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이번엔 조그만 주점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구석 자리에 카얀과 그녀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는 건지, 웃음을 터트리는 모습이 아주 즐거워 보였다.
-내 이름을 알리기 곤란하다는 걸 알지만, 난 실은 욕심을 내서라도 그의 이름이 궁금했어. 다정한 행동을 하거나 곧잘 웃는 모습을 보일 때는 대체 어떻게 저리도 밝을 수 있을까 궁금했고, 어떤 취미를 가지고 있는지, 고향은 어디인지……. 이상하게도 관심이 갔어. 그래서 물었어.
마침, 그들에게 가까이 가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쯤이면 알아도 되지 않아요? 당신은 이름이 뭐예요?”
그녀의 물음에 카얀의 표정이 부자연스럽게 굳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즐겁게 웃고 있던 그가 꿈에서 확 깨어난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러곤 그녀와 함께 기울였던 커다란 잔을 만지작대며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의 반응에 그녀는 갸웃거렸다.
“궁금하세요? 제 이름.”
“네.”
“……그렇다면 알려 드려야겠네요.”
카얀은 그녀가 제 이름을 묻기를 기다린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표정은 한없이 저조했다.
“아마 당신이 찾던 사람이 저일 거예요.”
“네?”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는 듯하던 그가 살짝 웃었다. 그 웃음에서 쓸쓸함이 느껴졌다.
“카얀 노아르크라고 합니다.”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 반응을 살핀 카얀은 곧 사라질 것 같은 웃음기만을 겨우 걸친 채 말했다.
“실망하셨어요? 제가 당신이 찾던 그 무도한 반란군이어서.”
“그걸 어떻게…….”
그녀는 상당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아마 당혹스러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다. 눈앞의 상대가 바로 반란군의 수장인 카얀이고, 그가 그녀의 목적을 알고 있었으니.
-저 때 너무 놀라서 온갖 생각이 몰아쳤어. 설마 내가 만나 온 사람이 카얀 노아르크일 줄은 몰랐거든. 그런데 저 상황에서 내가 가장 걱정되었던 건, 아천타 님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카얀과 가까이 지낼 수 없을지도 모르겠단 거였어.
아펠리아의 말대로, 그녀는 복잡한 생각이 오가는 듯하더니 흔들리는 눈으로 카얀을 바라봤다.
“당신이…… 카얀 노아르크라고요?”
“맞아요.”
“제가 당신을 찾고 있었다는 걸 어떻게 아는 거예요?”
그의 확인 사살에 숨을 한 번 들이켠 그녀가 연이어 물었다. 카얀은 입을 달싹이더니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였다.
“……당신이 보고 찾아온 그 주소는, 우리 측에서 일부러 흘린 정보입니다. 고의적으로 기재된 기록을 보고 당신이 찾아온 거겠죠.”
“뭐라고요……? 어떻게, 아니. 대체 왜……?”
“신전은 신을 모시는 곳이지, 신격체를 위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 신전에도 신은 섬기지만 신격체는 섬기지 않는 우리 편의 사람이 있었던 겁니다.”
“…….”
“일부러 신격체를 따르는 이들을 이곳으로 유도한 거예요. ……아천타의 약점을 캐내기 위해서. 설마 여성 혼자 반역자인 저를 찾으러 올 줄은 몰랐지만요.”
그녀는 움직이는 것도 잊은 것처럼 카얀을 잠자코 바라보고 있었다. 적잖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카얀은 이 상황이 괴로운 것처럼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말했다.
“제가 당신에게 접근한 목적은 이제 아셨겠죠. 그러니 당신이 협조하지 않는다면…… 난 당신을 해쳐야 할 수도 있어요.”
협박이라기엔 너무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사이 그녀는 생각이 정리된 것처럼 한없이 차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리고 침묵을 깼다.
“아천타 님에게 대항하려는 이유가 뭔가요?”
“……그 신격체는 고작 누명만으로 제 부모님을 처형했어요. 부모님께서 도망 보내었던 하나뿐인 동생도 끝내는 살해당했고……. 당시 유학을 가 있던 저 혼자만 살 수 있었죠.”
“…….”
“저와 뜻이 같은 사람들은 모두 억울하게 가족을 잃은 사람들뿐이에요. 부탁입니다. 부디 힘을 보태 주세요.”
카얀이 고개를 숙였다. 그의 숙인 머리를 보는 그녀의 눈이 잘게 동요했다.
-나 역시 억울하게 아천타 님에게 가족을 잃었잖아. 그래서인가…… 이상하게도 그에게 동질감이 느껴졌어.
“응…….”
-가족을 잃은 후부터 줄곧 아천타 님과 묘한 거리가 생긴 것 같았거든. 그런데 카얀의 말을 들어 보니, 그게 아천타 님을 향한 반감인 거라는 생각이 들었어.
“그럼, 그래서……?”
-응. 난 아천타 님에게 너무 지쳐 있었고, 큰 상처까지 받았어. 그래서 카얀의 손을 잡은 거야.
곧 그녀가 테이블 위에 있던 카얀의 손등을 살짝 감싸 쥐었다.
“고개 들어요.”
카얀이 불안한 눈길로 그녀를 살며시 바라봤다.
그의 표정에 좀 더 결연한 마음이 든 건지, 그녀는 힘을 싣듯 카얀의 손을 더욱 꼭 잡았다.
“저도 아천타 님에게 가족을 잃었어요.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니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아요.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도울게요.”
“……정말요?”
“네. 전 아펠리아라고 해요.”
그날부로 그녀는 카얀과 함께하게 되었다.
다행히 반려의 직위는 대외적으로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기 때문인지 카얀은 그녀가 아천타의 반려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녀는 시찰을 핑계로 신전을 나와 그를 만났고, 그를 따르는 이들을 소개받았다.
-아천타 님에게 복수를 바라는 이들은 아주 많았어. 나조차도 아천타 님의 그러한 무자비한 처형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그들은 더했겠지. 난 점점 아천타 님과 보내는 시간보다 카얀과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어.
그녀와 카얀이 함께하면 할수록, 둘의 사이는 점차 가까워졌다.
그들을 지켜보던 난 둘 사이에 점차 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그저 잘 맞는 친구가 되겠다고 느낀 게 다였어.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카얀이 좀 더 특별하게 느껴지기 시작했어.
아펠리아가 살짝 웃었다.
-카얀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기분을 간질거리게 만들었고, 알 수 없는 벅참이 느껴지곤 했지. 정신을 차려 보니 난 카얀의 모든 걸 좋아하고 있었어.
“그 기분 알아.”
다시 바뀐 시야는 조금 어둑한 골목이었다.
달빛이 새어 들어와 은은하게 밝은 투박한 길 위에서 카얀이 고개를 천천히 기울였다.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뺨을 살짝 감싼 손길에서 조심스러움이 가득 묻어났다.
입술이 포개어지자 그녀는 조금 더 발돋움해 카얀에게 적극적으로 부딪쳤다.
그녀의 감긴 속눈썹이 파르르 잘게 경련했다. 하지만 설렘이 담겨 있기만 할 뿐, 다른 것에 대한 근심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로부터 입맞춤이 계속 이어지다가, 뭔가가 쨍그랑거리는 소리에 카얀이 입술을 뗐다.
그녀의 뺨을 감싸 쥐고 지척에서 내려다보는 카얀의 시선에는 지극한 애정이 어려 있었다.
카얀이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나직이 말했다.
“뭐가 떨어졌어요.”
그리고 그는 시선을 내리더니 어둑한 골목길에 떨어진 뭔가를 허리를 숙여 주웠다. 그건 그녀의 옷 주머니에서 떨어진 거였다.
물건을 주운 카얀이 어째선지 우뚝 굳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카얀?”
그녀의 부름에 카얀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어둡게만 보이던 물건이 달빛에 비춰져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한 그녀의 눈이 커졌다. 그러곤 거의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마셨다.
카얀의 손에 들린 건, 그녀가 늘 신전에서 차고 있던 목걸이였다.
“아펠리아, 저게 뭐야?”
-저건…… 신격체의 반려를 증명하는 목걸이야. 신이 나를 아천타의 반려로 허락했다는 증표이지.
아펠리아의 설명에 놀란 나는 그들의 표정을 살폈다.
카얀은 피가 식은 것처럼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놀란 얼굴로 섣불리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반려…….”
한참 만에 카얀이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녀를 바라봤다. 눈빛에 충격과 믿기지 않는 슬픔이 어려 있었다.
“이 목걸이…… 아펠리아 님 거예요?”
“카얀, 그건…….”
“당신이, 아천타의 반려라고요…….”
카얀은 허망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눈이 빠르게 젖어 들었다.
카얀은 헝클어진 눈썹을 어찌하지 못한 채 그녀를 바라봤다. 아니라는 대답을 바라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카얀이 상처 받았다는 걸 알고, 나도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어. 나는 몇백 년 동안 아천타 님의 곁에서 그분을 섬겼으니 카얀이 받을 충격도 이해가 갔지. 보통의 경우, 반려는 신격체만을 위한 존재니까…….
곧이어 그녀가 소리 없이 눈물을 떨구고 있는 카얀의 손을 붙잡았다.
-하지만 이제 와 현실을 깨닫고 내 위치로 돌아가기엔, 난 이미 카얀을 너무 사랑하고 있었어.
카얀의 손을 꼭 감싸 쥔 그녀가 힘껏 말했다.
“카얀, 난 아천타 님을 배반해도 좋아. 믿기 어려울 거 알지만…… 난 증명할 수 있어. 믿어 줘, 내 진심이야.”
그렇게 장면이 바뀌었다.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며 신전의 깊은 곳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래서 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기로 했어. 저 때의 내게 아천타 님은, 카얀에게 내 진심을 보여 줄 수단으로 전락하고 난 후였지.
어느 커다란 문과 이어진 방으로 들어간 그녀는 긴장한 듯 침을 삼켰다.
그곳은 웅장한 성전 같았다. 벽의 양옆을 횃불이 장식하고, 성전의 정가운데에 빛을 발하는 둥그런 구체가 붕 떠 있었다.
“아펠리아, 저건 뭐야?”
-오래전에 아천타 님이 따로 빼 두신 힘의 절반가량이야.
“힘의 절반이면 아천타가 벌을 받을 때 빼앗겼던 양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때 아천타 님은 이미 절반가량을 나한테 도난당해 없어진 상태로, 남아 있는 절반의 힘에서 다시 그 절반을 빼앗긴 거야. 그러니 목숨을 겨우 유지할 정도밖에 남지 않은 거였지.
그녀는 두 손바닥을 모아야만 겨우 잡을 수 있는 그 구체를 몰래 품 안으로 낚아채 그 자리를 달아났다.
그러곤 반려의 증표도 내버린 채 몇 벌의 옷가지를 챙겨 신전을 떠났다.
그녀는 그때부터 신전을 완전히 등지고서 카얀과 함께하기 시작했다.
-나날이 불안했지만, 또 행복했어. 카얀은 어떻게 이런 위험한 짓을 했냐고 나를 걱정했지만 내가 그걸 훔쳐 온 덕분에 반란을 성공할 확률도 커졌지.
그녀가 카얀의 곁으로 간 후부터, 두 사람은 불처럼 사랑을 피웠다.
카얀은 타고난 통솔자처럼 사람들을 모으고 여러 가지 대비를 해 가며 반란을 서서히 앞당겼다.
그리고 마침내 결전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