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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79화 (169/191)

179화

“그럼 지금 카얀을 찾으러 가는 거야?”

-응. 아천타 님 몰래 밖을 나갔어. 평소에도 난 시찰을 자주 해서 이상할 점도 없었지.

시야가 빠르게 바뀌었다. 눈을 몇 번 깜빡였을 뿐인데 어느새 낯선 마을을 앞둔 그녀가 지도를 들고 두리번거리는 게 보였다.

“……여기가 맞는 걸까?”

그녀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난 길치였어. 저 때도 길을 잃었고.

“……그래 보이네.”

그러잖아도 썩 치안이 좋아 보이지 않는 마을인데, 그녀는 이곳저곳을 헤매며 점점 외곽지로 가고 있었다. 나는 슬슬 걱정이 되었다.

그러다 아니나 다를까, 인적이 드문 어느 골목길로 들어간 그녀의 앞을 웬 불량배들이 막아섰다.

“아가씨, 길 잃었어?”

“그런 거 아니에요. 볼일들 보세요.”

오래 산 세월이 있어서인지, 그녀는 불량배들의 앞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말을 내뱉곤 돌아섰다.

그러자 불량배들 중 한 명이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나는 어쩐지 앞으로 일어날 일이 훤히 보여서 물었다.

“카얀이 나타나서 널 구해 줬어?”

-응.

“그렇구나.”

수긍하곤 그 상황을 계속 지켜봤다. 카얀이 어떤 멋있는 모습으로 나타나 그녀를 구해 줄까, 홀로 상상했다.

그녀는 자신을 붙잡아 세운 불량배를 순순히 돌아봤다.

그녀를 가까이서 보게 된 불량배가 흑심이 훤히 보이는 웃음을 피워 내더니 손을 살금살금 움직였다.

“아가씨, 갈 곳이 없으면 우리가 데려가 줄까? 아가씨 정도의 얼굴이랑 몸매면 충분히 밥벌이할 수 있다고, 응?”

그녀는 무관심한 얼굴로 불량배를 쳐다보더니 손을 들었다. 그러곤 제 어깨를 붙잡은 그의 손을 살며시 쥐는가 싶더니…… 냅다 꺾어 버렸다.

우드득, 소리가 크게 울렸다.

“으, 으아악!”

“뭐, 뭐야. 아가씨, 미쳤어?”

“눈빛이 불경하네요. 신법에서는 선량한 시민을 성적으로 희롱할 시, 손목이 잘릴 수도 있다는 거 모르시나요? 하늘 아래의 신민이 이런 지식도 없으시다니. 당신들도 신을 모신다면 그건 신성 모독이에요.”

그녀는 싸늘하게 일갈하더니 팔을 붙잡고 뒹구는 불량배의 얼굴을 발로 차 버렸다.

나는 경악해 입을 떡 벌렸다.

“카얀이 구해 준다며?”

-응. 곧 구해 줘.

“불량배들이 구해지는 게 아니고?”

나는 미심쩍은 마음으로 그 상황을 계속 지켜봤다. 잠깐 눈을 뗀 사이에 불량배들 여럿이 고꾸라져 있었다.

그녀는 손을 탁탁 털어 냈다.

“제 나름의 선심이니 벌을 면한 것을 다행으로 아세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금 지도를 펼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는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인 걸까 싶었다. 확실히 아천타를 따라 수백 년을 살아서인지 그녀는 이런 일에 겁이 없어 보였다.

그녀가 지도에 시선을 둔 채 막 골목을 나가려던 때였다. 지치지도 않는지 다시 비실비실 일어난 불량배 두 명이 붉으락푸르락 화난 얼굴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그녀는 로브 자락과 함께 머리채가 붙잡혔다.

“이 계집이 겁을 상실했나. 감히 이런 일을 벌여!”

“이거 놓으세요……!”

아까 그렇게 얻어맞고도 정신을 못 차린 건지, 불량배들이 그녀의 머리채를 잡은 채 뒤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이거 놓으라는 말 안 들려요? 계속 이러시면……!”

“지금 이게 뭐 하는 거지?”

뒤편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아주 익숙한 얼굴이 골목으로 들어서고 있는 게 보였다.

“카얀이네.”

이딜로스와 똑 닮은 얼굴에 나는 눈을 반짝였다. 그는 굳은 얼굴로 다가오더니 그녀의 머리채를 쥔 불량배의 손목을 단숨에 붙잡아 떼어 냈다.

“할 짓이 아무리 없어도 여럿이서 한 사람을 괴롭히다니. 길바닥을 나도는 처지라도 최소한의 품위는 지키지 그래.”

한껏 얻어맞고 꼬질꼬질한 모습이 된 불량배들을 노숙자라고 오해한 건지, 카얀이 아주 사납게 말을 쏟아 냈다.

그사이 그녀는 카얀의 손에 이끌려 그의 뒤에 감춰졌다.

그녀는 이채가 도는 눈으로 카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치안도 안 좋고 허름하기까지 한 이 마을의 분위기와 달리, 멀끔한 차림새를 하고 있던 그는 그녀처럼 이곳의 이방인 같았다.

그녀의 묘한 표정을 유심히 보던 나는 아펠리아에게 물었다.

“……설마 저 때 반했어? 나도 이딜로스에게 첫눈에 반했는데.”

-그런 건 아니야. 저땐 내게 아천타 님이 있었는걸. 그냥, 나처럼 외지인인 것 같은 사람을 만나서 반가웠어.

카얀은 굳이 몸을 쓰지 않고도 몇 마디 위협으로 불량배들을 내쫓아 버렸다. 그는 저들이 멀리 달아나는 걸 확인하더니 뒤돌아 그녀를 바라봤다.

“괜찮으세요?”

“네, 감사해요.”

“저기…… 잠시만요.”

카얀은 문득 그녀를 지나쳐 바닥 어딘가를 보더니 양해를 구하곤 그곳으로 가 뭔가를 주워 왔다.

“이거 떨어트리셨어요.”

카얀은 은빛으로 된 조그만 머리핀을 건넸다. 그녀가 옆머리를 고정하기 위해 꽂고 있던 거였다.

“아……. 감사합니다.”

아까는 그냥 예의를 차려 인사하는 것 같던 그녀가 이번엔 정말로 고마운 기색을 드러냈다.

그의 손에서 냉큼 머리핀을 가져간 그녀는 로브 안으로 손을 넣어 옆머리에 핀을 꽂았다.

그런데 떨어지면서 핀이 고장 나기라도 한 건지, 자꾸만 주르륵 미끄러졌다.

그걸 지켜보던 카얀이 선뜻 말했다.

“저한테 줘 보실래요?”

“고장 난 것 같은데…….”

말 그대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녀는 별 망설임 없이 카얀에게 머리핀을 건넸다.

카얀은 핀을 한번 둘러보더니 그녀를 바라봤다.

“잠시 실례할게요.”

그러곤 그녀의 머리칼을 덮고 있던 로브를 뒤로 살짝 걷고서, 흘러내린 그녀의 머리칼을 옆으로 조심히 쓸어 넘겨 머리핀을 꽂았다.

“됐다.”

분명 그녀가 할 땐 고정이 되지 않았던 게, 카얀이 하니 거짓말처럼 잘 고정되었다.

카얀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떨어지면서 살짝 휜 것 같아요. 그래도 조금만 손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예요.”

그녀는 이제 감사 인사도 잊고 카얀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카얀은 조금 의아해하면서도 붙임성 좋게 말했다.

“다른 곳에서 오셨나 봐요.”

“네.”

“여긴 치안이 안 좋아서 혼자 다니시기엔 위험한 곳이에요. 잘못 길을 드신 거면 마을 밖으로 데려다 드릴게요.”

“길을 잃은 건 아니고…… 찾는 곳이 있어서요.”

“어딜 찾으시는데요?”

“여기요. 혹시 어딘지 아시나요?”

그녀는 주소가 적힌 종이를 카얀에게 내밀었다.

그러고 보니 카얀을 찾으러 온 건데 이미 카얀을 만난 것 아닌가.

하지만 그녀는 눈앞에 있는 잘생긴 남자가 카얀이라는 걸 모르는 것 같았다.

카얀은 주소를 한 번 보고,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보더니 갸우뚱했다.

“음, 길 잃으신 거 맞는 거 같은데요?”

“……네?”

“여긴 옆 마을인데…….”

“…….”

“……제가 데려다 드릴까요?”

길을 잃었단 말에 충격받은 표정을 하는 그녀가 카얀의 눈에도 못 미더워 보였는지, 조심스레 제안했다.

결국 그녀는 카얀과 함께 그 마을을 나와 옆 마을로 향했다.

다행히 마을 간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아서 걸어서도 충분히 갈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을 목적지까지 데려다준 그에게 정중히 감사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은혜를 잊지 않을게요.”

“아닙니다. 보고서 못 본 척할 수도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여긴 왜 찾으셨어요? 보시다시피 아무것도 없는 공터인데.”

카얀이 주변을 둘러봤다. 그의 말대로 여긴 아무것도 없었다. 물체라고는 구석에 박힌 쓰레기 더미들이 다였다.

그녀는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공터를 둘러봤다.

“찾는 사람이 있는데…….”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혹시 연인?”

카얀은 이런 곳을 약속 장소로 잡은 거냐는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고개를 살짝 내저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러곤 낭패 어린 눈을 하는 그녀를 카얀이 가만히 바라봤다. 어쩐지 그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제가 장소를 착각한 것 같네요. 이만 가 볼게요.”

그녀는 다시 한번 감사 인사를 하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의 배에서 우렁찬 소리가 울렸다.

입을 살짝 벌린 그녀가 시선을 들어 카얀을 바라봤다.

그리고 곧, 또 한 번 꼬르륵 소리가 크게 울렸다. 줄곧 표정의 변화가 미미하던 그녀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아, 그……. 제가 오는 내내 끼니를…….”

그녀가 민망함에 허둥지둥 말하는 걸 보던 카얀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풀이 죽어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럴 수도 있죠. 그럼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제가 식사를 대접해 드릴까요?”

“……신세를 져도 되나요?”

“당연하죠.”

이 마을의 맛있는 식당을 안다며 앞장서 가는 카얀과 뒤를 따르는 그녀의 모습을 지켜봤다.

눈앞에 있는 게 카얀인 줄도 모르고 아무런 경계심이 없는 그녀를 보자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아펠리아가 말했다.

-카얀은 생각보다 나와 여러 방면에서 잘 맞았지. 난 이렇게 친구처럼 남과 대화하는 게 오랜만이라서, 카얀과 또 만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어.

“그래서? 다시 만났어?”

-응. 카얀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다음에도 이곳에서 만나자고 먼저 말해 줬어. 아직 통성명도 제대로 하지 않은 사이인데, 난 카얀과 잘 맞는 친구가 될 것 같다고 느꼈지.

기억을 더듬고 있는지 아펠리아는 웃음기를 살며시 머금으며 말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날 때마다 다음 만남을 약속하는 식으로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꾸준히 만났어. 난 어느새 카얀을 만나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고, 다른 건 모든 게 지루했어. 심지어는 아천타 님과 함께 있는 시간조차도 말이야.

“……이름도 모르는 채로 계속 만난 거야?”

-응.

“왜 통성명을 하지 않았어?”

-카얀도 먼저 말할 생각이 없어 보였고, 난 내 이름이 여기저기 알려져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그거야 그렇겠네.”

-그런데, 카얀은 내게 이름을 밝히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던 거였어.

“응? 이유?”

-카얀은…… 날 이용하기 위해 접근한 거였거든.

그 순간 눈앞의 장면이 훅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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