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72화 (162/191)

172화

나는 그걸 조종하자마자 확 트이는 것 같던 청각에 집중했다.

뭔가가 내게 소곤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를 듣기 위해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안녕.

어느 순간 목소리가 귓가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가까워졌다. 나는 놀라 질겁했다.

내가 뭔가를 골똘히 하는 것을 숨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이딜로스가 급히 물었다.

“아릴, 왜 그래?”

“목소리가……. 이게 나한테 인사했어.”

“……그 피가?”

나는 내 검지를 차지한 반지를 바라봤다.

그 반지는 지금,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 멋대로 꾸물꾸물 형태를 바꿔 화려한 디자인으로 제 모습을 가꾸고 있었다.

꽃 반지가 되었다가, 커다란 보석 반지가 되었다가, 마음에 드는 것이 없는지 형체만 세 번째 바꾸는 중이었다.

그를 지켜보던 이딜로스가 희한하다는 눈으로 말했다.

“……네가 바꾸고 있는 거야?”

“아니……. 난 손댄 게 없는데 혼자 모습을 막 바꿔. 나 조금 무서워…….”

내 떨떠름한 말에 막 꽃을 피워 내고 있던 반지가 멈췄다.

그러곤 아까보다 소심한 움직임으로 가장 처음의 모습으로 꾸물꾸물 돌아갔다.

-내가 무섭게 했어? 미안해.

또다시 들린 목소리에 당황해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또 나한테 말을 걸었어. 나한테 무섭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어.”

“……대체 그건 정체가 뭐지?”

이딜로스가 내 손을 가져가 반지를 바라봤다.

붉은색이지만 투명하게 반짝이고, 정말로 보석인 것처럼 윤택이 흘렀다.

아주 잘 세공된 루비. 쉽게 표현하자면 그런 느낌이었으나, 실상은 그보다 더 시선을 끌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이토록 영롱한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보석은 본 적이 없었다.

나와 이딜로스가 이 반지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자세히 살펴보고 있을 때였다.

귓가에서 다시금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펠리아.

그 말에 멈칫했다. 나는 반지를 멍하니 보다가 시선을 들어 이딜로스를 쳐다봤다.

시선이 마주친 그가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와 동시에 반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에게 귀속된 전생의 영혼. 혹은 수백 년의 세월을 지닌 존재.

-나는 너를 도와주기 위해 왔어.

* * *

그 반지는 자신을 아펠리아라고 소개했다. 나의 전생, 그리고 아천타의 반려였으나 배신을 택해 죽었던 이.

나는 그 반지가 정말 아펠리아가 맞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이딜로스에게서 손을 떨어트렸다.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긴 하지만, 멋대로도 움직일 수 있는 반지다.

이딜로스의 전생인 카얀이 아펠리아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으니 이 반지가 혹시나 형체를 바꿔 이딜로스를 공격이라도 하면 안 될 일이었다.

나는 그 사실을 이딜로스에게 말했다.

이 반지가 듣고 반응하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잠잠했다.

이딜로스는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말했다.

“그 반지가, 전생의 너라고?”

“응……. 날 도와주려고 왔대.”

나조차 믿기지 않는데 이딜로스는 오죽할까.

그도 전생의 자신이 아펠리아를 방패 삼아 그녀가 죽었단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 내게서 살짝 거리를 두었다.

그로부터 이틀. 나는 아펠리아와 여러 상호 작용을 해 봤다.

반지 속 아펠리아는 내가 부르면 거의 즉각적으로 반응해 왔다.

꼭, 오랜 시간 무료하게 갇혀 있다가 깨어나는 것처럼 늘 반갑게 나를 맞았다.

“너 모습을 어디까지 바꿀 수 있어?”

-네가 원하는 거라면 뭐든지. 꽃도 될 수 있고 고기 간식도 될 수 있어. 하지만 먹지는 못해.

아펠리아의 말에 나는 조금 벙벙한 기분이 되었다. 고기 간식이라니…….

아무래도 내 피에서 생겨난 존재이기 때문인지 아펠리아는 나에 대해 아주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바꿨다.

“그런 거 말고……. 아천타를 해칠 수 있는 거는?”

-…….

그 물음에 아펠리아는 대답이 없었다.

역시 이런 물음은 조금 그런가. 그래도 반려 사이였을 텐데.

반려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의 크기를 알기에 나는 다시 물으려던 마음을 접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아펠리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칼, 창, 프라이팬, 바주카포. 모든 게 가능해. 아천타 님을 해치기 위한 것이라고 했으니 역시 날붙이를 써야겠지.

차분하던 그 음성은 무심하게까지 느껴졌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괜찮아?”

-그럼. 문제 없어. 내가 지금 형체는 조금 작지만, 세포 분열 같은 걸 할 수 있거든. 크기를 열심히 불리면 돼!

아펠리아는 씩씩하게 대답했다. 목소리에 자신감이 묻어나는 것이 왠지 대단하다고 칭찬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물은 건 그런 게 아닌데…….’

그 바람에 대화는 내가 의도하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아펠리아가 아천타를 어떻게 여기고 있는지, 좀 더 알고 싶었던 나는 찝찝한 마음을 간직해야 했다.

아펠리아는 아천타의 이야기에 조금 머뭇거리는 경향을 보이지만, 정작 대답을 할 때에는 냉담하기 짝이 없었다.

-카얀은 정말 잘생겼어.

“……응?”

-다정하기까지 해. 이곳의 카얀도 그런 것 같아.

거기다 가끔은, 뜬금없이 카얀을 언급하고 그를 칭찬했다.

나는 일부러 아펠리아를 의식해 반지 낀 손을 이딜로스에게서 떨어트리곤 하지만, 정작 그녀는 내가 이딜로스를 만날 때마다 더욱이 신난 모습을 보였다.

평소엔 잠잠하던 반지가 제 모습을 과시하듯 모습을 크게 부풀린다거나, 이딜로스의 말에 유독 크게 반응하며 조잘거린다거나……. 물론, 그 조잘거림은 나만 들을 수 있다.

아무튼 이쯤 되니 정말 궁금해졌다.

‘아펠리아는 전생에서 자신이 어떻게 죽은 건지 모르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카얀의 얼굴을 한 이딜로스를 이렇게 반가워할 수 없을 텐데.

아펠리아에 대한 여러 의문을 가진 채 시간은 좀 더 흘러갔다.

-아릴, 내가 몸집을 조금 불려 봤어. 모습을 바꿔 볼테니 마음에 드는지 확인해 줄래?

막 잠들기 위해 침대에 걸터앉았을 때 아펠리아가 말했다.

“응.”

내 뜬금없는 대답에 옆에 있던 이딜로스가 관심을 보였다.

내가 갑자기 혼잣말을 해도 이제 그는 그러려니 하는 것 같았다.

내가 반지를 빼 손바닥 위에 올려 두자 반지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더니 단숨에 크기를 키워 나가기 시작했다.

눈 깜짝할 새에 내 손에는 붉은색의 매서운 검이 들려 있었다. 검으로부터 연붉은색의 연기가 피어올랐다.

-어때?

“와아…….”

-멋있어? 마음에…… 들어?

아펠리아가 기대에 가득 찬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응, 마음에 들어. 고마워.”

아펠리아는 기쁜 듯 검날을 흐물흐물하게 만들었다.

곁에서 보고 있던 이딜로스는 감탄을 흘렸다.

“볼 때마다 신기하군.”

그가 검을 물끄러미 보는 모습에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물었다.

“이딜로스, 이 검 쥐어 볼래?”

내 물음에 이딜로스가 살짝 기겁했다. 내가 그간 그를 걱정해 반지를 멀리 떨어트렸다는 걸 이딜로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늘 손을 잡을 때면 반지를 낀 손을 피해 잡았고, 온갖 애정을 나눌 때도 반지는 최대한 가까이하지 않는 쪽으로 했다. 여태 신중을 기울인 거였다.

하지만 이제는 궁금했다. 아펠리아가 카얀과 닮은 이딜로스를 마주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또, 한편으로는 아펠리아가 결코 이딜로스를 해치진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서이기도 했다.

내 눈을 보던 이딜로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 볼게.”

그리고 이딜로스는 망설임 없이 검 자루를 쥐었다.

그 순간, 기묘한 느낌을 주는 비명이 귓가에 퍼졌다.

-꺅.

“……방금, 무슨 소리가.”

내 귀에만 들린 것이 아닌지, 이딜로스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봤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 카얀을 똑 닮았잖아. 어떡해, 멋있어.

설렘을 한 아름 안은 목소리에 나와 이딜로스는 서로 할 말을 잃었다.

이딜로스가 나를 바라봤다. 그의 눈빛이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묻고 있었다.

하지만 나도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나도 모르니까…….

이 상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던 나는 용기를 내 물었다.

“아펠리아. 너 이딜로스가 불편하지 않아?”

-내가 네 짝을 왜 불편해하겠어?

“그거야, 카얀이 널…… 죽인 거나 다름없으니까.”

정적이 흘렀다.

잠시 후, 조금 차갑게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렸다.

-카얀이 날?

“응.”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긴 했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왜?

“그거야 내가…….”

그때, 이딜로스가 쥐고 있던 검이 잘게 진동했다. 아펠리아가 급히 소리쳤다.

-잠깐만. 바깥에서 안 좋은 예감이 들어. 어서 나가 봐!

그리고 아펠리아는 모습을 감추듯 액체처럼 내 검지손가락까지 날아와 반지로 돌아갔다.

나는 이딜로스와 함께 서둘러 신궐을 나왔다. 1층에 달하는 순간부터 땅이 쿠르릉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무슨 일이지?”

그리 말했지만, 실은 이 불길함과 음산한 기운을 주는 존재가 단 하나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딜로스와 난 서둘러 진동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신궐의 홀로 향하다가 멈춰 섰다.

저편에서 검은 인영 여럿이 보였다. 느껴지는 어둑한 기운에 절로 속이 비틀렸다.

나는 이딜로스의 앞을 막아서며 그 중심에 선 이를 노려봤다.

아펠리아의 가라앉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아천타 님.

나는 우선, 그에게 대적할 수단인 반지의 존재를 섣불리 드러내고 싶지 않아 굳이 검을 만들어 내지 않았다.

터벅터벅, 느릿하고도 오연한 걸음으로 신궐에 걸어 들어온 아천타는 우리를 보곤 싱긋 웃었다.

“이런, 마중을 나와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미 정체를 숨길 생각도 없는 마당에, 태연하게 아슐란인 척을 하는 그 모습에 화가 나려 했다. 꼭 놀리는 것만 같았다.

“제가 잠시 떠나기 전에 아릴 님께 특별한 임무를 하나 주었습니다만. 공의 목숨과 수천 명의 인질 중 무엇을 택할 것인지였는데…….”

아천타의 말에 이딜로스의 표정이 굳어 가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는 나를 바라봤다. 설마 내가 쥐고 있던 갈등이 그러한 것일 줄은 몰랐다는 듯.

아천타는 입매를 비딱하게 올려 웃었다.

“굳이 캐묻지 않아도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겠군요. 뭐, 제가 준 시간은 일주일이었으니 아직 이틀 정도는 남았습니다. 공을 죽이고 여러 사람들을 구할 기회는 아직 남아 있다는 뜻이지요.”

“……난 둘 중 누구도 다치게 할 생각 없어.”

“아하, 그러시군요.”

아천타는 비웃듯 날 쳐다보곤 뒤편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아천타의 뒤에서 가만히 서 있던 검은 인영들이 일제히 걸어 나왔다.

꼭 군대 같기도 한 그 많은 인원을 훑던 나는 멈칫했다.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내가 아끼던 이들과 나를 미워했던 이들.

아천타가 데리고 온 건, 2년 전 내가 신격체를 죽이고자 한 죗값을 물어 처형했던 사제들과 얼마 전 아천타의 손에 죽은 신궐의 사제들이었다.

그러니까, 저들은 모두 죽은 자들이란 거다. 그런데 어떻게…….

내 충격을 알아본 것인지 아천타는 나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신전의 한 획을 긋게 되겠군요. 수인께서 무자비하게 죽였다고 알려진 이들을 기적처럼 되살려 데리고 왔으니.”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