해. 단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어……. 네가 없으면 살 수 없을 정도로 널 사랑해. 그러니 제발, 아릴…….”
아릴은 그의 뺨을 스치듯 문질렀다.
“이딜로스, 나도 사랑해 많이……. 난, 다시 돌아간대도 같은 선택을 하고, 이딜로스를 사랑할 거야……. 그리고 수인의 사명을 다하고 이렇게 네 품에서…….”
마지막 순간을 맞이할래.
사랑하는 내 반려.
사랑하는 이딜로스.
그 힘겹고도 느린 속삭임들을 끝으로, 아릴의 고개가 힘없이 처졌다.
이딜로스는 숨을 멈췄다. 그는 아릴이 다시 숨을 내쉬길 기다리려는 것처럼 계속해서 호흡을 참다가 눈물이 무더기로 쏟아지는 것을 막지 못하고 울음을 토해 냈다.
“아릴…… 아릴.”
“…….”
“아릴, 안 돼…….”
절망 어린 얼굴로 그는 아릴의 숨을 몇 번이고 확인했다. 늘 장난기 가득한 아릴이었으니 실은 장난친 거라며 참았던 숨을 푸하 뱉어 낼 것 같았다.
하지만 아릴은 아무리 기다려도 숨을 내쉬지 않았다.
하늘이 쏟아 내는 비가 그 순간 그의 참담한 심정을 대변했다.
무너지듯 아릴을 끌어안은 이딜로스는 온몸이 찢어질 정도로 구슬프게 오열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릴의 몸은 빛 가루가 되어 점점이 흩날리더니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그렇게 아릴은 완전히 그에게서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