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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77화 (167/191)

177화

그런 내 질문을 예상하지 못한 듯, 데비드의 표정이 재미있다는 기색으로 바뀌었다.

“궁금하다고 하니 알려 줘야겠구나.”

“네.”

“아릴, 전생의 넌 아주 특별했다. 아펠리아는 내가 본 인간들 중 정해진 것을 가장 많이 벗어난 아이였어.”

데비드는 옛 기억을 더듬는 듯 눈을 살짝 좁히고서 말했다.

“운명, 인연, 그리고 생의 끝조차…….”

“…….”

“아주 많은 것을 뒤바꾼 아이였지. 바꾼 것을 넘어 그건 개척이었어. 그러니 내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인간 아이였다. 난 그 애를 쉬이 보내고 싶지 않았고…… 그 바람이 모여 네가 되었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전생의 난 아천타를 타락하게 만든 원인이나 다름없는데.

신격체인 아천타를 배반하려 한 변절자였던 나를, 왜…….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고 있을 때, 데비드가 장난스레 말했다.

“내 사랑을 두 번째로 많이 받는 인간 아이가 이딜로스고. 내가 신인 걸 알고도 날 아무렇게나 대하는 깡이 대단하지 않으냐? 볼수록 귀여운 아이야.”

데비드가 호쾌하게 웃어 댔다. 이딜로스를 정말 예뻐하는 기색이 묻어났다.

참 별난 신이구나 싶었다. 신앙심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인간을 두 번째로 예뻐한다니…….

심지어 살아 있는 이로 범위를 좁히면 가장 예뻐하는 인간이라는 건데.

신앙심 깊은 사람들이 들으면 아주 억울할 것 같았다.

그때, 반지가 자르르 진동했다. 의아하게 손을 들어 올리자 반지가 커다랗게 몸집을 부풀린 것을 발견했다.

“아펠리아, 반갑구나.”

데비드는 아펠리아가 반가움을 표출하고 있다는 걸 알아챈 듯 인사했다. 반지가 흐물거리는가 싶더니 다시 얌전해졌다.

나는 반지를 살짝 쓰다듬은 후에 데비드를 바라봤다.

“이 반지가 아펠리아라는 걸 어떻게 아세요?”

“그 애를 너에게 보낸 게 나니까. 널 돕고 싶어 하더구나.”

나는 신기한 마음에 반지를 바라봤다. 죽기 전의 아펠리아는 어떤 인간이었을까?

그녀는 아천타의 반려임에도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에게 대적하고자 했고, 그 탓에 목숨을 잃었지만 신의 사랑으로 환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수많은 일 끝에 나를 도와주기 위해 온 것은, 자신이 벌인 일을 매듭짓기 위해서가 아닐까.

반지를 잠자코 내려다보던 나는, 앞에서 들린 나직한 웃음에 고개를 들었다.

창가에 기대어 선 데비드가 선선히 웃으며 나를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아릴, 널 만든 건 내가 한 무수한 선택들 중 가장 만족스럽구나.”

“…….”

“이만하면 명분은 다 써먹은 거겠지. 다시 방관을 일삼는 지루한 삶으로 돌아갈 때가 되었어.”

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가시려고요?”

“그래. 아천타도 한동안은 난동을 피우지 않을 것 같으니 나도 이만 가 봐야지.”

“자, 잠시만요. 이딜로스를 데리고 올게요!”

당황해 허둥지둥 돌아서려 하자, 데비드가 가로막았다.

“됐다. 인간인 그 아이가 나를 자주 만나서 좋을 것도 없어.”

“하지만…….”

“애초에 그 정나미 없는 것이 날 배웅이나 하겠느냐?”

데비드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그의 낯에도 아쉬움이 한껏 서려 있었다.

“이딜로스를 제외한 다른 인간들에게선 나에 대한 기억을 모조리 지울 예정이다. 이딜로스는 내 정체를 안다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갑자기 데비드라는 인간이 사라지는 것일 테니 말이다.”

“……네.”

“이딜로스에게 안셀을 너무 괴롭히지는 말라고 전해 주고.”

“알겠어요.”

내 대답을 들은 데비드가 미소 지었다.

“잘 지내거라. 난 언제나 널 지켜보고 있을 테니, 어떤 두려운 일이 생기더라도 용기 낼 수 있을 거다.”

“네, 조심히 가세요.”

정말로 끝을 알리는 작별 인사였다. 이런 인사를 주고받는 것이 처음이라, 기분이 생경하고도 쓸쓸했다.

데비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돌았다.

그리고 그는, 한순간에 신비로운 빛이 되어 밤하늘로 사라졌다.

나는 뒤따라 창가로 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제는 내 생이 다하기 전까지, 다신 볼 일이 없을 그를 위한 배웅이었다.

아펠리아가 아쉬워 우는 것처럼 반지가 축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 * *

신전 안팎의 상황을 어느 정도 수습했을 때, 나는 사람들을 대신전으로 불러 모았다.

상황을 정리했으니, 이제는 어수선한 민심을 다시 잠재울 때였다.

많은 사람이 모였다. 여전히 나를 따르는 이들과 나를 비난하는 이들, 그리고 해명을 원하는 이들까지.

나는 소란스러운 성전을 가로질러, 알현식 때 늘 올랐던 단 위로 향했다. 이어진 넓은 계단 끝에 위치한, 마치 왕좌와 같은 자리가 보였다.

나는 계단을 오르다 말고 멈춰 뒤를 돌아봤다.

오늘 난, 모두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저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않을 생각이다.

평소보다는 낮지만, 아주 약간의 높이를 둔 계단에 서서, 나는 모인 이들의 얼굴을 쭉 둘러봤다. 나를 향한 갖가지 표정들이 보였다.

나는 차분히 숨을 내쉰 후에 입을 열었다.

“오늘 그대들을 부른 것은 최근 신전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술렁이던 관내의 분위기가 삭막하게 바뀌었다. 굳이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아도 그들 모두가 내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고 있다.

긴장되었다. 하지만 난 결코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속으로 심호흡한 뒤,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그 일은, 오래전 벌을 받고 지위를 박탈당했던 고대의 신격체가 벌인 일이다. 죄 없는 이들을 죽이고 다시 멋대로 되살린 것은 그것이 하늘을 향한 그의 복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그 일을 입에 올리는 내 심정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다. 내게도 그 일은 너무나 아픈 기억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내 마음과 달리, 고작 해명뿐인 말은 아무리 진정성을 담아도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희생당한 이들은 내가 이곳에 왔을 때 나를 도와준 가족 같은 이들이었다. ……나 또한 그 일을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나는 손을 한쪽 가슴 위에 얹었다. 그리고 진중히 허리를 숙였다.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신격체라는 이름을 달고도 그들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사죄하겠다. 아니…… 사죄하겠습니다. 유가족분들과 다른 모든 분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점차 커지던 소란스러움은 끝내 다시 잠잠해졌다.

나는 눈을 감았다. 그들을 지켜 내지 못한 내 죄를 수없이 상기하며 나는 오래도록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다시 자세를 바로 한 나는, 내가 처음 이곳에 왔을 때 왜 사제들을 여럿 벌주어야 했는지도 모두 이야기했다.

그간 입 닫고 있었던 일이지만, 언제까지고 그들과 나 사이에 벽을 두고 오해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잘했어.”

모든 것을 알리고 돌아온 나를 이딜로스가 맞이했다.

내가 조금 뒤숭숭한 마음으로 올려다보자 그가 나를 끌어안아 토닥였다.

일방적으로 이어졌던 긴 이야기와 깊은 사죄를 마치고 둘러본 좌중은 충격과 벙벙함이 가득했었다.

비록 아천타가 가세하기는 했지만, 사제들이 그간 수인을 학대했었다는 말에 사람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진실을 알렸으니 내가 할 일은 끝난 거야. 사람들이 받아들이길 기다려야지, 이제.”

“응.”

이딜로스의 품에 파묻힌 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안정을 찾았다.

아래에서 킁킁대는 내가 웃기기라도 한 건지 그가 옅은 웃음을 흘렸다.

“왜 그렇게 냄새를 맡아.”

“이딜로스 냄새가 좋아.”

내 웅얼거림에 이딜로스가 갸웃하더니 제 팔을 들어 본인의 냄새를 맡았다.

고개를 들어 보니 이딜로스가 세상 심각한 얼굴로 냄새를 맡고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이딜로스가 하던 걸 멈추고 날 바라봤다.

“왜 웃어.”

“집중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아니지, 멋있는 건가?”

내가 생글생글 웃자 이딜로스가 피식 웃었다. 그가 들고 있던 손으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 시작했다.

“어땠어. 좋은 냄새 났지?”

“아무 냄새도 안 나던데.”

“응? 그럴 리가 없는데. 어디 봐 봐.”

나는 맹렬한 기세로 다시 킁킁거리기 시작했다. 이딜로스가 어이없다는 듯 웃더니 내 이마를 손으로 꾹 눌러 밀어냈다.

“강아지도 아니고.”

“호랑이잖아. 사냥감 찾을 때 가장 중요한 게 냄새 맡는 거거든?”

“…….”

웃다가 굳은 이딜로스가 조용히 한 걸음 떨어졌다.

그날 이후, 갈라진 여론이 차츰 드러나더니 대립하기 시작했다.

신의 보살핌을 받는 나라에서, 감히 평범한 인간이 신격체를 해하다니.

그들이 벌 받은 게 옳다는 사람이 있는 반면, 그들이 원해서 수인을 해친 것도 아닌데 처벌이 과했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신격체가 허리를 굽혔다는 것에 적잖게 충격을 받은 건 똑같은지 내 사과를 우습게 넘기는 이들은 없었다.

“그래도 신전에 찾아오시는 분들이 다시 늘었습니다.”

사제들이 푸근하게 웃었다.

“거기다 알현을 요청하는 이들도 늘지 않았습니까. 아릴 님은 원래도 멋있으셨지만, 이번 일을 거치며 좀 더 친근한 이미지로 변하신 모양입니다.”

“그런가?”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한 거라고는 사과밖에 없는데 그렇게까지 이미지가 개선되기도 하다니.

어쨌거나 마냥 나쁜 쪽으로 일이 흘러가지는 않아 다행이었다.

그리고 며칠 후, 엄청난 액수의 후원금이 익명으로 신전에 들어왔다.

“신전이 받은 상처가 조금이나마 아물어지기를 바란다는 메시지가 함께 도착했더군요.”

재계 관리부 측의 보고를 받은 나는 기록되어 온 무수한 0들의 향연에 입을 떡 벌렸다.

“……이게 후원금이라고? 이 정도면 신전을 매수하겠단 뜻 아닌가?”

“저도 보고 놀랐습니다만, 확실히 후원금이 맞습니다.”

재계 관리 부장의 눈이 반짝였다. 나는 재차 후원 금액을 훑어보곤 헛웃음을 터트렸다.

“대체 누가 이런 거금을…….”

그 익명 후원자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론가 새어 나가더니 곧 일파만파 곳곳에 퍼지게 되었다. 그러자 이상한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귀족 층에서 신전도 피해를 입었을 뿐이라는 식의 메시지를 담아 너도나도 후원하기 시작한 거다.

꼭 그 익명의 후원자를 따라 하는 것처럼, 그게 유행이 되어 후원금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인간들은 무슨 심리로 이러는 거지?”

아무리 내가 절반이 인간이라지만,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장부를 넘기던 이딜로스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들도 멋있고 싶다는 거겠지.”

이 기막힌 상황에도 의연하기만 한 태도에 그를 바라봤다. 놀랍지도 않은 건지.

그러다 장부를 훑는 이딜로스의 입매가 만족스럽게 살짝 올라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를 유심히 보던 나는 눈을 게슴츠레 떴다. 왠지 촉이 왔다.

“……이딜로스지?”

“뭐가?”

“익명으로 어마어마한 금액을 기부한 거 말이야.”

이딜로스가 장부를 살짝 내리더니 날 바라봤다. 그러더니 눈가를 살짝 휘었다.

“나인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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