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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71화 (161/191)

171화. 카얀과 그녀

그로부터 며칠간은 꼭 이딜로스와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에 대한 민심이 나빠진 탓에 신전을 방문하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면서 여유가 생긴 덕분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조금 슬프고 억울했지만, 또 다른 면으로는 한순간 한순간이 행복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행복 속에는 언제나 이딜로스가 있었다.

하지만 행복이 커질수록 내 갈등은 깊어졌다.

얼마 전엔 대신전을 지나가다가 몇몇 사람들의 목에 이상한 것이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자세히 보니 그건 아주 얇고 날카로운 실이었다.

그러니 그 말은, 목에 실이 감긴 이들 모두가 아천타의 손에 목숨이 걸린 이들이란 거였다.

그중에는 아마, 마멜라 또한 있을 테고.

‘……얼마 전엔 쪽지가 왔었지.’

무려 아천타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내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 생각은 없는 건지, 아천타는 짧은 메시지를 통해 나를 독촉했다.

[앞으로 일주일. 빨리 선택하는 게 좋을 거다.]

나는 막막함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자 함께 업무를 보고 있던 이딜로스가 물었다.

“아릴, 괜찮아? 요즘 잠을 잘 못 자는 것 같던데.”

“아, 응…….”

아니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늘 나를 끌어안고 자는 이가 바로 그였기에 거짓말할 수가 없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나는 조용히 문서를 넘겼다. 이딜로스가 옆에서 나를 빤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뚜렷한 말과 행동을 하지 못한 채 그의 시선이 거두어지기만을 기다렸다.

요즘 들어 이딜로스가 나를 예의 주시하는 듯한 일이 늘어난 건, 역시 내게서 심란함이 보이기 때문인가.

나는 이딜로스에게 걱정을 끼치는 것이 싫어 애써 고개를 들어 웃었다.

이딜로스는 내 억지 미소를 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뜸 내 옆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의아하게 그를 올려다보자, 이딜로스가 양팔을 벌렸다.

나는 일단 이딜로스에게 안긴 후에 물었다.

“뭐야?”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선의 위로라고 해 두지.”

“으응?”

“그리고 이건 고마움의 표시.”

이딜로스가 내 머리에 마구잡이로 뽀뽀하기 시작했다. 나는 처음엔 당황하다가 곧 간지러워 웃음을 터트렸다.

“그만해!”

“간지러움 타는 모습까지 사랑스럽네.”

“갑자기 뭐가 고마워서 이래? 응?”

나는 웃음기가 연신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꽤 궁금한 탓에 그의 품에서 고개를 들었더니, 이딜로스가 내 입에 ‘쪽’ 하고 입을 맞추고서 말했다.

“전생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걸 알게 되었음에도 날 믿어 주고, 선택한 것.”

그의 진심 어린 말에 내 웃음은 어설픈 모양새로 굳었다. 이딜로스는 내 뺨을 감싸 쥐며 계속 이야기했다.

“네가 그런 대단한 선택을 해 준 것만으로 나는 고마워. 나였다면 그러지 못했을 텐데. 알잖아, 뒤끝 심한 거.”

이딜로스는 내 머리를 감싸 다시금 품으로 끌어안았다.

“괜찮아.”

그의 한마디에 나는 심장이 철렁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한 말일 뿐일 텐데, 왜 그게 내 속을 들여다본 것처럼 느껴졌을까.

나는 말없이 이딜로스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고개를 묻은 채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세게 감쳐물었다.

‘이렇게 계속 외면할 수는 없어…….’

슬슬 선택을 해야 했다. 이미 시간은 끌 만큼 끌었기에.

내게 강요된 선택지들 중 가장 현명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그건 아마…….

나는 이딜로스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살며시 웃었다. 그대로 그를 더 꽉 끌어안고 몇십 분이고 있었다.

이딜로스의 안온한 온기에 좀 더 흠뻑 취하기 위해. 꿈에서도, 현실에서도 이 온기로부터 깨어나지 않도록.

한밤이 되었을 때, 나는 눈을 떴다. 느릿하게 몇 번 눈을 깜박인 나는 몸을 옆으로 돌렸다.

깊은 잠에 빠져 있는 듯한 숨소리, 굳게 감긴 눈.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는 이딜로스가 보였다. 곤히 잠든 모습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살포시 나왔다.

‘이딜로스는 잠들어 있을 땐 꼭 순한 양 같아.’

그의 잘생긴 얼굴을 한참이나 들여다봤다. 혼자 생글생글 웃고 있던 나는 서서히 웃음을 그쳤다.

나는 현실을 체감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앉아 내려다본 이딜로스는, 창가의 달빛이 내려앉아 유독 창백해 보였다.

잠결에 흐트러진 이딜로스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고 싶었고, 곤히 잠든 그의 사랑스러운 모습에 열 번도 넘게 뽀뽀를 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그러는 대신, 베개 밑에 숨겨 두었던 검집을 꺼냈다. 검집을 완전히 꺼내어 쥐었을 땐 손이 덜덜 떨렸다.

‘……미안해, 이딜로스. 약속을 못 지켜서. 자꾸만 어기려 해서…….’

나는 한 손으로 검 자루를 쥐고, 반대 손으로 검집을 천천히 벗겨 내던졌다. 푸른 달빛이 칼날을 시리도록 밝혔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두 손으로 검의 손잡이를 쥔 채, 이딜로스의 앞에서 들어 올렸다.

겁에 질린 마음을 대변하듯 손이 미친 듯이 달달 떨렸다. 덩달아 주체하지 못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손으로 이딜로스를 해쳐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 버겁게 느껴졌다.

‘역시, 조금 더 생각을…….’

그때, 굳게 눈을 감고 있던 이딜로스의 입이 나직이 열렸다.

“망설이지 마.”

나는 흐트러진 숨을 들이켠 채로 굳었다.

잠들어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는데……. 아니, 생각해 보면 그 꿈에서도 이딜로스는 깨어 있었던 것 같다.

“어, 어떻게…….”

“아천타가 네게 무슨 갈등을 줬다는 건 알고 있었어.”

“…….”

“이게 네 선택인 거겠지.”

나는 태연하게 말하는 이딜로스를 믿을 수 없어 바라봤다.

“괜찮아. 내가 다 감당하겠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 생기든.”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입매도 살짝 올렸다.

하지만 곧, 그의 눈썹이 미약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여전히 굳게 감겨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으로 한 번이라도 좋으니 널 보고 싶어.”

나는 검을 쥔 손을 덜덜 떨며 그를 바라봤다. 눈물만 소리 없이 자꾸 떨어져 이불자락을 적셨다.

“……그랬다간 네 결심이 흔들릴 수도 있을 테니 안 되겠지.”

그가 희미하게 틔우고 있던 미소가 이내 자취를 감췄다. 그는 정말로 준비가 된 듯, 평온하고도 고요한 표정을 지었다.

그 결연한 모습에, 나는 울음 섞인 숨을 몰아쉬었다. 내 심경을 눈치챈 그가 한마디를 더 거들었다.

“어서.”

그 순간 검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저편으로 날아갔다.

나는 이딜로스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를 억세게 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엉엉 소리까지 내며 공포의 정점을 찍었던 마음을 모두 녹여 없애 버릴 기세로 울었다.

내가 어떻게 이딜로스를 해치겠어.

내가 어떻게 그래.

내 목숨보다 소중한 사람이 이딜로스인데.

한참을 울고 있을 때, 느릿하게 등을 토닥이는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그의 옷자락을 두 손으로 쥐었다. 그 다정한 온기에 이대로 숨이 멎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이딜로스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윽…….”

나는 화들짝 놀라 그에게서 떨어졌다. 내가 검을 저 멀리 치우지 않았던가? 내가 너무 세게 이딜로스를 끌어안았나?

오만 생각이 그를 향한 걱정으로 날아갔다.

“이딜로스, 왜 그래?”

굳게 닫혀 있던 그의 눈이 마침내 뜨였다.

황금색의 시선이 엉망으로 울고 있는 나를 잠시간 보더니, 곧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이딜로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아릴, 너…… 손이.”

“응……?”

나는 이딜로스의 옷자락을 쥐고 있던 두 손을 바라봤다.

한쪽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반대쪽은 상태가 아주 이상했다.

어딘가에 다치기라도 한 건지 피가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난 인간 문물의 것으로는 결코 피를 볼 수 없는 몸이 아니던가.

나는 시선을 돌려 저 멀리 던져진 검을 바라봤다.

그럼, 내가 저기에 다친 건가? 나는 붉게 젖은 손을 생경하게 바라봤다.

다행히 아무리 아천타의 검이라 한들, 내게 치명상을 입히지 않는 한, 나는 자연적으로 회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것보다 더 이상한 점이 있었다.

바로, 내 피가 고체로 굳었다는 것.

아니, 이건…… 결정이 되었다고 하는 게 맞는 걸까.

나와 이딜로스는 내 손에 고인 피가 손과 팔을 타고 흐르다가 얼마 후 보석처럼 굳는 것을 멍하니 봤다.

이게 뭐지. 재차 확인하기 위해 피를 억지로 짜내 보려는데, 이딜로스가 내 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진지하게 물었다.

“아릴, 너 이거 원래 이래?”

“모르겠어…….”

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나를 따라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그가 내 손을 자세히 살폈다.

이딜로스의 눈에 복잡함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서였군,”

“뭐가?”

이딜로스는 착잡한 낯을 하더니 입을 열었다.

“……아릴, 사실 내가 알게 된 것이 있어.”

내가 그를 의아하게 바라보자, 이딜로스가 상처가 난 내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말했다.

“아천타의 약점. 그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그게 뭔데?”

나는 귀를 바짝 세웠다. 그러자 이딜로스가 쥐고 있던 내 손을 시야 중앙으로 끌어당겼다.

“수인의 약점이 아천타의 비늘이었듯이, 아천타에게도 수인의 신체 일부가 약점이야. 그리고 그게 바로 수인의 피고.”

“……내 피?”

나는 내 손을 홀린 것처럼 바라봤다.

새로이 알게 된 것 때문인지 그로부터 느껴지는 감각도 어딘가 다른 것 같았다.

이 피가 주는 느낌이 왜인지 모르게 독립된 하나의 개체처럼 느껴졌다.

나는 곧 무언가가 생각이 나 이딜로스에게 잠시 손을 놓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손에 엉겨 붙은 붉은 결정들을 과감하게 떨어트렸다.

따끔거리는 느낌에 인상을 찌푸리자, 이딜로스가 경악하더니 급히 내 손을 방어하듯 감싸 쥐었다.

“하지 마, 아릴. 뭐 하는 거야.”

이딜로스는 낭패와 걱정이 뒤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설마 그가 내게 하려고 망설였던 말이 이거였던 건가.

지금 이딜로스는 딱, 괜히 말했나 후회를 느끼는 얼굴이었다.

“이딜로스, 이것 봐.”

나는 이딜로스가 잡아 준 손에 마주 힘을 실으며 시선을 내렸다.

나를 따라 떨어진 결정을 본 그가 당황한 듯 침음했다.

“모양이…… 바뀌었잖아.”

떨어질 때까지만 해도 들쭉날쭉한 괴상한 모양이었던 결정이 동그란 구슬이 되어 있었다.

나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나는 거기에 한술 더 떠, 몸이 시키는 대로 그 결정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것이 움직였다.

그 결정은 나를 따르듯이 내가 뻗은 검지를 타고 올라오더니, 마치 반지처럼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나는 오감이 배는 날카로워진 것 같은 섬뜩한 기분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움직일 수 있어. 단순한 피가 아니야.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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