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74화 (164/191)

174화

이딜로스는 설명이 필요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차근차근 내가 생각했던 것을 이딜로스에게 설명했다.

“그렇군. 일리가 있어.”

“아마 지금 황궁에 미치고 있는 아천타의 힘은 적을 거야. 어쩌면 완전히 끊어졌을 수도 있고.”

모든 것은 아천타가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나는 그에 대한 내 생각을 더 늘어놓았다.

“지금 아천타가 벌인 판이 여기서 더 커지게 되었을 때, 아천타가 감당할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해.”

“판을 더 커지게 하겠다고?”

“응. 아천타의 힘이 부족해서 케어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그래서 말인데, 이딜로스. 부탁이 있어.”

그가 말해 보라는 듯, 나를 가만히 바라봤다. 나는 곰곰이 생각한 끝에 말했다.

“안셀과…… 데비드. 이 두 사람 좀 불러 줄 수 있어?”

이딜로스는 아천타에게 있어 예의 주시할 대상 중 하나이니 그에게 맡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니 대신 맡길 수 있는 사람으로 가장 적합한 인물. 내가 떠올린 사람은 안셀과 데비드였다.

* * *

“……그러니까. 이 부근을 조사해 달라? 우리 따님께서 부탁하는 게 그거지?”

“응.”

제집 안방인 마냥 소파에 양팔을 걸치고 넓게 차지한 데비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딜로스 녀석이 날 급히 부르기에 무슨 일인가 했더니……. 이런 것일 줄은 몰랐다만.”

데비드가 이딜로스 쪽을 곁눈질했다.

이딜로스는 난데없이 데비드더러 찾아와 달라고 전서구를 보내었다.

그에 모자라서 저 무신론자 녀석이 자신을 간절히 찾는 기도 소리가 들려오기까지.

데비드는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급히 달려왔다. 이딜로스가 부탁한 대로 안셀을 데려오기 위해 카델라로트로 워프까지 해 가면서.

그리하여 데비드가 도착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몇 시간.

도착해 보니 아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데비드가 빠른 이동이 가능할 것 같아서 부른 건데. 내 생각보다 더 빨리 왔네. 이딜로스, 어떻게 그렇게 빠르게 연락을 보낸 거야?”

“그냥, 다행히 선생님과 주고받는 연락처가 있었어.”

“다행이다. 고마워, 이딜로스.”

아릴의 감사 인사를 받고 수줍게 웃는 제자를 보며 데비드는 뒷골이 당겼다.

저놈이 언급한 빠른 연락처라는 게, 기도를 통해 불러내는 것이라니. 기가 차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갑자기 기도 소리가 들리기에 신을 믿게 되었구나 싶었더니…….’

데비드는 한숨을 내쉬었다. 애초에 그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는데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차분히 차를 마시는 걸 보면 제 용건은 조금도 없다는 것 같았다.

데비드는 한숨을 푹 내쉬고서 아릴을 바라봤다.

“자,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면 모레까지 우리 딸이 저 정나미 없는 녀석의 목숨과 수많은 인질 중에 선택을 해야 한단 거군. 그런데 아천타가 벌인 이 일의 규모를 알아야만 방안이 생기니 조사를 해 달란 거지.”

“응, 맞아. 내 예상은 아천타가 수도와 대신전 주변 위주로 인질을 잡아 두고 있을 것 같아. 아무래도 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힘을 사용하는 것이 덜 번거롭고 소모가 적을 테니까.”

“그럼 만약 네가 예상한 이 두 곳에 인질이 편중되어 있지 않고 골고루 퍼져 있다면, 아천타의 힘이 넉넉하게 사용되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려는 거군. 우리 딸이 내게 부탁하는 목적은, 네 예상이 맞음을 확실시하기 위함이겠고?”

아릴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데비드가 자신의 계획을 잘 이해해준 것이 기쁜 듯 얼굴색이 밝아졌다.

“어…… 그럼 아릴 님. 저는 무엇을 하면 됩니까?”

데비드의 손에 목덜미가 붙잡혀 이곳으로 함께 오게 된 안셀이 조심히 물었다.

안셀은 아릴과 이딜로스가 사이를 회복했다는 것을 신문과 편지로만 접했을 뿐, 이렇게 직접 마주하기는 처음이었다. 그 탓에 그는 조금 어색해 보였다.

아릴은 안셀을 진지하게 바라봤다.

그녀가 데비드를 부른 것은 그가 자유자재로 이동이 가능하단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지금도 아천타의 눈을 피해 데비드를 만날 수 있었던 거다.

그리고, 아릴이 안셀을 부른 것은…….

“넌 수도의 상황을 둘러봐 줘.”

그의 유능한 실력을 알고 있고, 마멜라나 이딜로스 못지않게 안셀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황궁을 방문해서 황제와 황후의 상태도 살펴 줬으면 해.”

“알겠습니다, 아릴 님. 전하의 목숨이 걸린 일이라면, 저 안셀은 그 어떤 일도 서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안셀은 우렁차게 대답했다.

그는 아릴과 이딜로스에게 앞서 황궁이 실은 아천타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것이었단 사실을 들었다.

아릴은 두 사람의 동의를 얻어 내고서 말했다.

“빠르게 움직여 줘야 해. 아천타가 준 시간 내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니까.”

“그럼 이렇게 더 이야기하고 있는 것도 시간 낭비겠군. 고작해야 하루하고 반나절밖에 남지 않았으니 말이다.”

“둘 다 잘 부탁할게.”

데비드는 다시 안셀을 데리고 아릴과 이딜로스의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릴은 그의 특출난 재능을 눈여겨보다가 문득 드는 의아함에 물었다.

“데비드가 과거의 아슐란보다 워프를 더 빠르게 하는 것 같아. 평범한 인간이면서, 대단하지 않아?”

아릴이 이딜로스에게 물었다. 이딜로스는 대답 대신 시선만 슬쩍 피했다.

데비드는 그곳을 떠난 지 단 세 시간 만에 안셀을 데리고 복귀했다.

안셀은 잠깐 새에 폭삭 늙어 있었다.

데비드는 멀미라도 하는 듯 속 안 좋아하는 안셀의 등을 두들기며 말했다.

“우리 딸의 말이 맞더구나. 대신전을 주변으로 아천타의 힘이 편향되어 있어. 그 주변 지역으로도 이동해 보았지만 그들 중엔 인질에 속한 이가 하나둘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수가 적었지.”

데비드의 탐색 결과를 들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안셀을 바라봤다.

“수도 역시 결과가 같았습니다. 아릴 님이 알려 주신 방법으로 보니 그들의 목에 실이 있는 게 보이더군요.”

“황궁은?”

“아, 황궁은……. 지금 외부인을 출입 금지하고 있어 방문하지 못했습니다. 듣기로는 모든 물자마저 들이지 않고, 황제 부부 두 분 모두 외출조차 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아릴은 그들의 말을 총합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그녀의 예상대로, 아천타는 지금 최소한의 힘으로 최대 효율을 뽑고자 하는 것 같았다. 힘이 부족하니 아끼기 위해서.

거기다 안셀이 들려준 황궁의 상황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늘 당당하던 황궁이 문을 걸어 잠근 상황이라니. 그건 꼭, 무언가가 찾아오는 게 두려워 막으려는 것 같지 않나?

실은 정확하게 짚기엔 단서가 조금 부족했다. 하지만 아릴은 개의치 않고 종이를 꺼내어 편지를 작성했다.

‘어차피 이게 안 되면 그 무엇도 되지 않아. 그러니 부딪쳐 봐야 해.’

아릴은 깔끔하게 접은 그 편지를 데비드에게 전달했다.

“황궁에 들어가서 황제에게 이걸 전해 줘. 그리고…… 만약 황제와 황후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다면.”

아릴은 데비드에게 씩 웃어 보였다.

“뒤통수를 아주 세게 때리고 와. 아천타의 세뇌가 불안정할 때엔 충격 요법이 세뇌를 깨는 데 도움이 되더라고. 경험담이야.”

“……황제 폐하를 때리고 오라는 말이냐?”

“뒷일은 걱정하지 마. 황제보다 높은 직위를 가진 게 나니까.”

데비드는 너털웃음을 흘리더니 흔쾌히 수락했다. 그는 아릴이 건넨 편지를 들고 황궁으로 워프했다.

* * *

선택의 날이 찾아왔다.

나는 다시금 신전으로 찾아온 아천타를 마주했다. 그의 뒤에는 지난번과 같이 죽었던 사제들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이 기적처럼 다시 살아 돌아온 소식은 곳곳으로 일파만파 퍼졌다.

그들의 가족이 신전을 찾아왔고, 그 기적을 성스럽게 여기는 이들 역시 어떻게 된 일인지 진위를 파악하고자 신전을 방문했다.

하필, 그사이 아천타가 힘을 더 쓴 모양인지 몇몇 살아난 사제들이 인형처럼 입을 모아 말했다.

<저를 구해 주신 건 아천타 님이십니다. 누구보다 존귀하셨던 고대의 신격체 님이시지요.>

그 바람에 단 며칠 만에 아천타를 추앙하는 이들이 생겨났다. 그가 내린 기적을 자신들도 바라며 신전을 찾아오는 이들이 늘었다.

<아천타 님이야말로 기적이신 거야.>

그리고 나는 순식간에 퇴물이 되어 버렸고.

나는 아천타의 뜻대로 민심을 빼앗긴 것을 떠올리며 시선을 들었다.

낯이 구겨진 아천타가 보였다.

아천타는 내 옆에 멀쩡히 있는 이딜로스를 보고 있었다.

“수천 명의 목숨 대신, 고작 저 반란군의 목숨 하나를 구하겠다고? 이기적이기도 하군.”

“누가 누굴 이야기하는 건지 모르겠네. 이기적인 건 너지, 아천타.”

나는 으르렁거리듯이 일갈했다. 아천타는 내 위협이 같잖은 듯 비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네게 후회할 일이 하나 생기겠군. 네 손에 죽지 않아도 카얀 노아르크는 내 손에 죽게 될 텐데.”

나는 아천타를 노려봤다. 반지가 분노하듯 짜르르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등 뒤로 반지를 낀 손을 숨기고 엄지와 중지를 움직여 반지를 손가락에서 조금씩 빼냈다.

“네 뜻이 그렇다면 선택받지 못한 인질들은 죽어야 마땅하겠지.”

잔인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아천타는 한쪽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지난번, 내게 보였던 것과 같이 그의 손에 무수하게 감긴 여러 실들이 생겨났다.

나는 긴장한 채 그를 지켜봤다.

아천타는 자비 없이 펼치고 있던 손을 확 오므렸다. 그러자 실들이 일제히 당겨져 왔다.

“……?”

그러나 아천타는 손을 완전히 주먹 쥐지 못했다. 팽팽하게 당긴 실의 힘에 못 이겨 어정쩡하게 멈춘 그의 손이 보였다.

그를 확인하자마자, 나는 안도의 숨을 터트렸다.

성공했다.

나는 긴장을 풀지 않고 곧바로 다음 단계에 나섰다. 미리 자그만 반달칼 모양으로 바꾼 반지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아천타에게 날렸다.

힘이 과했던 건지 순식간에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반달칼이 아천타의 손을 스쳤다.

툭. 그의 손에 연결되어 있던 모든 실이 줄지어 끊어지고, 피가 후드득 떨어졌다.

손을 거두자 반달칼이 다시금 내 쪽으로 날아와 반지가 되어 손가락에 감겼다.

“……이게, 무슨.”

그가 살짝 움직이는 순간, 아천타의 손목에서 피가 왈칵 솟구쳐 쏟아졌다.

아천타는 당혹스러워 굳은 모습을 보였다.

얼마나 자만했던 것인지, 이러한 일이 일어날 것이라곤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 같았다.

잠시간 가만히 있던 그는 곧 두 눈을 부릅뜨고 나를 쳐다봤다. 눈빛에 형형한 살기를 담은 그가 이를 빠드득 갈며 소리쳤다.

“아펠리아, 무슨 짓을 벌인 거지?”

“실을 끊었잖아. 조준을 조금 과하게 해서 심하게 다친 것 같기는 한데, 미안해.”

나는 승리자의 웃음을 만면에 틔우며 빈정대듯이 사과했다.

그런 나를 보던 아천타의 굳은 입매에 기가 찬 웃음이 피어났다.

일부러 비웃음을 걸치고 있던 거였던 난, 곧 웃음기를 흔적도 없이 지웠다. 나는 아천타의 두 눈을 똑똑히 직시하며 말했다.

“황궁이 무조건적으로 네 손에 있을 것이란 생각은 말았어야지.”

나는 데비드를 통해 황제에게 전했던 편지를 떠올렸다.

그건 내가 아천타의 이 무도한 협박을 무너뜨리기 위한 가장 큰 카드였다.

당신들이 아천타에게 지배당하고 있음을 안다는 말로 시작하는, 혁명을 위한 도움을 요청한 편지였으니 말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