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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75화 (165/191)

175화

그들이 아천타에게 지배당하고,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그릇된 감정이 몸집을 부풀렸다는 걸 안다.

이 세상에, 제일가는 악한 사람이 간혹 한 명씩 있으면 몰라도 여럿이서 한 공간에 다닥다닥 붙어 있기는 아무래도 힘든 것 아닌가?

그런데 이딜로스의 과거 속에서 본 황궁은 아주 악마들의 소굴 같은 느낌이었지.

그들은 아천타에 의해 정신이 억압되고, 원치 않은 악행을 저지르게 된 것으로 보였다.

‘만약 정말로 처음부터 악했던 거라면, 할 말이 없어지긴 하지만.’

그들이 내 예상대로 억지로 악행을 벌이고 있는 것이라면. 아천타의 지배가 약해졌을 때, 내 편지를 통해 마음이 흔들릴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통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우선 부딪쳐 보자는 심정으로 나는 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아천타의 눈에 띄지 않게, 일부러 데비드가 전달해 줄 것을 고집하며.

그리고 다시 돌아온 데비드는 일이 잘 풀렸다고 했다. 황제와 황후가 내 편지에 긍정을 표했다.

‘아마 일이 잘 풀렸다고 한 건 황제와 황후의 뒤통수도 때리는 데 성공했다는 거겠지? 세뇌가 풀렸을지 모르겠네.’

난 편지에 그들이 도와줬으면 하는 것들을 적어 두었다.

그중 하나가, 황권으로 수도의 사람 대다수를 다른 지역으로 잠시간 보내 두는 것이었다.

엘리네와 같은 몇몇 주요 인물들은 데비드를 통해 아천타의 지금 힘으론 결코 닿을 수 없는, 나라의 변경으로 보내었고.

그리고 다음으로 황실에 부탁한 것은, 마멜라가 다니는 크로델 왕립 학교의 장기 휴교를 요청하고 학생들을 피신시키는 것.

아천타가 인질로 마멜라를 언급한 만큼이나 그녀가 다니는 학교에도 다른 피해자가 많을 것 같았다.

다행히 크로델 왕립 학교를 주관하는 황후는 학생들의 안전을 위해 흔쾌히 허락했다.

데비드에게 전해 듣기로는 곧 있을 겨울 방학을 이르게 시작하는 것으로 대처하겠다 했더랬다.

그리하여 수도 쪽의 사람들은 황실의 힘으로 피신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럼 이제 남은 것은 대신전.

‘데비드가 몰래 데리고 와 멀리 피신시켰지.’

다행히 아천타가 넣어 둔 그 죽었다 살아난 무리 덕분에 멀쩡한 사람 몇 명이 빠진다고 해도 겉보기엔 티가 나지 않았다. 제 꾀에 걸린 꼴이었다.

‘이 모든 건 데비드의 덕이 커.’

아니, 데비드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계획이다.

사람들을 피신시키는 데 그의 힘이 없더라면 절대 단시간에 이뤄 낼 수 없는 성과니까.

‘다음에 만나면 감사 인사를 다시 해야겠어.’

자, 그럼.

“어떡하려고? 아천타.”

나는 그새 검의 형상으로 변한 반지를 손에 쥐고 아천타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그리고 거리를 둔 채 그에게 검을 겨누었다.

검으로부터 피어나는 연기가 평소의 기세보다 사나웠다. 쥐고 있는 검 자루가 전율하듯 잘게 진동하고 있었다.

아펠리아가 바라고 있다.

아천타를 해치는 것을 허락하고, 그에 모자라 열망하기까지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천타는 여전히 피를 가득 쏟아 내고 있는 손목을 쥐고, 눈썹을 사납게 구겼다. 나는 냉담하게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너만 날 공격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나도 널 공격할 수 있어.”

“이 망할…….”

아천타가 욕을 짓씹었다. 그가 한 손을 아래로 내뻗었다. 그게 검을 꺼내는 신호라는 걸 눈치채고, 나는 쥐고 있던 검을 가로로 크게 그었다.

촤악.

피가 튀었다. 아천타의 목에 긴 상처가 남았다.

아천타는 검을 들려는 것을 멈추고 반사적으로 상처 입은 목을 붙잡고 물러났다. 그가 신경질적이게 인상을 구겼다.

‘이제 난 네 패배를 확신할 수 있어.’

그 증거로 아천타가 되살렸던 뒤편의 시체들이 하나둘 바람 빠진 풍선처럼 쓰러지고 있었다.

이대로면, 이길 수 있다.

아천타는 지금 힘을 많이 소모한 상태지 않나.

아무리 내가 그처럼 노련한 힘은 없다고 해도.

그처럼 절대 악에 무도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해도……!

승리를 직감했다.

하지만 그 순간, 뭔가가 내 어깨를 꿰뚫었다. 엄청난 힘에 중심을 잃고 몸이 기우뚱했다.

이딜로스의 다급한 부름이 들렸다.

“아릴!”

겨우 중심을 잡고 선 나는 그가 달려들까 봐 접근하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차분한 눈으로 뒤를 돌아 고개를 저은 난, 다시금 아천타를 노려봤다.

내게 검을 던진 뒤편의 시체가 힘이 다해 풀썩 쓰러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숨을 고르며 눈가를 찡그렸다. 아천타의 검에 찔리는 기분은 이번이 두 번째인데…… 여전히 상상도 할 수 없게 아팠다.

시야를 아천타에게로 좁혔던 게 잘못인가. 당연히 지푸라기 같은 뒤편의 시체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

아릿한 고통에 집중이 흐트러졌다.

그사이, 아천타는 혀를 차며 단숨에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그는 점프 한 번에 저만치나 멀어졌다.

아천타가 나를 맹렬히 노려봤다.

그리고 그는, 여느 소설 속 악당처럼 ‘이번만은 물러나 주겠다’ 등의 흔한 말도 하지 않은 채 달아났다.

나는 혹여 저 시신 무리들이 아천타 대신 달려들까 봐 검을 고쳐 잡았다. 하지만 아천타가 사라지자마자 그들은 일제히 힘을 잃고 쓰러졌다.

‘다치기까지 했으니 시체들에게 힘쓸 기력은 없었나 보지?’

아천타가 원래 서 있던 자리엔 피가 한가득 고여 있었다.

“아릴!”

다급한 부름에 뒤를 돌아봤다. 내게로 달려오는 이딜로스가 보였다.

나는 진이 빠져 비틀거렸다. 이딜로스가 그런 나를 붙잡았다.

그는 내 어깨에 여전히 박혀 있는 단검과 피로 젖어 들고 있는 옷을 보더니 세상이 무너진 얼굴을 했다.

“아릴, 어서 치료하자. 우선, 이걸 먼저 제거해야 하는데…….”

나는 횡설수설하는 그를 보며 웃었다.

“이딜로스, 나 괜찮아. 진정해.”

“안 괜찮아.”

“으응?”

“하나도, 안 괜찮다고…….”

그는 박혀 있는 검을 피해 어정쩡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조금 욱신거렸지만, 나는 이딜로스의 팔을 살짝 안아 줬다.

그의 말대로 난 괜찮지 않았다.

내가 다친 곳은 왼쪽 어깨. 아니, 왼 가슴이라고 해야 할지 어중간한 위치였다. 겨우 심장을 비껴갔다.

거기다 아천타의 검은 유일하게 내게 상처를 입힐 수 있는 만큼, 회복도 어려웠다.

성수에 아천타의 힘이 희석된 검에 찔렸을 때도 회복이 꽤 걸리지 않았던가. 신성력이 온몸을 배회하는 신격체치고는.

“갑자기 이걸 뽑았다간 피가 많이 날 거야. 아릴, 일단 깨끗한 곳으로 가자.”

“응.”

“……걸을 수 있겠어?”

“난 다리를 다친 게 아닌데?”

“부축할게.”

“괜찮다니까…….”

이딜로스는 내 상처에 자극이 가지 않도록 내 반대쪽 팔을 조심히 지탱하고서 깨끗한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를 근처 의자에 앉히고서 말했다.

“아릴, 잠시만 기다려.”

그리고 밖을 나가더니 3분 만에 응급 처치를 위한 물품들을 들고 돌아왔다.

가까이 온 이딜로스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게 보였다. 뛰어갔다 왔나 봐…….

하긴, 그가 초조한 마음이 들 만도 했다. 하필 지금은 모두를 피신시키느라 치유에 능한 사제들도 자리를 비웠기 때문이다.

“이딜로스, 잠시만.”

나는 본격적인 치료에 들어서기 전에 이딜로스를 잠시 떨어트렸다.

그리고, 어깨에 꽂혀 있던 단검을 단숨에 푹 뽑아냈다.

이딜로스의 눈이 커졌다. 어깨를 덮은 옷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일순 너무 아파서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리곤 굳어 있는 그에게 말했다.

“이딜로스, 어서.”

이딜로스는 할 말이 많은 눈초리였지만, 군말하지 않고 붕대를 가져왔다.

그리고 그는 내 상의를 한 겹 한 겹 벗겨 내기 시작했다.

날씨가 쌀쌀해져서인지 피부에 닿는 공기가 유독 차가웠다. 무심코 어깨를 움츠렸다가 상처 때문에 아파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딜로스가 내 반대편 어깨에 손을 얹었다.

“힘 풀어.”

그는 나를 진정시키고자 그런 것 같았지만, 힘을 풀기는 무슨. 따뜻한 온기가 맨살에 닿자 더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모두 벗겨 낸 이딜로스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챙겨 온 물수건으로 제 손을 먼저 깨끗이 한 뒤, 다른 물수건으로 내 어깨의 피를 닦아 냈다.

상처를 깨끗하게 만든 그는 부드러운 천에 소독약을 적셔, 자상 위에 가져다 댔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파……!”

“조금만 참아.”

이딜로스가 단호하게 말했다. 내심 그가 달래 주기를 바랐던 나는 뾰로통하게 이딜로스를 올려다봤다.

이딜로스는 내 상처에 온 집중을 쏟고 있었다.

진지한 눈빛이나 굳게 다물린 입술을 멀거니 보던 나는 그가 상처에 약을 도포하고 있을 때 은근슬쩍 말했다.

“입 맞춰 주면…… 안 아플 것 같은데.”

움직임을 멈춘 이딜로스의 시선이 내 얼굴로 넘어왔다.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자 이딜로스는 또 단호하게 말했다.

“곧 끝나. 기다려.”

그리고, 다시 상처 치료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기가 찼다. 마지막 말이 꼭 내가 고양이일 때 간식을 받아먹기 전, 마멜라나 이딜로스가 하던 말투 같았다.

이딜로스는 붕대까지 꼼꼼하게 감아 준 뒤, 내 옷을 여몄다.

나는 이딜로스의 손을 붙잡으며 투정 부렸다.

“이 옷 싫어. 더러워졌잖아.”

“지금 여기에 여분의 옷은 없어. 많이 불편하면 가서 네 옷을 들고 올까?”

“아니…….”

“그럼 이거 입어야지. 벗고 갈 수는 없잖아.”

아까부터 내가 삐친 기색을 보이고 있던 걸 알아챈 건지, 이번엔 그가 달래는 투로 말했다.

나는 시무룩하게 이딜로스를 올려다봤다. 그가 걸치고 있던 흰 겉옷을 붙잡았다.

“여기, 옷 더 있는데.”

그러곤 겉옷이 아닌, 그가 안에 입고 있던 옷을 벗겨 내려 했다.

내가 앙큼한 눈빛을 보내자 이딜로스가 내 손을 다급히 붙잡았다.

이딜로스는 잠시 많은 생각을 거치는 것 같더니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지금?”

많은 의미가 내포된 당혹스러운 물음이었다. 나는 입을 삐죽 내밀었다.

“아까 입 안 맞춰 줬잖아. 마음이 더 커졌어.”

“……너 지금 환자야.”

“난 아픈 거 좋아해.”

“너 진짜…….”

이딜로스가 말문이 막힌 듯한 얼굴을 했다. 그의 반응이 재밌어 장난스레 웃던 나는 간드러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원래 짐승인 거 몰라?”

그러곤 이딜로스의 옷을 잡아당기는 찰나였다. 바로 옆에서 아주 언짢은 기색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다 상처 벌어진다. 이 녀석들아.”

그대로 굳은 나는 옆을 바라봤다.

대체 또 언제 온 건지 모를 데비드가 심기 불편하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이딜로스가 질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기척 좀 내고 다니면 안 되는 겁니까?”

“내 집인데?”

“여기가 왜…….”

이딜로스가 말을 멈췄다. 나는 그들의 알 수 없는 대화를 듣다가 데비드를 바라봤다.

시선이 마주치자 데비드가 다정한 눈길로 미소를 지었다.

이딜로스를 유혹해 보려는 계획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이렇게 된 거, 나는 옷을 완전히 갖춰 입었다.

그리고 의자에서 일어나며 데비드를 바라봤다. 그에겐 꼭 해야 할 말이 있지 않던가.

“데비드, 이번에 고생 많았어. 갑자기 불러 힘든 일을 시켰는데도 잘 해내 주고.”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정중히 감사를 표했다.

“아무도 다치지 않은 건, 모두 네 덕분이야. 고마워. 이번에도, 지난번에도 늘 내게 도움을 줘서.”

나는 진심을 담아 살며시 웃었다. 데비드는 내 진중한 감사 인사를 조금 넋 나간 얼굴로 보더니, 이내 픽 미소 지었다.

“사상자가 나오지 않은 건 내 덕이 아니라, 네가 힘썼기 때문이지 않으냐.”

“뭐…… 그런 점도 있긴 하지?”

“아천타는 꽤 큰 부상을 입었고 힘도 많이 소진했으니 한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을 거다.”

데비드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내 다친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는 어리둥절하게 그를 바라봤다.

“거기 누르면 아파.”

“그래, 안 아프게 만들어 주마.”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갸웃하는 순간이었다. 눈부시고 따스한 빛이 내 어깨를 감쌌다.

보드라운 깃털이 어깨를 간질거리는 것 같은 묘한 감각을 느낀 나는 본능적으로 알아챘다. 상처가 낫고 있다.

그립고도 다정한 온기가 순식간에 내 통증을 모조리 거두어 갔다.

나는 그 광경을 휘둥그레 바라봤다. 아천타가 입힌 상처는 나조차 쉽게 치료할 수 없는데…….

서서히 시선을 들어 데비드를 바라봤다. 그가 나를 아주 기특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장한 내 딸아. 네겐 할 말이 아주 많구나. 잠시 내게 시간을 주지 않으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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