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사랑하는 나의 반려에게
“내가 정말 여기에 머물러도 돼?”
마멜라가 부담스럽다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물었다.
마멜라에게 찰거머리처럼 딱 달라붙은 나는 그녀를 끌어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당연하지. 여긴 내 집이니까 마멜라의 집이기도 해. 신궐은 허락된 사람이 아니면 출입하지 못하니 지내기 편할 거야.”
“난 언제 허락된 사람이 된 거야……? 사제님들에게 폐가 될 것 같은데…….”
“그 인간들 너 좋아해. 이딜로스의 동생이라며 네가 오는 걸 환영하던걸.”
“정말?”
“응.”
나는 부담스러워하는 마멜라를 달래 신전에 머무르게 하는 데 성공했다.
기분이 좋아졌다. 한동안은 내가 지내는 곳에 마멜라까지 함께 있겠구나!
“마멜라가 오니 난 관심 밖이라 이건가.”
옆에서 차를 들고 있던 이딜로스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는 이딜로스를 힐긋 보고 눈까지 마주쳤지만 무시했다.
오늘 새벽까지도 같이 있었으면서.
“아, 맞다. 아릴, 내가 루나뜨로트에서 가져온 과자들은 어디 있어? 안셀이 신제품이라고 말해 준 것들만 담아 온 건데.”
“네가 사제들한테 나눠 달라고 한 건 한 상자씩 모두 나눠 주고, 우리 몫은 시원한 저장고에 넣어 뒀어.”
“우리 그거 먹자. 블루베리 요거트 맛 타르트가 정말 맛있어.”
“그럴까? 이딜로스, 가져와 줘.”
나는 자연스럽게 이딜로스에게 부탁했다.
눈을 감고 차를 음미하고 있던 이딜로스가 멈칫하더니 불평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내가 종의 신분은 아닌데.”
“그렇지만 여기 사제들은 모두 바쁘고, 마멜라는 손님이고. 나는 몸이 아픈데.”
“아파? 어디가.”
이딜로스가 찻잔을 내려놓더니 심각한 얼굴을 했다. 당장 창밖으로 뛰어내려 치료술에 능한 사제들을 긁어모아 올 기세였다.
나는 입술을 살짝 내밀며 불쌍하게 그를 바라봤다.
“어젯밤에…….”
알지 않느냐는 눈빛을 보내자 이딜로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알았어. 다녀올게.”
이딜로스가 떠나고 마멜라를 바라봤다.
그런데 마멜라가 묘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멜라, 왜? 나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그냥 적응이 안 돼서.”
의아하게 그녀를 보다가 아까 전, 이딜로스와 나눈 야릇한 분위기의 대화를 떠올렸다.
나도 모르게 벌인 일이라, 나는 입을 살짝 벌리다가 마멜라에게 사과했다.
“미안…….”
“아니야. 보기 좋아.”
마멜라가 생긋 웃었다.
역시 세상에서 가장 착한 인간인 마멜라는 오늘도 나를 이해해 줬다.
소파에 앉아 마멜라를 옆에서 꼭 끌어안고 있던 나는 마멜라에게 머리칼을 비비적댔다.
세상 해묵은 스트레스가 싹 날아가 버리는 기분이었다.
이미 다 자란 성체여도 가끔 마음껏 애교 부리고 싶을 때가 있는데, 그간 참아 온 것이 오늘에서야 팡 터진 것 같다.
아마 사제들이나 다른 인간들이 본다면 기겁하겠지만, 난 여전히 고양잇과인 걸 어떡해.
“마멜라, 무슨 과자를 이렇게나 들고 왔어.”
두 손 가득 루나뜨로트의 고급 상자를 들고 온 이딜로스가 오자마자 마멜라를 꾸짖었다.
마멜라는 금세 기가 죽어 종알거렸다.
“그렇지만, 아릴이는 몇 년간 루나뜨의 디저트를 못 먹었을 거잖아요. 그간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이 나왔는데.”
이딜로스는 한숨을 내쉬며 접시를 나눠 주었다. 우리는 사이좋게 디저트를 나눠 먹기 시작했다.
그제야 마멜라에게서 떨어지고 과자들을 감격에 젖어 먹고 있을 때였다.
이딜로스가 케이크를 한가득 떠서 내게 포크를 내밀었다.
“아.”
“으응, 아.”
입을 벌리자 이딜로스가 케이크를 쏙 넣어 줬다. 입 안에서 상큼한 청포도가 터지며 부드럽고 달콤한 생크림과 조화를 이뤘다.
너무 맛있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곧바로 이딜로스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더 달라고 눈을 빛내자 이딜로스가 케이크를 또 떠서 내게 먹여 줬다.
눈썹을 허물어트리며 우물거리자 이딜로스가 픽 웃으며 물었다.
“맛있어?”
“응!”
“입에 크림 묻었어.”
“이딜로스가 닦아 줘.”
이딜로스가 손으로 내 입술을 문질러 닦아 줬다.
나는 장난스레 입술을 내밀었다. 그가 실없이 웃더니 내게 고개를 내리려다 말고 멈칫했다.
이딜로스가 뻣뻣하게 마멜라 쪽을 흘긋 바라봤다.
쿠키를 입에 넣다 말고 정지한 마멜라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 나가 있을까요?”
“아니……. 미안하구나. 자제할게.”
결국 난 다시 마멜라의 옆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어색해진 분위기를 바꾸고자 다른 이야기를 꺼내었다.
“며칠 후에 황궁을 방문할 예정이야. 이딜로스는 가야 할 테고……. 마멜라도 가지 않을래?”
“……황궁?”
마멜라가 하얗게 질렸다.
나는 그녀의 반응이 좋지 않을 거란 걸 알았기에 그녀에게 황궁의 상황을 알렸다.
그곳 사람들이 실은 아천타에게 세뇌당해 부정적인 감정에 지배당하고 있었다는 것.
물론 그렇다고 황후와 황제가 잘못이 없다는 건 아니지만…….
“얼마 전에 서신을 주고받았는데, 황제 부부가 너와 이딜로스를 만나고 싶어 했어. 직접 만나 사죄하고 싶다고.”
마멜라의 눈빛에 갈등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녀를 다독이며 말했다.
“강요는 아니야. 마멜라가 싫으면 가지 않아도 돼. 나와 이딜로스가 가는 것도 신전의 일원으로서 아천타에게 피해를 본 황궁을 살피러 가는 것뿐이니까.”
“나도…… 갈게.”
그다지 긴 고민의 시간도 없이, 마멜라는 금세 결연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혹여 그녀가 무리하는 것일까 봐 걱정스레 물었다.
“괜찮아?”
“응. 우리 학교 학생들을 모두 대피시킨 게 황후 폐하라고 들었어. 나도 오랜만에 그분들을 뵙고 싶어.”
마멜라는 용감하게 두 주먹을 쥐었다.
나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용기를 낸 마멜라가 기특해 그녀의 보드라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알겠어, 같이 가자.”
황궁을 방문하는 일은 바로 이튿날 이루어졌다.
우리는 마차를 타고,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마차째로 수도, 델트로타로 이동했다.
나도 이제 자유자재로 신성력을 다룰 수 있으니 내가 한다면 단 몇 분 만에 도착할 수도 있었지만, 워프는 생각보다 복잡하고 피곤한 일이었다.
‘인력은 이러라고 있는 법이지.’
부쩍 초췌해진 낯으로 잘 다녀오라고 인사하던 사제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솔직히 조금 미안한 마음도 든다.
하지만 황제 부부를 만나려면 어느 정도 기력은 아껴야 하는 걸 어쩌겠나.
아무리 그들이 변했다지만, 또 어떤 일이 생길 줄 알고?
“여기까지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습니다, 수인님.”
그러나 내 염려와는 달리 너무나 깍듯한 황후 베르제나의 인사에 나는 입이 절로 벌어졌다.
내가 신전의 인력을 동원해 편히 왔다는 걸 알 텐데도, 황후는 물론이고 황제까지도 허리를 숙였다.
“이렇게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그간의 무례와 잘못은 이 황실에서 제가 대표로 목숨을 걸고 사죄하겠나이다.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황제는 머리라도 박을 기세로 거듭 사과했다.
‘완전 다른 인간들이잖아…….’
새삼 아천타가 얼마나 몹쓸 짓을 했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곤 낯을 굳혔다.
“그대의 그 사과는 내가 아닌, 다른 이에게 해야 하지 않겠나?”
그 누구보다 황제의 사과를 받아야 할 상대. 그들이 바로 내 뒤에 있었다.
황제는 내 말의 의미를 이해한 듯 입을 다문 채 죄스럽게 고개를 숙였다.
‘내가 자리를 피해 줘야 하는 거겠지. 이런저런 깊은 이야기를 나눌 것 같으니.’
황제 부부의 표정이 자책으로 뒤숭숭한 것이 보였다. 내 생각이 맞았다.
그들은 처음부터 그렇게 악질적인 이들이 아니었다.
그저 우연찮게 아천타의 복수에 이용된 이들일 뿐.
정신이 든 지금, 속으로 후회가 이만저만이 아니겠지.
“황후의 말마따나 이곳까지 오느라 고생을 했더니 조금 피곤하군. 난 먼저 들어갈 테니 그대들은 이야기를 나누다 오도록 하라.”
권유가 아닌 명령이다.
나는 후에 이딜로스와 마멜라를 통해 황제 부부가 제대로 사과를 했는지 확인할 셈이었다.
실은 힘을 쓴 일이 없으니 조금도 피곤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척 시종의 안내를 받아 황궁의 호화로운 방으로 갔다.
‘……잠깐만. 그러고 보니 그 인간은 어찌 됐지?’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어, 다시 방을 나와 시종을 불렀다.
그냥 물어볼 것이 있어 사람을 부른 것뿐인데, 웬 총무까지 달려 나와 내 말을 기다렸다.
이런 우대에 익숙해진 난 고개를 살짝 치켜들며 물었다.
“엘리네 헤르핀드의 상태는 어떻지?”
엘리네의 상태가 좋지 못하다고 이딜로스에게 전해 들었었다.
또, 좋지 못한 상황에 혼자 남게 되었으니 아천타에게 어떤 위협을 받았을지 모른다.
최악의 경우엔 목숨조차 잃었을 수도 있고…….
“헤르핀드 공녀께서는 기적처럼 병상이 나아 지금 공작저에서 안정을 취하고 계십니다.”
나는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병상이 나았다고? 그게 무슨 말이지? 상태가 단순히 치료만으로는 나을 수 없는 상태라고 들었다.”
“공녀께서 말씀하시길 신의 자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건 정말 신이 아니고서야 이루어 낼 수 없는 일이었죠.”
“신께서…….”
데비드가 떠나기 전에 엘리네를 치료해 주고 간 거구나.
나는 비로소 안도했다.
아무리 내 신성력이 있다 해도 떨어진 신체 일부를 다시 복구할 수는 없는데. 엘리네의 그 상처를 신께서 보듬어 주고 가셨구나.
“그래, 다행이구나.”
“아, 그러고 보니 공녀님이 수인께서 황성을 들릴 것을 알고 전해 달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내게 양해를 구하곤 순식간에 어딘가를 다녀왔다.
이마에 땀을 흥건히 적시고 온 그의 모습에 나는 조금 미안해졌다.
그렇게 깍듯하게 대하지 않아도 되는데…….
“공녀께서 이걸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웬 티켓이었다. 나는 의아한 마음으로 그걸 받아 살폈다.
카델라로트 별장 근처에 있는 2인용 고급 여객선 티켓.
나는 그게 오래전, 이딜로스와 함께 여행 갔다가 엘리네에게 밀처져 봉변을 당했던…… 그 여객선 티켓이라는 걸 알아보곤 반색했다.
설마 이번엔 제대로 즐기고 오라고 다시 주는 건가.
그녀의 부탁대로 황성을 구해 주었는데 그 답례로 고작 이런 것을 주다니. 나는 픽 웃었다.
엘리네답게 영리하기도 했다. 사례로 금은보화를 줬다면 오히려 감흥이 없었을 텐데.
“고맙군. 엘리네에게 잘 받았다고 전해 주게.”
나는 티켓을 뒤집어 봤다. 티켓의 사용 기한도 3년은 거뜬히 되었다.
이딜로스에게 가자고 하면 되겠다.
나는 살며시 웃음 짓다가, 문득 번뜩이는 생각이 있어 총무에게 부탁했다.
이딜로스가 어릴 때 곧잘 머물렀던 그 침방으로 안내해 달라고.
그곳은 이딜로스의 불우한 과거가 존재하는 장소이기도 하지만, 내게는 그와 함께 처음 황궁으로 찾아온 날의 추억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여기서 고양이로 변해 있으면 이딜로스가 반가워하겠지.’
마음만 먹으면 신성력을 이용해 어떤 모습으로도 변할 수 있었다.
나는 장난스레 웃으며 호랑이 대신, 옛날의 그 모습대로. 자그마한 아기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해 침대 밑으로 들어갔다.
‘이딜로스가 찾아오면 놀라게 해 줘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