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미리 인원을 모아 두고 막사를 지어 밤을 보내던 그녀는 잠이 오지 않는 듯 밤새 뒤척였다.
나는 그녀의 마음이 뒤숭숭할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몇백 년을 함께한 이를 배반하는 일이니 생각이 많아지겠지.
결국 그녀는 이불을 걷어 내고 막사에서 나왔다.
모두가 잠든 밤, 막사로부터 떨어진 곳으로 느릿하게 걷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유난히 창창하고도 빛나는 밤하늘이 쏟아질 듯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멈춰 서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두 손을 들어 마주 잡고, 기도하듯 눈을 감았다.
-부디 신께서 내 잘못을 용서해 주시길 빌었어, 내 운명을 저버리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 걸로 모자라 한평생 모셔야 할 이를 몰아내게 될 테니.
그녀가 간절히 기도하고 있을 때였다. 그녀의 어깨 위로 묵직한 온기가 내려앉았다.
뒤돌아보니 카얀이 제 겉옷을 걸쳐 주곤 옅게 웃고 있었다.
“……카얀, 여태 안 자고 있었어?”
“당신이 심란해하고 있을 줄 알았어요. 아펠리아 님의 그 위치에서 쉽게 내릴 수 있는 결정은 아니니까요.”
“그래서, 내가 걱정되어서 안 자고 있었던 거야?”
카얀은 말없이 싱긋 웃고는 그녀에게 겉옷을 단단히 여며 주었다.
꼼꼼히 단추를 채운 후에 카얀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녀의 차가운 양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마음이 복잡할 땐 늘 밖으로 나오시니까요. 요즘엔 날이 추우니 따뜻하게 해 드리려고 기다리고 있었어요.”
카얀의 말을 듣자니 왜 아펠리아가 카얀을 그토록 좋아하게 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조차 카얀에게 반할 것 같은데…….
“어서 들어가. 지금이라도 푹 쉬어야지. 내일이면…….”
그녀가 말을 머뭇거렸다. 카얀은 자신을 밀어내려는 그녀의 손을 안심시키듯 꼭 잡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설령 내일, 우리가 지더라도…….”
카얀은 잠시 말을 멈추고 그녀의 눈을 바라봤다. 진지하게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는 웃음기가 없었다.
하지만 곧, 그는 맑게 웃음을 피워 내며 말을 이었다.
“우린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을 거예요.”
“…….”
“그러니 아펠리아 님. 우리는 지금과 먼 미래만을 생각해요. 내일은 생각하지 말아요. 잠시 소나기가 내리는 것뿐이니까요.”
“카얀…….”
그녀가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카얀은 그녀의 뺨을 엄지로 쓰다듬다가, 천천히 입술을 내리며 속삭였다.
“아펠리아 님,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당신만은 지켜 드릴게요.”
“…….”
“사랑해요, 아주 많이…….”
그녀는 울음을 참는 듯 눈을 질끈 감고 그의 입맞춤을 받았다.
나는 별이 무수히 빛나는 밤하늘 아래에서 입맞춤을 주고받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그들의 그러한 모습은 아천타가 내게 주었던 전생의 기억과 조금 달랐다.
내가 아천타를 통해 보게 된 카얀은, 분명 자신만만하게 내게 말했었다. 승리하는 건 분명 우리가 될 것이라고.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 있는 두 사람은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뿐일까, 이미 두 사람은 각자 최악의 상황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아펠리아에게 물었다.
“저때, 질 거라는 걸 알았어?”
-……응. 카얀도, 나도. 우린 패배할 걸 알면서 일을 벌인 거야.
“왜 꼭 그래야만 했어……?”
-내일은 생각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불합리하게 희생당하는 현재와 더는 억울한 사상자가 없을 먼 미래만을 생각했으니까.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사이 눈앞의 장면은 다시 바뀌었다.
언젠가 보았던 붉게 타오르는 풍경이 시야에 펼쳐졌다.
수많은 이들이 분노를 품은 채 진군했고, 사상자가 되어 하늘로 돌아갔다. 잘 단련된 성기사들은 반심을 품은 채 달려드는 이들을 가차 없이 응징했다.
하지만 반란군들이 전멸에 가까운 수준이 된 것은 아천타가 모습을 드러낸 후부터였다.
“아펠리아 님, 우선 피신하세요. 어서!”
“안 돼, 카얀. 내가 널 두고 어딜 가……. 우선 응급 처치부터 하자. 지금 너 피 많이 나. 우리 잠시 저쪽으로 가자. 같이 가.”
그녀는 카얀의 다친 상처를 보곤 눈물을 떨구더니 근처 숲속으로 그를 억지로 끌어당겼다.
카얀은 착잡한 눈으로 그녀를 보더니, 곧 그녀에게 붙잡힌 손을 고쳐 잡고선 걸음을 바삐 해 앞장서 가기 시작했다.
“알겠어요. 응급 처치할 테니, 아펠리아 님은 곧바로 숲을 따라 도망치세요. 전 조금 이따가 뒤따라갈게요.”
“안 돼, 카얀……. 싫어.”
“아펠리아 님, 저 못 믿으세요? 약속을 어긴 적은 단 한 번도 없는데.”
“아니야, 그런 거 아닌 거 알잖아. 제발 가지 마, 카얀…….”
“아펠리아 님.”
카얀이 커다란 나무의 뒤로 가 멈춰 서더니 그녀를 바라봤다. 눈물이 그렁그렁 고인 그녀의 눈이 투명하게 부풀었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카얀은 설핏 웃으며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 순간에도 카얀의 복부는 붉게 물들고 있었다.
“이렇게 눈물이 많은 분이실 줄은 몰랐네요.”
“…….”
“이런 날에도 아펠리아 님에 대해 알아 가는 게 있어 기뻐요. 하지만 한편으론…… 앞으로도 알아 가고 싶은 게 많이 남았는데.”
카얀은 다친 곳이 아픈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그녀는 카얀을 살짝 끌어안으며 다급히 말했다.
“카얀,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우린 앞으로도 계속 같이 있을 거잖아.”
“그게 무슨 소리지, 아펠리아?”
그때, 일순 바람이 멎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뒤편에서 들리는 음산한 목소리에 나조차 소름이 돋았다.
소리도 없이 나타난 아천타는 굳은 얼굴로 그들에게 몇 걸음 다가갔다. 카얀이 급히 그녀를 제 뒤로 감추었다.
“카얀 노아르크. 간도 크군. 감히 내 반려를 꼬드겨 이런 짓을 벌일 줄이야. 그대의 그 의지만은 높게 사지.”
“……아천타. 당신은 죄 없는 이들을 너무 많이 죽였어. 나와 함께한 이들 모두가 당신의 그 무분별한 처형으로 피해를 본 이들이야.”
카얀이 이를 갈며 내뱉는 말에 아천타는 코웃음쳤다.
“그들이 나와 신을 모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 역시 마찬가지지. 내 반려에게 흑심을 심어 주다니. 아펠리아, 그 간사한 자에게 더는 속아 넘어가지 말고 이쪽으로 와.”
그녀는 대답 없이 입술을 물며 카얀의 옷자락을 쥐었다. 아천타에게 돌아갈 생각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아천타는 노기가 어린 눈으로 헛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아펠리아. 정말로 그자와 뜻이 같은 건가?”
“……전 카얀과 함께할 거예요.”
“그대도 인간이니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그 치기 어린 변심도 한순간이라는 걸 모르나? 후회할 짓 하지 마.”
“제가 돌아가는 거야말로 후회할 행동이에요! 전 이제 아천타 님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아요!”
“……그래,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지. 이건 그대의 선택이 낳은 결과다, 아펠리아.”
다음 순간, 아천타가 카얀을 향해 금빛으로 된 묵직한 창을 던졌다.
내가 보았던 그 전생과 비슷했다. 하지만,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모두 달랐다.
푹, 창이 피부를 꿰뚫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그 순간, 아천타도 카얀도 놀라 숨을 멈추었다.
카얀의 눈앞에서 창이 가로막혀 멈추었다. 그는 떨리는 눈으로 어느새 제 앞을 막아선 그녀를 바라봤다.
-이제 알겠지. 난 직접 뛰어들어 카얀의 앞을 막았고…….
아펠리아의 말이 좀 더 이어졌지만, 카얀의 처절한 부름이 그 목소리를 모조리 덮었다.
“아펠리아 님!”
“가, 어서, 카얀…….”
“아펠리아 님, 아, 안 돼…….”
카얀이 무너지는 그녀의 몸을 받았다.
그녀의 몸을 뚫은 창이 그의 복부 상처를 눌렀다. 카얀은 고통에 헐떡이면서도 억센 힘으로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녀는 그런 카얀을 힘껏 밀어냈다.
“카, 얀. 제발 가……. 부탁이야, 도망쳐……. 도망쳐서, 살아.”
한 자 한 자 힘겹게 애원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그녀를 끌어안고 있던 카얀은 끝내 치아를 억세게 물고 돌아섰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물을 가득 매단 그는 수풀 새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갔다.
나는 알 수 있었다. 카얀은 그녀의 목숨을 헛되이 할 수 없었기에 도망친 거다.
죽어 가는 그녀가 부탁했기에, 그래서 달아난 거였다.
“아펠리아……!”
카얀과 동시에 패닉이 된 건 아천타도 마찬가지였다.
정신이 온전히 그녀에게 팔린 아천타는 카얀을 뒤쫓을 생각도 못 하고 죽어 가는 그녀를 붙잡았다.
그 순간 그녀의 몸을 관통한 창이 빛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내가…… 내가 치료할 테니 조금만 버텨.”
아천타는 황급히 그녀를 치료하려 했다.
하지만, 아천타가 내게도 말한 적 있지 않던가.
그의 비늘로 빚은 날붙이로 인간을 찌르면 상처 입은 이는 영원히 환생할 수조차 없어진다.
아천타는 온 힘을 쏟아부었지만, 그녀의 피조차 멈추게 하지 못했다.
절박한 그의 움직임 속에서 그녀가 힘겹게 손을 들어 아천타의 옷을 쥐었다.
아천타가 멈칫하고 그녀를 바라봤다.
“당신은, 절대…… 카얀을 붙잡으러 갈 수 없어…….”
“아펠리아, 말하지 마. 제발…….”
“내가…… 막을 거니까…….”
그러곤 그의 옷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아천타를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이 떨어진 것은, 그로부터 몇 시간이나 지나고 나서였다.
기억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 이후로 카얀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나도 몰라. 난 저렇게 죽음을 맞이했고…… 신께서 나를 불러 보듬어 주셨지.
“……그렇구나.”
-듣기론 아천타 님께서 그 후로 분노를 참지 못해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고 해. 이게 진실이야. 이제 궁금증이 풀렸니?
“응…….”
잘못된 건 아펠리아와 카얀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저 제 운명을 거슬렀을 뿐이었다.
나는 눈을 스르륵 떴다. 오랜 기억 속을 헤매다 왔기 때문인지 머릿속이 몽롱했다.
“아릴……!”
정신이 들자마자 이딜로스가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실없는 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언제 옮겨 준 건지, 나는 침대에 편히 누워 있었다.
어깨에 고개를 묻는 이딜로스의 행동에 나는 마주 그를 안아 주었다.
“별일 없는 거 알면서.”
“그래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이딜로스가 나를 더욱 꽉 끌어안았다. 나는 그 어리광에 못 이겨 그를 토닥여 주었다.
“이딜로스. 나 알아 온 게 있어.”
“뭔데?”
“전생에도, 지금도. 너랑 난 틀리지 않았다는 거.”
나는 이딜로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부디 카얀이 아펠리아의 바람대로 살아남았기를 바라며, 나는 그에게 내가 본 것들을 이야기해 주기 시작했다.
* * *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났다. 신전 안팎의 상황이 안정되기 시작했을 때, 익숙한 손님이 신전을 찾아왔다.
“아릴!”
오랜만에 보는 꼬마 아가씨가 내 품으로 폭 뛰어들었다. 그녀와 함께 찾아온 안셀이 흐뭇한 눈길로 우리를 바라봤다.
나는 품에 들어온 자그만 인영을 꼭 끌어안았다.
“마멜라, 어서 와! 보고 싶었어.”
지난 몇 년간, 이딜로스 못지않게 정말 그리웠던 이가 바로 마멜라였다.
나는 익숙하고도 안온한 마멜라의 냄새를 열심히 맡았다. 반가움이 마구 밀어닥쳤다.
“나도 보고 싶었어, 아릴. 이제 괜찮은 거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거지?”
“응…… 이제 괜찮아.”
정말 다 끝난 거야.
마멜라의 물음에 단번에 마음이 정리되었다. 날 괴롭히던 몹쓸 불안감들이 이제야 깨끗이 사라진 거야.
“그래, 다행이다.”
나는 마멜라의 말랑한 볼에 뺨을 대곤 비비적댔다.
이딜로스가 옆에서 피식 웃음을 흘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그리웠던 사람들이 모두 모이니, 비로소 평화가 찾아온 것이 실감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