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허리가 꽉 붙잡힌 나는 당황했다. 너무 놀란 나머지 아천타를 밀어내려 했지만, 저항할 수가 없었다.
온몸에서 힘이 점차 빠지는 게 느껴졌다. 말뿐이 아니라 정말로, 빨려 나가고 있다.
폭력적이다가도 부드럽고, 다시 부드럽다가도 폭력적인 접촉에 나는 정신이 다 혼미해졌다.
이 순간 이딜로스가 간절히 생각났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아천타의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그가 작게 반응하더니 마침내 떨어졌다.
“하아…….”
“이게…… 무슨 짓이야!”
나는 경악과 당혹감이 뒤섞인 마음으로 소리쳤다.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천타는 짙은 열감이 느껴지는 눈길로 나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또다시 잡아먹힐 것 같은 두려움이 엄습했다.
“말했다시피, 넌 내게 여전히 사랑하는 반려지. 그런데, 다른 인간과의 맹세를 들먹이니 화가 안 나고 배기겠어?”
아천타는 낮은 목소리로 위협적으로 으르렁거렸다.
그의 말을 듣던 나는 안개가 온전히 걷히는 느낌을 받았다.
그가 했던 말들의 모순들이 하나하나 집히기 시작했다.
“날 사랑한다고? 네가? 너 분명 처음에 날 죽이고 싶다고 했잖아.”
나는 몇 번이나 내게 거짓말을 하고, 이번엔 내게 착란까지 일으킨 그를 맹렬하게 노려봤다.
“그런데 날 사랑한다고? 거짓말. 네가 내게 한 번이라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적 있어?”
나는 조금 전의 일에 치가 떨려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있는 힘껏 아천타의 뺨을 후려쳤다.
“네가 날 사랑하면 그렇게 거짓말 못 해. 늘 전전긍긍하게 되고 이 거짓말로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불안하니까! 그리고 이렇게 강압적으로 굴지도 않아. 넌 나를 배려할 마음이 눈곱만큼도 없는데, 대체 나한테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아천타는 내게 맞은 뺨을 문지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나는 분노에 거칠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난 아펠리아가 아니야.”
내가 하는 말을 잠자코 듣고 있던 아천타가 눈가를 찌푸렸다.
“이딜로스도 카얀이 아니야. 왜 내가 네 반려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고, 이딜로스가 카얀이라도 되는 양 복수하라고 하는 거지?”
이제야 알 것 같다. 아천타의 목적.
아천타가 나를 죽이지 않고 내버려 둔 것. 멀어진 이딜로스와 내가 다시 함께할 수 있게끔 한 것.
그리고 내게 전생을 보여 줘 나를 조종하려고 한 것…….
그 모든 게, 내가 반려를 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그게 바로 아천타의 목적이고, 그가 신에게 복수하고자 한 방식인 거다.
나는 아천타를 쏘아보며 말했다.
“아펠리아가 왜 반려의 연을 두고 카얀에게 마음을 돌린 건지 알겠어.”
그러자 아천타가 눈에 띄게 동요하기 시작했다.
“네가 감히…….”
곧 아천타의 얼굴에 깊은 분노가 서리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곧바로 물러서고 싶었지만, 여전히 허리가 그에게 붙잡힌 상태였다.
나는 아천타가 또 어떤 짓을 벌일지 몰라 긴장한 채 그의 동태를 살폈다.
그의 목적대로라면, 지금 여기서 날 죽이지는 못할 것이다.
아천타는 얼마 안 가 나를 내팽개치듯 밀쳐 냈다. 그리고 곧, 허공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의 손에 새까만 검의 형상이 생겨났다. 그 정체를 한눈에 알아본 나는 기겁했다.
아천타의 검.
‘설마, 목적을 내버리고 이대로 나를 죽이려는 건가?’
아천타는 검의 상태를 확인하듯 그를 내려다보다가, 내게로 시선을 들었다. 나는 한 손에 새까만 검을 쥔 그의 모습에 위협을 느꼈다.
내가 살짝 겁먹었다는 것을 아는지, 아천타는 비릿하게 웃었다.
“네겐 그놈을 죽이지 않는 선택지는 없어.”
다음 순간, 그의 손에 들린 검이 모습을 바꾸었다. 순식간에 그 검은 짧은 단검으로 변했다.
그것도, 특유의 새까만 색을 모조리 감춘 평범한 백색의 단검으로.
나는 그 검을 보자마자 소름이 일었다.
저 검을 본 적이 있다. 바로, 꿈속에서.
내가 이딜로스를 향해 검을 겨누었던, 그 꿈에서.
혼란스러워져 그 검을 바라봤다. 아니기를 바랐지만, 아무리 뜯어봐도 저 검은 내 꿈에 나온 그것이 맞다.
설마 그 꿈이 예지몽이었나?
생각이 복잡하게 흘러가는 사이, 아천타가 내 발치로 검을 던졌다. 나는 크게 흠칫하며 물러났다.
“그 검으로 그놈을 죽여. 그러지 않으면, 수천 명의 인간들이 목숨을 잃게 될 테니.”
“……뭐?”
“내가 설마,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을 것 같나?”
아천타는 더없이 천사 같은 성결한 얼굴로, 악마처럼 잔악하게 웃었다.
그가 손을 들어 올리자 그의 손으로부터 가지가 뻗어 나가듯 연결된 얇은 실들이 나타났다.
나는 긴 생각을 거치지 않고도 알아챌 수 있었다. 저 실이 생명의 줄 같은 것이라는 걸.
“그 수많은 인질 중엔 카델라로트 공녀도 있지. 그 꼬마는 네 은인이 아니던가?”
설마 마멜라를……!
아천타는 내 표정이 일그러지는 것이 유쾌하다는 눈으로 말했다.
“선택은 네 몫이다. 카얀 노아르크를 죽일 건지, 아니면 수천 명의 인간들이 죽어나는 것을 볼 것인지.”
* * *
이딜로스를 죽이라는, 아천타의 비열한 협박을 받은 날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그간 나는 많은 고민을 했다.
이딜로스에게 내가 아천타에게 세뇌를 당할 뻔했던 것과, 난 전생의 일에 구애되지 않을 거라는 의견까지는 밝혔지만…….
이 일에 대해서는 조금도 말할 수 없었다.
“……아릴. 있잖아.”
그런데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이딜로스는 나를 부르고선 한참을 뜸을 들이더니 끝내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평소라면 캐물었을 텐데. 지금은 내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일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은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마음이 너무 심란했다.
나는 이딜로스를 죽일 수 없는데. 하지만 그를 죽이지 않으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죽는다.
신격체의 입장에서 바라본다면, 그건 그저 한 명의 목숨과 수천 명의 목숨.
이딜로스의 목숨을 두고 저울질을 해야 한다는 사실이 사무치게 괴로웠다.
그리고 내가 정말 공정한 신격체라면. 이딜로스의 목숨은 절로 후순위가 된다는 점에 더더욱.
하지만 내가 이딜로스를 죽이면 나는 아천타처럼 천벌을 받고 내쫓기게 될지도 모른다.
천명을 어기는 것보다 더 큰 죄목을 가지는 것이 반려를 죽이는 것 아닌가.
그럼 대체 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떤 선택을 내려야만 하는 걸까.
모두를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정말 없는 걸까.
“아릴, 요즘 안색이 많이 안 좋아.”
“으음, 아천타 때문인가 봐.”
“그자 때문이라면 그럴 만하군. 갑자기 또 종적을 감췄으니 언제 나타날지도 모르고.”
“……응.”
“…….”
나도 모르게 음울하게 대답했나 보다. 이딜로스가 뭔가를 망설이는 표정으로 나를 봤다.
그게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이란 걸 알아서, 걱정하지 말라고 손을 내저으려는 순간이었다.
들어 올린 손을 이딜로스가 덥석 붙잡았다.
“아릴, 산책이라도 갈까?”
“응? 산책?”
“갑자기 상쾌한 공기가 마시고 싶어서. 아니면, 공놀이도 좋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놀이…… 재밌겠다.
사실 신전에 오고부터는 위엄을 지키기 위해 짐승의 모습으로 풀밭을 뒹군 적이 없었다. 숨이 벅찰 정도로 달린 적 또한 없었고.
나는 기대를 잔뜩 담아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호랑이 모습으로 가도 돼?”
“네가 그편이 좋다면.”
나는 두 눈을 빛냈다. 내가 화색을 띠기 시작한 것이 만족스러운지, 그가 픽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와 이딜로스는 신궐 바로 옆에 있는 숲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조금만 걸으면 수풀에 가려진 들판이 나왔다.
딱 공놀이하기 좋은 장소였다.
‘이딜로스와 공놀이라니. 이게 대체 얼마 만이지?’
나는 너무 설레는 나머지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다.
우선 들판에 도착하자마자 호랑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리고 이딜로스의 손길을 받으며 한바탕 애교를 부렸다.
한동안 짐승의 모습이 된 적이 없으니 그 역시 만질 일이 없었을 텐데 이딜로스의 손길은 여전히 수준급이었다.
‘설마 내가 없는 동안 나 대신 다른 걸 키운 건 아니겠지.’
이딜로스는 내 푹신한 털을 마구 문질러 주다가 말했다.
“아릴, 고양이일 때보다 공을 더 잘 가져올 수 있겠지.”
열심히 그의 손을 할짝거리던 나는 고개를 홱 들고 얼른 끄덕였다.
이딜로스는 그새 흥건해진 손으로 챙겨 온 공을 잡았다.
내가 준비되었단 걸 확인한 그가 이윽고 힘차게 공을 던졌다.
나는 튀어 오르듯이 달려가 공이 땅에 닿기도 전에 입으로 낚아챘다. 공을 물고 가자 이딜로스가 감탄했다.
“대단한데. 우리 고양이는 대체 못 하는 게 뭘까.”
“어흥!”
아마 그런 건 없을 거라고, 우렁차게 대답하자 이딜로스가 흠칫했다. 나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고양이일 때나 앙증맞은 울음소리지, 호랑이일 때는 포효라는 걸 잊었다.
내가 입이 들어가도록 쏙 다문 것을 본 이딜로스의 입매가 씰룩거렸다. 이윽고 그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하, 진짜…… 귀여워서.”
이딜로스의 말에 나는 눈을 반짝이며 꼬리를 붕붕 흔들었다.
이 맛에 짐승이 되었던 건가. 고양이나 호랑이가 되어 그에게 받는 칭찬은 어쩐지 좀 더 특별하게 느껴졌다.
‘이딜로스가 옛날엔 짐승의 ‘짐’ 자만 꺼내어도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짐승을 멀리했기 때문인가?’
이딜로스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준 후에 다시 공을 던져 줬다.
그렇게 몇 차례 공을 물어 오기를 반복하다가, 우리 둘 다 동시에 지쳐 풀밭 위로 엎어졌다.
나는 혓바닥을 내밀고 축 늘어져 있다가 이딜로스의 손길에 고개를 들었다. 이딜로스가 내 털을 정성껏 쓰다듬고 있었다.
“고양이일 때보다 부드러운데. 훨씬 푹신하고.”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난 고양이일 때나, 사람일 때나, 호랑이일 때나 늘 털이 보들보들하단 말이지.
내 의기양양한 표정을 알아본 건지 이딜로스가 쿡쿡 웃었다. 그가 내 거대한 앞발을 잡아당겼다.
“이리 와.”
나는 이딜로스가 끌어당기는 대로 가다가 그가 제 몸 위로 당기고 있다는 걸 알아채곤 기겁해 멈췄다.
그가 팔을 넓게 벌렸다. 그러곤 은근히 기대의 눈길을 보냈다.
“지금 널 끌어안으면 굉장히 푹신푹신할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황급히 가로저었다. 내가 지금 모습으로 이딜로스의 위에 올라가면 틀림없이 납작해질 텐데…….
“어서.”
날 끌어안고 죽겠단 건가……?
나는 심각하게 그를 바라봤다.
그러다 자꾸만 재촉하는 그의 손길에 못 이겨 마지못해 끌려가 주었다.
“올라와 봐.”
떨떠름하게 그를 보자 이딜로스가 눈가를 장난스레 휘었다. 이쯤 되니 그가 뭘 원하는 건지 알 것 같았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이딜로스에게 앞발 하나를 올렸다. 그리고, 완전히 무게를 싣기 전에 모습을 바꿨다.
시야가 단숨에 낮아지며 그의 온기가 긴밀하게 느껴졌다.
나는 그의 위에 안긴 채로 빼꼼 고개를 들었다.
“이제 됐지?”
“응, 잘했어.”
나는 몸이 으슬으슬하는 것을 느끼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난 몰라, 이제. 입고 온 옷은 저쪽에 있는데…… 춥단 말이야. 이딜로스가 책임져.”
나는 앙칼진 눈으로 이딜로스를 보며 그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살짝 때렸다.
이딜로스가 피식 웃으며 나를 좀 더 위쪽으로 당겨 올렸다. 정면에 보이는 것이 그의 가슴팍에서, 얼굴로 바뀌었다.
그가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어떻게 책임져 줄까.”
“데워 줘. 따뜻하게…….”
“고작 따뜻하게? 뜨겁게도 가능한데.”
“진짜? 그럼 뜨겁게……!”
그가 제시한 새 선택지를 다급히 물자 이딜로스가 소리 내어 연신 웃었다.
그는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내 뺨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 알았어. 네가 원하는 건 다 해 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