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저들을 어떻게……!”
“제가 못 하는 게 있겠습니까?”
아천타가 손을 까딱이자 그를 따라온 무리가 일사불란하게 각자 자신이 있었던 위치로 퍼져 나갔다.
나는 당황해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당장 돌려보내. 죽은 이들을 신전에 들이다니, 제정신이야?”
아천타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나를 향해 멍청하다는 눈길을 보내었다.
“……설마 내가 신의 눈치를 볼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겠지? 아펠리아.”
검지에 낀 반지가 짧게 움츠러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주먹을 말아 쥐며 아천타를 노려봤다.
그리고 이딜로스의 한쪽 손을 쥐며, 그를 보호하기 위한 자세를 취했다.
그 모습을 본 아천타의 눈이 일순 사나워졌다.
“지긋지긋하군.”
“아천타, 무슨 목적으로 신전에 온 거지?”
“그런 뻔한 걸 묻다니. 네가 날 망친 만큼, 나 역시 널 망치기 위함이지.”
아천타는 나와 이딜로스의 앞까지 뒷짐을 지고 걸어오며 말했다.
“내일이면 수인을 향한 민심이 완전히 뒤바뀌겠군. 어리석은 인간들은 당장에 마음이 동하는 쪽으로 결정을 내리기 십상이지.”
“…….”
“지금 이 상황에서 인간들은 너를 반길까, 아니면 죽은 줄 알았던 이들을 다시 데리고 온 나를 더 반길까?”
나는 그의 말에 자신 있게 반박할 수 없어 입을 달싹였다.
원래부터 내겐 반감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오랫동안 부재였다가 나타난 수인이기에 너무 막중하던 그들의 기대를 못 미친 탓도 있었고, 내가 한번 신전을 갈아엎었던 탓도 있었다.
게다가, 아천타가 최근에 저지른 살육마저 모두 내가 저지른 것처럼 되었으니…….
아천타의 말대로 사람들은, 너무 쉽게 다른 것을 믿기에 내게서 등을 돌릴지도 모른다.
나는 분한 마음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천타는 여유로운 낯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그때, 이딜로스가 내게 닿으려던 아천타의 손목을 꽉 움켜쥐었다.
“지금 어딜 함부로 손대려는 거지?”
손이 가로막힌 아천타가 이딜로스를 보곤 얄팍한 웃음을 흘렸다.
이딜로스는 아천타를 흉흉하게 노려보며 이를 갈듯 말했다.
“아까부터 아주 잘났다는 듯이 말하던데. 이미 한번 벌을 받고 지위도 박탈당한 네가 아릴보다 뭐가 잘났다는 거지?”
“……겁도 없이 내뱉는군.”
“아릴은 수없이 많은 이들을 도우며 지금도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있지만 넌 모두에게 버림받은 처지지. 아릴이 노력하며 쌓은 민심을 멋대로 모욕하려 하지 마.”
이딜로스의 싸늘한 경고에 아천타의 두 눈에 섬뜩한 웃음기가 번졌다.
“예나 지금이나 날 가르치려 들려는 건 똑같군. 난 네 놈을 볼 때마다 찢어 죽이고 싶어.”
아천타의 살기 어린 발언에 나는 이딜로스의 손을 잡으며 경계했다.
그런데, 보호하려는 내 뜻과 다르게 이딜로스가 아천타에게 비아냥댔다.
“죽여 보시지?”
“이딜로스……!”
“네 복수가 물거품이 되어도 괜찮다면 말이야. 모아 둔 힘도 모두 잃었다고 들었는데.”
나는 당황해 그를 바라봤다. 이딜로스는 폭풍 전야 같은 고요한 분노가 담긴 눈으로 아천타를 보고 있었다.
명백한 빈정거림이었지만 그의 얼굴엔 비웃음이 조금도 없었다.
아천타는 말없이 이딜로스를 빤히 응시했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몰라 조마조마하게 아천타의 동태를 살폈다.
-걱정하지 마, 아릴.
아펠리아가 내게 속삭였다.
-아천타 님은 멍청하지 않으니 네 짝을 죽이지 않을 거야.
아펠리아의 말대로, 얼마 안 가 아천타는 별다른 행동 없이 등을 보였다.
그리고 충분히 거리가 멀어졌을 때, 아천타가 돌아보며 말했다.
“내일이면 신전의 주인이 바뀔 거다. 그리고 이틀 뒤는 아펠리아의 선택으로 네가 죽을 날이기도 하겠지. 하루라도 더 살려 두는 걸 감사히 여겨라.”
그 말을 끝으로 아천타의 모습이 신기루처럼 흩어졌다.
-신전에서 기척이 완전히 사라졌어.
아펠리아의 말을 듣고 긴장이 풀리자마자, 나는 붉어진 눈시울로 이딜로스를 노려봤다.
“왜 그랬어. 왜 그런 말을 했어! 나, 난 정말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 줄 알았단 말이야…….”
“아천타가 너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게 마음에 안 들었어.”
“그래도…… 그래도.”
난 이딜로스의 팔을 때렸다.
그 순간 내 심장이 얼마나 철렁했는데. 아천타라면 그 어떤 짓도 서슴없이 벌일 수 있을 것 같은 존재 아닌가.
아천타가 눈이 돌아 이딜로스를 공격하면 어떡하나. 속으로 수십 번을 넘게 생각하고, 불안에 떨었다.
이딜로스는 내가 주먹으로 콩콩 때릴 때마다 진정성 없이 ‘아야’ 소리를 냈다.
그에 내가 울분 섞인 눈길을 보내자 그제야 나를 끌어안으며 말했다.
“알았어. 앞으로 안 그럴게.”
“……정말?”
“응. 약속하고 입술 도장이라도 찍을까?”
“……응.”
기다렸다는 듯 입술을 내밀자 아펠리아가 말했다.
-어머.
나는 그 추임새를 애써 무시했다. 이딜로스와 애정 표현을 할 때마다 아펠리아가 끼어들었던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방해하는 건 아니었지만, 마치 마멜라와 내가 로맨스 소설에서 스킨십이 나올 때 보이는 반응처럼 굴었지.
‘관람객 같은 느낌…….’
몇 차례 뽀뽀한 후에 이딜로스가 말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나도 그의 말을 듣곤 조금 전, 아천타가 데려온 인간…… 같은 것들이 신전 곳곳으로 퍼져 나갔던 것을 떠올렸다.
“죽은 사람들이 대체 어떻게 되살아난 거지?”
-아릴, 잠시만.
아펠리아가 갑작스레 이딜로스의 손 위로 모습을 바꿔 이동했다.
얼떨결에 붉은 꽃 한 송이를 들게 된 이딜로스의 표정이 볼만해졌다.
아펠리아가 끼어들어 말했다.
-아천타 님은 지위를 박탈당한 뒤 수백 년을 떠돌면서 여러 힘을 모았다고 해. 그중 하나가 에펜도르의 지대의 힘을 빼앗은 거고.
“에펜도르? 그 매년 불가사의한 재난이 일어나는 그곳?”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에펜도르는 너무 위험한 지역이라 나도 가 보지 못한 곳이다. 재난이 일어날 때마다 구호 물품을 여럿 보내기만 했을 뿐.
그런데 아천타가 그 땅의 힘을 빨아먹은 거였다니.
그럼 설마 그 재해가 아천타로 인한 것일 수도 있는 건가?
-응. 에펜도르에서 빼앗은 힘의 비중이 가장 크고, 사람들을 종용해 아천타의 검으로 수인들을 죽였던 것도 힘을 빼앗는 수단이었다고 해.
나는 아천타와 접촉했을 때 힘이 빨려 나갔던 것을 떠올렸다. 뭐든 힘을 빼앗을 수 있는 건가?
-그 밖에도 온갖 일들을 서슴지 않으며 힘을 모았으니 그러는 중에 죽은 자를 되살리는 금기시된 방법도 알게 됐겠지.
“그런 식으로 힘을 모았던 거였다니…….”
-……꼭 악마 같지. 참 이상해. 예전엔 이런 분이 아니셨는데. 정말 멋있고 자상한 분이셨는데…….
아펠리아는 쓸쓸하게 말을 마쳤다. 그녀의 목소리에선 자책감도 조금 묻어나는 것 같았다.
아천타에게 세뇌당해 그러한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있던 나는 당사자인 아펠리아의 그 심정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아천타의 그 변화는, 아펠리아가 가장 큰 기점일 테니까.
“……그런데, 이딜로스. 아까 아천타가 모아 둔 힘을 잃어버렸다고 했잖아. 그게 무슨 말이야? 그리고 네가 그걸 어떻게 알고 있어?”
“아, 그건…… 선생님께서 알려 주셨어.”
“데비드가?”
“응.”
나는 의심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간이야 뭐, 원래부터 워낙 이상한 재주가 많았고, 아천타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으니 그러려니 했다.
나는 이딜로스와 함께 가장 먼저 보이는 기도실로 들어갔다. 분명 이곳에도 사제 몇 명이 들어가는 걸 봤었다.
역시 아니나 다를까…… 오밤중이라 아무도 없는 기도실을 사제 세 명이 빗자루로 쓸고 있었다.
난 이딜로스와 시선을 교환한 뒤, 그들에게로 조심히 다가갔다.
나는 용기 있게 그들을 불렀다.
“이봐.”
그러나 그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고 제 할 일만 계속했다.
우리는 이상함을 느끼고 그들을 몇 차례 더 불렀지만, 그들의 반응은 똑같았다.
그리고 그곳 이외의 다른 곳의 죽었다 살아난 사제들 역시 같았다.
“아천타라고 해서 죽었다 살아난 이들을 완벽하게 살아 있는 사람처럼 바꿀 순 없었나 봐.”
“애초에 아천타는 힘을 많이 잃었을 테니 이 정도만으로도 힘에 부치고 있을지도 모르지.”
이딜로스와 나는 살아 있는 다른 사제들에게 지금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를 알렸다. 그리고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내게 전해 달라고 했다.
우리는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이딜로스의 손에는 여전히 아펠리아가 변한 붉은색 꽃 한 송이가 들려 있었다.
나는 곧 새벽이 되어 가는 시간임을 확인하곤 침대 위에서 진지하게 이딜로스를 마주 봤다.
“이딜로스. 아천타가 말했던 대로 난 모레까지 결정을 내려야 해. 널…… 죽일 것인지. 아니면 수천 명의 목숨을 놓을 것인지.”
“……그런 선택지라면, 내가…….”
“어제 시도했다가 실패했잖아. 난 널 못 죽여.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이딜로스는 해칠 수 없어.”
이딜로스는 내 손을 꽉 쥐었다. 나는 복잡한 기분으로 인질로 잡힌 수천 명의 사람들의 상황을 설명했다.
아천타가 그들의 목에 가느다랗고 날카로운 실을 걸어 두었다고. 여차하면 죽일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인질 중엔, 마멜라도 있다는 걸…….
마멜라의 이름을 들은 이딜로스의 낯이 급속도로 어두워졌다.
나는 이딜로스가 역시 자신이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걸 눈치채곤 서둘러 말했다.
“이딜로스, 난 누구도 죽게 두지 않을 거야. 지금부터는, 그 누구도…… 쉽게 죽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지킬 거야. 그러니 방법은 찾으면 돼. 아천타의 약점도 알게 되었으니까…….”
-아릴.
아펠리아가 불렀다. 나는 이딜로스의 손에 있는 꽃 한 송이를 바라봤다.
-네 짝의 말대로 아천타는 지금 힘을 많이 잃은 상태야. 그런데 생각해 봐. 아천타가 지금 어느 곳들에 힘을 쓰고 있는지.
아펠리아의 예리하고 차분한 말투에, 나는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곤 곰곰이 아천타에 대해 생각했다.
우선 첫 번째. 아천타는 지금 죽은 이들을 살려 데리고 왔다. 그것도 백 명은 거뜬히 넘는 이들을.
신전을 장악하려는 속셈인지, 내게서 민심을 완전히 빼돌리기 위한 행동인 것 같았다.
그리고 두 번째로, 아천타는 나를 협박하기 위해 수천 명의 인질의 목숨을 쥐고 있다.
다음으로 세 번째…… 아니, 마지막인가? 아천타가 황궁의 사람들을 지배하고 있는 것까지…….
잠깐만.
나는 생각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 차근차근 정리했다.
아천타는 지금 힘이 부족한 상태일 거다. 그리고 그는 지금 언뜻 들어도 규모가 큰 일들에 힘을 소비하고 있다.
그럼 그가 힘을 쓰고 있는 세 가지 중에서…… 지금 가장 쓸모없는 것에는 자연히 힘을 줄이게 되는 거 아닌가?
나는 퍼뜩 고개를 들어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이딜로스, 황궁을 이용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