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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76화 (166/191)

176화

마음을 감싸 안는 것 같은 따스함이 느껴졌다. 알 수 없는 그리움에 기분이 일렁거렸다.

나는 이끌리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 일단 앉아 보거라.”

데비드가 먼저 근처에 자리 잡았다. 나는 그를 따라 원래 앉아 있었던 자리에 착석했다.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데비드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듯 나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할까.

늘 유들유들하던 그의 분위기가 제법 진지했다. 나는 긴장감을 가진 채 그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이 사람이 신이야.”

“……응?”

그런데 말은 옆에 있던 이딜로스에게서 나왔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봤다.

이딜로스가 헛소리를 하는 일은 드문데. 그러니까, 데비드가…… 만물을 창조하고 나를 빚어낸 신이라고?

미심쩍은 눈길로 데비드를 쳐다봤다. 그는 기가 막힌 표정으로 이딜로스를 보고 있었다.

“이 녀석아. 지금 내가 분위기 잡고 있는 걸…….”

“너무 뜸을 들이셔서요.”

“못된 것. 내가 그렇게 가르쳤더냐. 그건 그리 쉽게 밝혀도 될 사실이 아니다, 응? 여기저기 퍼트리고 다닌 건 아니겠지? 설마 안셀도 아는 것이냐?”

“……절 뭘로 보시고.”

정말 데비드가 신이라도 되는 양 나누는 대화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혼란스러움에 두 사람을 번갈아 보자, 데비드가 헛기침을 했다.

“그래, 아릴. 내가 널 만들어 낸 창조주다. 그러니 넌 진짜 내 딸인 셈이지. 자, 이제 날 아버지라고 불러 보거라.”

“말도 안 돼……. 네가 진짜 신이라고?”

“아버지라고 불러 보라는 내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듣는구나.”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간 데비드에게서 수상한 모습이 종종 보이긴 했다.

평범한 인간이라기엔 설명하기 힘든 능력과 지식들. 그리고 아천타를 쫓는 대담함까지.

그래, 신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가능한 거였어.

혼란스러운 머리를 정리하고 데비드를 바라보자, 한숨을 내쉰 그가 진지하게 내 눈을 마주 봤다.

“우선 사과부터 해야겠구나. 이런 위험에 처하게 만들어 미안하다.”

데비드가 고개를 숙였다. 나는 당황했다.

“그, 그렇게 사과할 필요는 없는데…… 요.”

“아니, 이건 아천타를 제대로 붙잡아 두지 못한 내 잘못이지. 나는 자비를 베풀어 그 아이의 목숨을 살려 두었건만, 아천타는 내가 명분이 없으면 하늘 아래의 일에 참견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해 온갖 악행을 벌였지.”

“…….”

“그간 나는 내 아이들이 하나둘 구름이 되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만 봐야 했다. 창조주는 모든 것을 방관하는 것이 원칙이기 때문이다.”

데비드의 낯이 어둑해졌다. 나는 덩달아 숙연한 마음으로 그의 말을 들었다.

“하지만, 아천타가 꾀를 부려 네 운명을 바꾼 순간부터 내겐 너희에게 참견할 수 있는 명분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단다. 아천타가 재앙을 초래하려 했기 때문이지.”

“잠시만요.”

이딜로스는 뭔가가 이해가 가지 않는단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선생님께서는 오래전부터 저와 안셀의 곁에 함께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를 직접 가르쳐 도움을 주셨으니 그건 이미 방관이 아닌데요. 선생님께선 이미 제 목숨을 수십 번 살리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뭐, 고맙단 인사를 그리 둘러 하느냐.”

데비드가 어깨를 가볍게 으쓱했다. 무심한 이딜로스에게 그런 식의 말을 들어 흡족한 표정이었다.

“그때 이미 난 명분이 있었어. 아천타와 깊은 연관이 있는 널 간접적으로라도 살려야 했지.”

데비드가 이딜로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릴에게 말했느냐? 내가 네게 알려 주었던 그 사실.”

“……그 사실?”

나는 어리둥절하게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이딜로스는 고개를 저었다.

“저런. 그럼 우리 딸은 모르는 거로군.”

“뭔데? ……요?”

“아릴, 넌 말이다. 이딜로스의 집에 처음 간 순간부터 이미 성체가 되었어야 했어. 햇수로 치자면 넌 벌써 아홉 살이다.”

“네? 전 마멜라에게 주워진 그해에 태어났으니까…… 이제 곧 네 살이에요.”

“아니, 넌 아홉 살이다. 아, 열 살인가.”

나이를 두고 대화하는 우리를 보며 이딜로스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되게 한심하게 보는 것 같기도 한데, 완전히 그렇다고 하기엔 조금 묘한 감이 있었다.

그를 본 데비드가 갑자기 웃음을 터트렸다.

“완전 도둑놈이군. 스스로도 그리 생각하는 모양인데.”

“……수인과 인간은 엄연히 나이 체계가 다르니 상관없습니다.”

“그렇다기엔 새삼 충격받은 얼굴이면서. 귀여운 녀석.”

데비드가 흐뭇하게 바라보더니 눈가를 찡긋했다. 이딜로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아예 돌려 버렸다.

“어서 말씀이나 해 주십시오. 아릴이 기다립니다.”

“그래. 아릴, 내가 지금부터 모든 진실을 네게 알려 주마.”

한참이나 다른 말로 샜던 그가 다시 진지하게 말문을 뗐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태어났을 땐 이미 아천타가 신전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때 아천타는 어느 정도 힘을 모아 둔 상태였고, 이번에야말로 복수를 감행하기로 했지. 그 계획은 수인을 이용하는 것이었어.”

맞다. 아천타는 내가 반려를 죽이게끔 유도하려 했으니까.

“그 아이는 제힘이 온전히 회복될 시기에 맞춰 수인을 이용하기 위해 갓 태어난 널 시간이 흐르지 않는 공간에 가두었어.”

“그럼 제가 네 살이 아닌 이유가…….”

“그래. 넌 그곳에 몇 년이나 시간이 멈춘 채로 갇혀 있었다. 그러는 중에 아천타가 네 힘을 가로챘기 때문에, 네 몸은 힘을 최소화할 수 있는 자그만 모습을 유지했던 거지.”

믿기 힘든 사실에 입을 벌렸다. 내가 맹신하고 있던 내 나이가 틀렸고, 내가 눈도 뜨기 전에 아천타에게 그런 짓을 당했었다니.

“그리고 말이다. 그때 넌 지속적으로 아천타에게 세뇌를 받았어. 이건 이딜로스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다만.”

“……세뇌?”

갓 태어났을 때 내가 세뇌를 받은 적이 있다고?

나는 갑자기 무서운 마음이 들었다. 그때의 영향으로 내 나이마저 잘못 알고 있었는데, 세뇌라니.

내가 굳게 믿고 있는 또 다른 무언가가 부정당하리라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인간을 사랑해선 안 된다.”

“…….”

“네 그 천명 말이다. 내가 정녕 네게 그런 것을 내렸겠느냐?”

나는 무심코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뻐끔거렸다. 갑작스러운 흥분에 호흡이 잠시 막혔다가, 점차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건, 그 말은…….”

“아천타가 널 가둔 채 거듭 세뇌했지. ‘너는 절대로 인간을 사랑해선 안 된다. 그 무엇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네가 타고난 천명이다’라고.”

나는 숨을 들이켰다. 정말이다. 데비드가 읊은 것은, 내가 천명으로 인지했던 그 말과 아주 똑같았다.

그가 나를 딱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봤다. 동시에 그는, 나를 안심시키려는 듯 말했다.

“아릴, 내가 너에게 내린 진짜 천명은 그와 정반대되는 거다. 네 천명은,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야.”

“아…….”

그의 말을 듣는 순간, 긴 시간 참아 왔던 눈물이 후드득, 볼을 타고 떨어졌다.

나를 그토록 힘들게 했던 것이 실은 진짜가 아니었다. 그게 모두 가짜였다. 나를 벼랑으로 몰아넣은 것들이…….

안도와 기쁨, 억울함과 후회가 거세게 밀려왔다.

이딜로스가 내 어깨를 살짝 감싸 안아 토닥였다. 나는 몰아치는 감정에 아이처럼 간절히 물었다.

“그럼, 저…… 더 이상 참을 필요 없는 거예요? 이제 마음껏, 좋아해도 되는 거예요……?”

“그래.”

그는 인자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이딜로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간의 시간에 대한 서러움이 많았지만, 그보다 나를 더욱 눈물 나게 만들었던 것은 바로, 따스하게 밀려온 안도감이었다.

이딜로스가 다독이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데비드는 그런 우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아천타는 네 운명을 완전히 쥐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그날 네가 이딜로스의 동생을 만나 카델라로트로 갔던 것조차 아천타가 의도했던 바지.”

“망할…….”

이딜로스가 내 머리를 꼭 감싸 안으며 욕설을 흘렸다. 정말로 아천타의 손에 놀아난 기분이었다.

아슐란일 때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내 선택을 유도하곤 했다. 그게 다 나를 위하는 것인 양 속이고서.

나는 어금니를 세게 물었다.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자기가 뭔데, 고작 복수심 하나로 내 인생을 멋대로 조작할 수가 있지?

아천타를 찾아내서 복수하고 싶다. 당장에 찾아내 그를 없애 버리고 싶은데…….

“……아천타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는 거예요?”

“작정하고 숨으면 그렇지. 그런데 내가 보기엔 적어도 몇십 년 동안은 꽁무니도 보이지 않을 것 같더구나.”

“…….”

“아릴, 복수심에 눈이 머는 건 좋지 않은 거다. 지금 당장은 찾아온 평화를 누리며 괴로웠던 기억들을 덮는 게 어떻겠느냐. 다른 무엇보다 네 행복이 가장 중요한 거다.”

“……네.”

내 머리칼을 쓸어 주는 이딜로스의 다정한 손길을 받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데비드의 말이 맞았다. 복수만을 좇는 건 아천타와 같은 행동을 하는 거나 다름없지 않나.

복수심에 눈이 멀어 사는 건, 나를 가장 괴롭히는 방법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의 말대로, 지금 나는 우여곡절 끝에 얻은 이 평화를 누려야 했다.

* * *

늦은 밤, 이딜로스와 함께 바깥 상황을 수습하고 침실로 돌아왔더니 뒷짐을 지고 달밤을 올려다보고 있는 데비드가 보였다.

이딜로스가 없는 지금, 나는 소심하게 그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신이란 걸 알게 되니 어딘가 조심스러워졌다.

이딜로스는 대체 어떻게 신한테까지 무덤덤하게 굴 수가 있는 거지…….

“왔구나. 바깥일이 상당히 소란스러웠을 텐데, 정리는 잘되었고?”

“수도도 그렇고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는요.”

“그래. 고생했다. 기특하구나.”

데비드는 나를 칭찬하며 웃었다. 나는 조금 쑥스러운 마음이 되었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저기, 그런데. 예전에 제가 정체를 물었을 때 그렇게 자신을 소개했잖아요. 신이 세 번째로 사랑하는 존재라고. 절 속이려고 한 말이었어요?”

“아니, 그럴 리가 있나. 물론 헷갈리게 하려던 건 맞지만.”

돌아본 데비드가 달을 등지고서 말했다.

“내가 사랑하는 첫 번째 존재는 내 아이들이야. 너지.”

“…….”

“두 번째로 사랑하는 것이 내가 창조한 것들이고. 세 번째가 바로 나인 거다.”

나는 그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조심스러운 눈길로 그를 올려다봤다.

“……궁금한 게 있어요.”

데비드는 말해 보라는 듯 나를 다정한 눈길로 바라봤다.

나는 내 검지에 자리한 붉은색의 반지를 살짝 문지르다 말했다.

“전 전생에 신전에 반기를 든 인간이었는데…… 왜 저를 신격체로 만드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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