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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78화 (168/191)

178화

“맞네. 이딜로스였어……!”

생각해 보면 애초에 그만한 금액을 아무렇지 않게 기부할 수 있는 재력가는 카델라로트 공작밖에 없었다.

그간 이딜로스의 옆에서 이 금액이 믿기질 않는다며 몇 번이나 장부를 확인했었던 나는 배신당한 눈길을 보냈다.

“왜 말을 안 했어!”

이딜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뭐, 딱히 네 칭찬을 바라서 기부한 건 아니니까. 진심으로 신전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한 거야.”

그러곤 다시 장부로 시선을 내리더니 읊조렸다.

“이걸 노린 것도 있고.”

아무렇지 않게 업무를 보기 시작하는 그의 모습에 나는 입을 살짝 벌렸다.

처음, 그를 반려로 맞이하겠다고 했을 때 사제들이 반겼던 이유를 알 것 같다.

-어서 뽀뽀해.

“뭐?”

난데없이 아펠리아가 끼어들었다.

내가 갑자기 혼잣말을 하는데도 이딜로스는 잠시 쳐다보기만 할 뿐, 익숙하게 제 할 일을 했다.

-카얀은 칭찬을 입맞춤으로 해 줘야 좋아하던걸. 네 짝도 그렇지 않아?

“그건 맞긴 한데…….”

-어서 뽀뽀해.

아펠리아가 기대가 잔뜩 담긴 목소리로 재촉했다.

나도 칭찬해 주고픈 마음은 있지만, 나한테 비밀로 했다는 건 조금 괘씸한데…….

내가 경악하며 후원금에 적힌 0의 개수를 세고 있을 때 옆에서 은근하게 웃고 있지 않았던가.

나는 이딜로스가 후원자인 줄도 모르고 이 사람 패가망신하는 거 아니냐고 온갖 걱정을 해 댔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아직은 괘씸하단 생각이 더 커서, 나는 화제를 돌려 버렸다.

“그건 그렇고, 나 아직 궁금해. 너 아직 네가 왜 카얀을 미워하지 않는지 안 알려 줬잖아.”

-음…….

“알려 줘. 난 그때 네가 아천타를 해치고 싶어 하는 내 마음에 동조하는 걸 느꼈단 말이야.”

아천타에게 검을 겨누었던 날, 검이 전율하듯 떨렸던 것을 여전히 기억한다.

나는 아펠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어느새 이딜로스도 이쪽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알았어. 나도 네가 카얀을 오해하게 두고 싶지는 않아. 네게 보여 주기 전에 우선 말할게. 카얀과 난…… 반란을 일으킨 건 맞지만, 결코 변절자는 아니야. 진짜 변한 것은, 아천타 님이셨으니까.

마침내 입을 연 아펠리아의 말을 진지하게 듣던 난 의문을 느꼈다.

“……잠깐만, 보여 준다고? 뭐를?”

-네가 알고 싶어 하는 것. 내 기억들을 보여 줄게. 지금부터 아주 잠시만 잠들면 될 거야.

“자, 잠깐만……!”

당혹스러움에 이딜로스 쪽을 바라보자마자, 전조도 없이 눈앞이 훅 점멸했다.

너무 급작스러운 일에 멍해져 있을 때, 아펠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리 와. 어서.

“나…… 지금 잠든 거야?”

-응. 기절시켰어.

“…….”

-왜 그래, 혹시 이마 아파? 아까 책상에 박는 건 봤지만 모를 줄 알았는데…… 미안.

아펠리아의 감흥 없는 사과에 어이가 없었다. 나는 아펠리아의 목소리를 따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야를 헤쳐 나가며 말했다.

“내 의견은 들어 보고 재웠어야지!”

-많이 궁금해하길래 상관없을 줄 알았어.

“이딜로스를 몇 시간 동안이나 못 보게 생겼잖아.”

-그래도 일어나면 바로 볼 수 있을 거야. 음, 지금 네 손을 꼭 잡은 채로 널 걱정하고 있어.

아펠리아의 말에 나는 기겁했다. 그러고 보니 내가 갑자기 픽 쓰러져서 이딜로스가 걱정할지도 모르겠는데.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아펠리아가 냉큼 말했다.

-내가 방금 알려 줬어. 넌 잠시 전생을 보고 올 거라고. 나 잘했지?

“응…….”

아펠리아의 장난스러운 목소리를 들으며 체념하듯 대답했다. 그러자 아펠리아가 장난기를 살짝 걷어 내고서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비록 네 짝은 아니지만, 닮은 사람은 볼 수 있을 테니까.

아펠리아의 그 말을 끝으로, 시야가 차츰 밝아졌다. 눈을 살짝 찡그린 순간, 갑작스럽게 눈앞이 환하게 탁 트였다.

갑작스러운 시야의 변화에 나는 반사적으로 숨을 들이켰다.

산뜻한 풀 내음이 콧속을 가득 채웠다.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숲속, 싱그러운 풀잎들이 산들바람을 따라 기울고 있었다. 시야가 닿는 곳곳에 처음 보는 화사한 꽃들이 만개해 있었다.

나도 모르게 넋 놓고 입을 벌렸다.

귓가로 아펠리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네가 알던 그 왕국이 아직 세워지지 않은 시대. 오로지 신격체인 아천타 님이 하늘 아래의 모든 것을 다스리시던 때지.

“처음 보는 식물이 엄청 많아…….”

-네가 살던 시대로부터 아주 오래전이니까.

나는 자연히 아펠리아의 목소리를 따라 이동했다. 그녀의 목소리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는 것처럼 앞서가고 있었다.

-저기 있네.

아펠리아의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바라봤다.

수풀 너머에 둥그런 은빛 새 둥지 같은 가제보가 보였다.

햇살을 받아 눈부시게 반짝이는 가제보 안. 풍성한 연갈색 머리칼을 길게 풀어 내린 한 여자가 보였다. 꼭 잎사귀에 고인 새벽녘의 이슬처럼 점잖아 보였다.

가지런히 있는 그 모습이 건들면 ‘톡’ 하고 터지며 향기를 퍼트릴 것 같은 유약한 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내리깐 그녀의 푸른 시선은 어딘가 음울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여.”

-응. 지금 조금 심란한 상태야.

“왜?”

-저 때의 난 이미 수백 년을 살았어. 이 시대는 오로지 단일 신격체만이 존재했고 수명이 수천 년 정도는 되었지. 그러다 보니 아천타 님의 반려였던 난 신의 은총을 받아 자연히 수명이 늘었어.

“늙지도 않는구나.”

-응. 그렇게 난 일반 사람들보다 오래 살았고, 내 가족과 친구들이 하나둘 떠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지.

아펠리아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몇백 년이 흘렀고……. 저 날은 마지막으로 남은 내 가족을 잃은 날이었어. 그마저도 아주 먼 혈연에 불과했지만.

다시 보니 저 너머에 있는 아펠리아는 아주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네가 오랜 세월을 사는 동안 대가 끊어진 거야?”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건…….

그때, 아펠리아의 목소리가 멈췄다. 저 너머의 오솔길에서 누군가 나타났기 때문인 것 같다.

“이곳에 있을 줄은 몰랐군. 그대를 한참이나 찾았는데.”

다가온 인영은 흑단같이 긴 머리칼과 차분한 녹색 눈을 가진 아천타였다. 이때는 지금과 달리 격정적이지도, 악독하지도 않은 모습이었다.

신격체라는 이름에 걸맞게 성결한 분위기와 인상을 갖춘, 아주 권위 있는 절대자 그 자체였다.

오랜 세월 신격체였기 때문인지 그에게선 가만히 있어도 위엄이 느껴졌다. 그와 비교하자면 난 아주 하찮은 수준이었다.

아천타는 대답도 하지 않고 음울하게 있는 그녀를 보고선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아펠리아.”

“……네.”

그의 부름에 그녀는 마지못해 대답했다. 하지만 여전히 아천타를 쳐다보지 않고 발치만 바라봤다.

“상심은 이해하지만, 어쩔 수 없어. 그들과는 아주 먼 혈연이었을 뿐이니 곧 잊을 수 있을 거야.”

“……제가 기다려 달라고 부탁했잖아요.”

이윽고 고개를 든 그녀의 눈빛엔 실망감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왜 꼭 그들이어야 했어요? 아무 잘못이 없어요. 제가 알아요. 멀지만 제 가족이었던 걸요.”

울분이 섞인 그녀의 말에 아천타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를 달래는 투로 말했다.

“그들은 신을 모함했단 걸 알지 않나. 그대의 가족도 아니야. 그저 대가 이어지고 가문이 흩어지며 파생된, 피가 아주 살짝 섞인 남일 뿐이지.”

“그렇다고 극형을 내리시나요? 제겐 가족이었어요!”

비애가 느껴지는 외침에 나는 상황을 단번에 이해했다.

아천타가 아펠리아의 유일한 가족을 처형했다.

“……아천타 님은 모르세요. 평생 모르실 거예요. 주변에 그 누구도 남지 않은 저에게 그 혈연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달가웠는지를요.”

“그대 곁에 내가 있는데 왜 그런 말을 하지? 이만 들어가서 쉬도록 하자.”

“아천타 님은…… 다르시잖아요.”

끝내 그녀는 고개를 숙이더니 눈물을 흘렸다. 아천타는 더 이상 말을 거들지 않고, 조용히 그녀를 토닥였다.

침잠한 마음으로 그 모습을 보고 있을 때, 귓가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천타 님은 대체로 내 곁에 계셨지만, 저 때의 내게 필요했던 건 진실 어린 친구와 언제든 기댈 수 있는 가족이었어. 하지만 내 지위가 높아지면서 사람들은 아무도 나를 자신들과 동등하게 보지 않았지.

“……외로워 보여.”

-응. 외로웠어, 아주. 아천타 님은 인간이 아니시기에 나와 다른 점이 너무 많았으니까. 내게 공감하지 못할 때가 많았고, 나 역시 아천타 님에게 그럴 때가 있었어.

눈앞에 보이던 장면이 바뀌었다. 이번에는 그녀가 홀로 책상에 앉아 문서를 보고 있었다.

“반대 세력이라…….”

슬쩍 가까이 가서 보니 수많은 이름이 적힌 긴 명단이었다. 그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악순환의 연속이야. 반심을 품어 죽으면, 그들의 가족이 또다시 반심을 품게 되어 죽으니…….”

그녀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마침 그걸 눈치챈 건지 아펠리아가 말했다.

-이때는 신을 모함하기만 해도 극형을 선고받았어.

“뭐?”

-그게 단순히 누명일 뿐이라도. 아천타 님은 신의 명예를 지키는 것이 바로 신격체로서 행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셨지. 처형당한 내 마지막 가족들도 누명을 쓴 게 다였어.

나는 경악했다. 아무리 지금과는 가치관이 다른 과거라지만, 그래도 누명만으로 죽어야 한다니.

정작 그 신은 지금 이딜로스처럼 신앙심이 조금도 없는 인간을 아주 예뻐하고 있지 않나?

-현재를 사는 네겐 더욱 충격적이란 거 알아. 하지만 이때는 왕도 없었으니 신이 곧 절대자였고, 신의 대리자였던 신격체야말로 법이었지.

나는 잠시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러다 무심코 그녀의 손에 들린 명단을 훑다가, 맨 아래 홀로 다른 색으로 적힌 이름을 발견했다. 주요 인물임을 표시해 둔 것 같았다.

절묘한 타이밍에 그녀가 말했다.

“……카얀 노아르크? 이 사람의 자취가 왜 내게 먼저 보고된 거지?”

그녀는 갸웃하더니 한 장을 넘겼다. 그곳엔 카얀 노아르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위치가 적혀 있었다.

[벨데어 메이베크 449-17]

이걸 기록한 사람도 확신하지 못한 건지 주소 뒤에 괄호를 친 물음표가 두세 개 찍혀 있었다.

문득 아펠리아가 말했다.

-불확실한 건이라 나한테 먼저 보고되었던 것 같아. 종종 그럴 때가 있긴 했거든.

카얀 노아르크가 머물렀다고 추정되는 주소를 한참이나 물끄러미 보던 그녀는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명단을 덮어 서랍장 깊숙이 넣더니, 방으로 가 가벼운 옷과 로브 차림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그녀는 결의를 담은 얼굴로 목걸이를 풀어 주머니에 넣었다.

“바쁘신 아천타 님을 대신해 내가 먼저 파악해 봐야겠어.”

그녀가 방을 나가자마자 아펠리아가 대뜸 말했다.

-저건 핑계고, 실은 궁금했어. 카얀 노아르크라는 사람이. 그는 신이 아닌, 아천타 님에게 맹목적인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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