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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83화 (173/191)

183화

어둑한 침대 밑에 있으니 그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오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땐 내가 수인인 것도 몰랐던 것 같은데.

‘이딜로스가 낚싯대로 놀아 주던 게 그렇게 재미있었지…….’

나는 피식 웃었다. 그렇게 조그맣던 내가 이제는 용맹한 호랑이가 되었고 모두가 우러러보는 존재가 되었다.

‘앞으로 아천타는 한참 후에 다시 나타날 거라고 신께서 말씀하셨지.’

나는 내 체온으로 따뜻해진 방바닥에 풀썩 엎드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난 앞으로도 계속 내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다. 이제는 어떤 불안감과 두려움도 없이.

‘이렇게 평화가 찾아오면 꼭 하고 싶었던 게 있어.’

이딜로스가 곁에 없던 2년의 세월 동안, 로맨스 소설 속 행복해 보이는 주인공들을 보며 마음속에 그리기만 했던 내 소원.

어떤 식으로 이루면 좋을지 몰라 생각을 이어 가기만 할 때, 바깥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선 곧 튀어 나갈 준비를 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 그럼 하나, 둘……!

‘잠깐만, 그런데 이딜로스의 냄새라기엔 묘하게 다르잖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둘’까지 외친 시점에서 난 이미 추진력을 싣고 튀어 나간 후였다.

“응? 아릴! 세상에, 고양이 모습이네?”

그런 나를 맞이한 건 마멜라였다.

달려 나간 나는 바로 키를 낮춰 양팔을 벌린 마멜라의 품에 폭 안겼다.

나는 어리벙벙해져 입을 세모꼴로 벌렸다.

“아옹……?”

이딜로스는?

내가 마멜라더러 와 달라고 말을 잘못 전했던가?

“고양이로 돌아갈 수도 있었어? 와아, 보들보들해! 귀여워……!”

나를 꽉 끌어안는 마멜라의 행동에 숨이 막혀 앞발로 다급히 그녀를 때렸다.

헤실헤실 웃은 마멜라가 나를 내려놓았다.

이제는 낯선 눈높이가 된 조그만 몸집으로 거대한 마멜라를 올려다봤다.

마멜라가 입술을 살짝 내밀었다.

“아릴, 너무해. 고양이 모습을 오라버니에게만 보여 주려고 하고.”

“아옹…….”

그럴 생각은 없었는데, 듣고 보니 그렇긴 하네.

나는 정말로 고양이 때로 돌아간 것처럼 마멜라의 손에 한껏 애교를 부렸다.

마멜라의 표정이 금세 사르르 녹아 활짝 피었다.

“아릴, 간식 줄까?”

“……아옹!”

간식이라니.

마멜라는 내가 수인이라는 사실도 잊은 것처럼 나를 완전히 고양이처럼 대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앞발로 찰싹 쳐 내고는 돌아섰다.

작별 인사를 고하듯 꼬리를 새침하게 살랑거리곤 바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뒤편에서 시무룩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쉽다……. 고양이를 새로 키워야 하나.”

“뭐? 안 돼! 내가 있는데 왜? 설마 이미 저택에서 키우고 있는 건 아니지?”

나는 빠르게 냄새를 맡았다. 다행히 마멜라에게서 다른 짐승의 냄새는 나지 않았다.

만약 카델라로트 공작저를 갔는데 다른 짐승이 살림을 차리고 있으면 정말 뿔날 것 같았다.

아무리 내 터전이 바뀌었다지만, 거긴 내 구역인데!

“아릴이는 고양이가 아니잖아. 호랑이인데다 수인이고……. 호랑이 모습도 멋있지만 그렇다고 자주 보여 주는 것도 아니고.”

마멜라가 힐끔힐끔 기대하는 눈길을 보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그럼 마멜라에게만 특별히 가끔 고양이로 변해서 애교 부려 줄게.”

“호랑이 모습은?”

“호랑이 모습도. 대신 이딜로스한텐 비밀이야.”

화색을 띤 마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곧바로 내게 호랑이로 변해 달라고 부탁해서 나는 한바탕 마멜라와 놀아 줘야 했다.

마멜라는 눈을 반짝이며 정말 좋아했다.

처음 봤을 때완 달리 키도 제법 크고 성숙한 자태도 보이지만, 이런 모습을 보면 아직 마멜라는 꼬마 공녀님이었다.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나는 마멜라와 차를 나눠 마시며 물었다.

“그래서, 오라는 이딜로스는 안 오고 왜 마멜라가 온 거야?”

“오라버니는 백부님과 좀 더 이야기할 게 남았나 봐. 나더러 먼저 가서 아릴이랑 놀아 주고 있으라고 했어.”

마멜라가 내뱉은 ‘백부님’이라는 호칭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평소라면 부르지 않을 호칭에도 마멜라의 표정은 평온했다.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그녀가 그들과 잘 화해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어렴풋이 웃었다.

“그렇구나.”

“오라버니는 이따가 오실 거야.”

나는 황궁의 시종이 내어 온 쿠키를 오독오독 베어 먹고서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마침 이딜로스도 없고, 마멜라에게 물어볼 것이 있었다.

“마멜라, 나 꼭 하고 싶은 게 있어. 그간 꿈만 꿔 왔는데 지금이라면 가능할 것 같아.”

“응, 뭔데?”

“이딜로스는 지금 내 반려잖아. 어쩌면 우리 사이는 누구보다 돈독할 거야.”

“그렇지?”

“그런데 최근에 어떤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서 알게 되었어. 이 관계가 마냥 완벽하지는 않다는 걸 말이야.”

그건 아펠리아의 인생을 통해 알게 된 거였다.

그 관계는 어찌 보면 돈독하나, 실은 신격체를 위주로 돌아가는, 아주 편파적인 관계였다.

“생각해 보면 반려란 자리는 일방적으로 신격체에게 초점을 맞춘 직위에 불과했어. 그래서 난 말이야…….”

나는 여러 로맨스 소설에서 보았던 그 행복한 결말을 상기하며 수줍게 웃음을 피웠다.

“신격체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이딜로스를 내 남편으로 맞고 싶어.”

* * *

이딜로스는 황제와 기나긴 이야기를 나눴다.

정신이 돌아온 황제는 오래전, 그가 부모님과 함께 황궁에 놀러 올 때마다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차분하고 신중한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미안하구나. 너와 마멜라에겐 정말 면목이 없어. 네게 그런 상처를 주어 미안하다, 미안해…….”

이딜로스에게 간곡히 사과를 하며 그는 몇 번이나 눈물샘을 터트렸다.

미처 말로 쏟아 내지 못할 후회와 자책이 그의 얼굴에서 고스란히 느껴져, 이딜로스는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후에 너희 아버지의 무덤을 내가 찾아가도 되겠느냐……? 나도 그 애가 무척 그립구나. 당장이 아니어도 좋다. 네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평생 얼씬하지 않으마.”

전대 카델라로트 공작은 이딜로스에게만 가족인 게 아니었다. 황제 역시 그와 우애 깊은 형제였다.

정신이 지배당하기 전까지는 최측근에 그를 호위로 두어 목숨을 맡길 정도로.

여전히 이딜로스는 황제가 저질렀던 행동들을 생각하면 치가 떨리고 분통이 났지만,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후일을 약속하지 마시고, 당장 가 주십시오. 폐하께서 저희 일가족에게 저질렀던 죄를 저희 부모님의 묘 앞에서 모두 사실대로 고하고 사죄해 주십시오.”

이딜로스의 날카로운 말에 황제는 당황하기는커녕 안도의 웃음을 지었다.

“그래, 그러마. 허락해 주어 고맙구나.”

“……기다리는 이가 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렇게, 일방적인 눈물과 사과로 점철된 대화가 끝났다.

본성을 나와 별궁으로 향하며, 이딜로스는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시린 추위가 긴 입김을 피워 냈다.

마음이 착잡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벼워지기도 했다.

늘 그를 짓누르던 압박이 그제야 사라진 것 같은 해방감을 느꼈다.

이딜로스는 비교적 가뿐한 심정으로 아릴을 찾아 나섰다.

조금 전, 마멜라와 함께 황제 부부를 상대하고 있을 때 누군가 와서 그에게 아릴의 말을 전했다.

볼일이 끝나면 그가 예전에 사용했던 방으로 와 달라고.

이딜로스는 아릴이 왜 갑자기 그곳으로 저를 불렀을까, 생각하며 방으로 향했다.

“난 말이야……. 신격체가 아닌 한 명의 인간으로서 이딜로스를 내 남편으로 맞고 싶어.”

그런데 막 문 앞에 도착했을 때 들리는 목소리에 이딜로스는 문고리를 돌리려던 것도 잊고 멈췄다.

‘남편으로 맞고 싶다고? 나를?’

이딜로스는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아릴, 그 말은…….”

“응, 나 이딜로스에게 청혼할 거야. 이딜로스와 결혼하고 싶어.”

이딜로스는 서둘러 제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이상한 소리를 낼 뻔했다.

순간 심장이 거칠게 일렁이는 것을 느꼈으니 입을 막지 않았으면 심장을 뱉어 냈을지도 모른다.

청혼, 결혼…….

이딜로스의 입가가 미친 듯한 기세로 올라갔다.

아릴과는 하늘에서도 인정한 반려 사이였기에 그간 결혼을 생각지 못했다. 이미 그와 아릴은 결혼한 거나 다름없는 관계였으니.

“어떻게 청혼하는 게 좋을까?”

하지만 멀리서 들리는 아릴의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간지럽게 녹였다.

그 역시 진심으로, 아릴과의 결혼이 간절해졌다.

순수하게도 아릴은 모든 걸 자신이 준비하려 했다.

이딜로스는 입술을 꽉 문 채로 기척 없이 돌아섰다.

본래라면 남자가 먼저 하는 게 일반적이겠지만, 그는 입과 귀를 꼭 닫고 모른 척 기다리기로 했다.

자신이 청혼을 하겠다는 아릴의 그 생각과 의지가 너무 사랑스러워 도무지 행동을 가로채고 싶지 않았다.

‘기대해야겠군.’

아릴이 어떤 참신한 방식으로 청혼을 해 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되었다.

설령 시가에 널린 흔해 빠지고 구시대적인 방식이라 해도, 그에게 아릴의 청혼은 세상 그 무엇보다 특별할 것 같았다.

‘결혼식은 어디서 올리는 게 좋을까. 안셀에게 알아보라고 해야겠군. 신혼여행은 루다비토로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줄곧 아릴에게도 그곳을 보여 주고 싶었으니.’

이딜로스는 실없는 생각을 이어 가며 황성을 나섰다.

청혼을 계획하느라 머리 아플 아릴에게 향긋한 꽃다발이라도 선물하기 위해.

그는 언젠가 루다비토에서 보았던 푸른 장미를 떠올리고, 그 꽃을 선물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에게 있어 아릴의 존재는 언제나 눈부신 기적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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