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이딜로스는 잠시 당황했다가, 자신이 무심코 손을 세게 쥐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황급히 아릴의 손을 놓았다.
“미안해, 아팠을 텐데.”
아릴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조용히 자신을 응시하기만 하는 그녀를 보며, 이딜로스는 아릴이 텅 비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불안감을 안일하게 넘길 수 없던 그는 조심스레 물었다.
“아릴, 내가 없는 동안 어떻게 된 거야. 아천타가 네게…… 무슨 짓을 했어?”
“아천타…….”
“말해 봐, 아릴.”
“아천타는 아무 잘못 없어.”
“……뭐?”
이딜로스는 아릴의 말에 제대로 넋이 나갔다.
지금 아릴이 무슨 말을 한 거지?
그 말이 너무 뜬금없기도 했고, 지금 상황에 맞지 않기도 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모든 잘못은 나랑 너야.”
아릴의 초점 잡힌 시선이 그를 바라봤다. 이딜로스는 황궁의 꼭두각시 시종들에게 느꼈던 그 오싹함을 느꼈다.
이딜로스가 어떤 반응을 해야 할지 몰라 굳어 있는 사이, 아릴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자다 깬 사람답지 않게 혈색이 오른 아릴은 지나치게 예뻤고 또, 차분했다.
이딜로스는 입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아릴, 다시 한번 물을게. 아천타가 네게 무슨 짓을 했어?”
“……과거를 보여 줬어.”
아릴은 이딜로스를 빤히 바라봤다. 그의 얼굴에서 누군가를 찾는 것처럼, 몇 분이고 들여다보고 있던 아릴은 곧 웃음을 흘렸다.
한순간에 허물어진 아릴의 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네가 카얀이었구나. 이딜로스가 카얀이야.”
“뭐?”
“이딜로스, 우린 한 번 아천타에게 대항하려다 실패했어. 그리고 네가 날…….”
아천타도 그렇고, 아릴도 그렇고. 이딜로스는 그들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는 힘겨워하는 아릴에게 다가갔다. 아릴을 다독이기 위해 허리를 살짝 숙였다.
두 팔을 벌리기도 전에 아릴이 먼저 그의 목을 힘차게 끌어안았다.
아릴은 그의 목에 고개를 묻고 옛날처럼 몇 번이고 뺨을 문질렀다. 꼭 어리광 부리는 고양이처럼, 간절한 애정이 담뿍 묻어났다.
하지만 이어진 아릴의 말은 괴리가 컸다.
“네가 날 죽였어, 카얀.”
이딜로스는 멈칫했다. 그 말에 그가 굳어 있는 순간에도 아릴은 애정을 쏟아 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아릴의 행동은 한마디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지금, 저런 말을 하면서 그에게 참을 수 없는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그랬다.
이딜로스는 아릴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 힘껏 그녀를 떼어 냈다.
그는 그제야 엉망이 된 아릴의 표정을 살폈다. 이딜로스는 몇 번을 망설인 끝에 말했다.
“아릴, 알려 줘.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카얀이 대체 누군지.”
이딜로스는 아릴의 개인 기도실에 들어갔다.
아릴이 홀로 사색에 잠길 때 쓰이던 곳.
그리고 최근엔 몰래 애정 행각을 벌일 때나 왔던…….
성수의 못을 지나쳐 신상 앞에 선 이딜로스는 잠시 양심이 찔렸다. 왠지 신상이 그를 빤히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그는 곧 한숨을 내쉬곤 신상 위, 유리로 덮인 밤하늘을 바라봤다.
아릴에게 전생에 관한 일을 들었다.
‘전생의 아릴이 아천타의 반려였고, 난 반란군의 수장이었다지.’
그리고 그와 아릴은 이루어져선 안 될 사이이기도 했다.
아릴은 하늘만큼 높은 신격체의 반려의 위치였고, ‘카얀’은 그 신격체에게 반항하는 자였으니.
대체 두 사람이 어떻게 만난 것인지는 아릴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전생의 내가…… 그런 짓을 했다고.’
이딜로스는 밤하늘을 보며 조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아릴을 생각했다.
전생의 기억을 떠올린 까닭인지, 아릴은 혼란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딜로스, 날 사랑해? 난…… 널 사랑해.>
<당연히 널 사랑하지. 난 널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어.>
<그럼 왜 날 배신했어? 날 사랑한다며.>
아릴의 원망 섞인 눈망울을 떠올린 이딜로스는 막막함에 한숨이 나왔다.
지금은 아릴을 잘 다독여 신전의 상황을 살피러 보냈다. 그가 같이 가겠다고는 했으나, 아릴은 생각할 것이 많다고 혼자를 고집했다.
‘……나만 해도 복잡한데, 아릴은 더 그렇겠지.’
이딜로스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을 쏘아봤다.
‘카얀 노아르크라고 했지.’
미친놈. 무슨 생각으로 아릴을 방패 삼은 거지?
이딜로스는 꿈에도 생각 못 할 쓰레기 같은 행동이었다. 자신은 아릴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데…… 어떻게 전생과 지금이 이렇게 다를 수 있지?
이딜로스가 카얀이란 존재를 없애 버리고 싶다고 서른번 쯤 생각했을 때였다.
덜그럭-
“……?”
이딜로스는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방금 신상이 움직였다. 설마 아천타인가?
그는 긴장감을 늦추지 않은 채로 주변을 경계했다. 잠잠했다.
‘잘못 본 건가.’
한참 만에 바짝 세운 경계심을 사그라트렸다. 새삼 예민해진 신경을 느끼며 다시금 하늘을 바라봤다.
덜그럭, 덜그럭.
다시 신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 크게. 이번엔 성수의 못도 함께 찰랑거렸다.
이건 신상이 움직이는 게 아니라, 꼭 지진이라도 일어나는 것 같았다.
이딜로스는 당황해 신상에서 멀찍이 떨어졌다. 저렇게 크게 흔들리는데 무너져서 깔리기라도 하면 즉사할 것 같았다.
‘설마 그게 아천타의 목적인가. 이제 날 처리하려고?’
한 걸음씩 물러서며 천천히 주변을 훑어봤다. 그때, 뒤편에서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슨 얼토당토않은 생각이냐.”
이딜로스는 흠칫, 놀라다가 뒤돌아봤다. 목소리가 아주 익숙했다. 확실한 건, 아천타는 아니다.
“……선생님?”
“그래.”
“여긴 어떻게……. 수인이 아니면 출입할 수 없는 곳입니다. 무단으로 들어오신 거라면 불법입니다.”
“그럼 넌 뭐길래? 네가 수인이라도 되었던가.”
“전……. 소식을 들으셨을진 모르겠지만, 반려이기에.”
“쯧, 오랜만에 본 녀석이 따분하게 법 타령이나 해 대고. 서러워서 살겠나.”
기도실에서 전혀 성결하지 못한 누더기 차림으로 뒷짐을 지고 온 데비드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이딜로스는 덩달아 어이가 없어졌다.
“몇 년 만에 보는 게 뭐가 새삼스럽다고요.”
이 사람이 대체 이곳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진지하게 생각하던 이딜로스는 불현듯 아까 그 진동을 떠올리곤 황급히 주변을 경계했다.
“선생님, 여긴 위험합니다. 얼마 전에 신전에서 대규모 살인이 일어난 걸 모르십니까?”
“알다마다. 아천타가 벌인 짓엔 내가 모르는 것이 없지.”
위험하다 경고를 했음에도 데비드의 자수정 색 눈은 그저 호쾌한 빛을 띠기만 했다.
여전히 겁도 없고, 이곳에 멋대로 들어온 걸 보아 막무가내의 성격도 죽지 않은 모양이다.
이딜로스는 그를 참 대단하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에펜도르가 생각이 나 물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 일 없었습니까? 에펜도르에 아천타가 다녀갔을 텐데.”
“그걸 이제야 물을 줄은 몰랐다. 아주 큰일이 있었지.”
“큰일이요? 괜찮으십니까?”
데비드는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내저었다.
“나한테 큰일은 아니고. 내가 아천타의 집을 폭파해 버렸거든.”
“……예? 뭘 했다고요?”
“거참. 아직 젊은 녀석이 벌써 말귀도 못 알아듣는 거냐? 여기서도 일만 시키디? 매일같이 그리도 몸을 혹사하니 건강이 나빠지는 것 아니냐. 아무리 신전 소속이 되었다 한들, 훈련 정도는…….”
“선생님. 아무 일도 없으셨던 거 맞습니까?”
이딜로스는 지난날, 황궁의 시종이 이상 반응을 보이는 것을 눈앞에서 봤다. 그리고 그 시종은 마치 다른 이에게 동화라도 된 것처럼 보였다.
<짜증, 나……. 망할, 죽여 버릴…… 감히, 내…… 것을.>
어딘가 버벅대고 서툴던 말들이지만. 그 시기가 아천타가 에펜도르로 떠났던 때라는 걸 떠올리면.
그 시종의 말과 행동은 데비드가 관여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스승, 데비드는 이딜로스의 걱정을 눈치챈 듯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곧 흐뭇한 눈으로 웃었다. 꼭 손주가 걱정해 준 것을 흡족하게 여기는 할아버지 같았다.
“걱정 말거라. 난 선생이 아니냐. 선생님은 호락호락하게 안 당한다.”
“예나 지금이나…… 헛소리를 하는 재주에는 변함이 없으시군요.”
“하하. 너무하군.”
데비드가 이딜로스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는 진중한 눈으로 이딜로스의 두 눈을 바라봤다.
“난 지금 네가 어려움에 처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데비드의 보랏빛 눈동자에는 시선을 뗄 수 없는 기묘한 힘이 있었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을 압도하고 제가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힘 또한 그렇다.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을 기억하나?”
“늘 말이 너무 많으셔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네 믿음이 확고하기만 하다면 뭐든 괜찮을 거라고 한 것 말이다.”
데비드는 토닥이던 손을 멈추고, 이딜로스의 어깨를 꽉 쥐었다. 꼭 힘을 실어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네가 믿는 모든 것을 믿거라.”
“……명심하겠습니다.”
“신도 믿어 주면 좋고. 뭐, 아직도 무신론자냐? 애인이 신격체인데?”
“…….”
이딜로스는 정색했다. 데비드는 쓸쓸하다는 얼굴로 손을 거뒀다.
“스승이 한땐 신전의 수재였는데…… 제자라는 놈이 따라 주지는 못할망정.”
“나가셨지 않았습니까, 신전.”
“그래, 알았다. 이런 걸 강요해 봤자 신앙심이 생길 리도 없고.”
이딜로스는 기도실의 문 쪽을 바라봤다. 허락도 없이 들어온 사람이 이렇게 오랫동안 있어도 되는 건가.
분명 데비드라면 아천타의 분노를 샀을 터, 이딜로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선생님, 이제 그만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는 게 좋겠다. 그런데 이딜로스. 내 혹시나 싶어 묻는 거다만.”
“네?”
“내가 우리 딸을 위해 네게 친히 알려 준 것을 잊지는 않았겠지?”
“무엇을 말입니까?”
“아천타의 약점. 내가 다른 이를 통해 전해 주었을 텐데.”
이딜로스의 눈이 커졌다.
‘……아천타의 약점이라고?’
그건 루다비토의 공주가 그에게 전해 줬다. 그리고 공주는 신께서 굽어살핀 것이라고 하지 않았나?
이딜로스의 머릿속에 여러 생각들이 스쳐 갔다.
데비드는 그런 이딜로스의 표정은 신경 쓰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수인과 아천타는 서로 상극의 기질을 가지고 있지. 그러니 아천타의 신체 일부가 수인에게 독이라면, 그 반대도 가능하지 않겠나?”
“…….”
“……이 녀석. 지금 내가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무슨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신의 현신이라는 게…….”
이딜로스는 데비드의 보라색 눈을 바라봤다.
“그러니까, 당신이 신이라는 겁니까?”
“……뭐?”
데비드가 당황한 얼굴로 떠듬거리며 말했다.
“아니……,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지? 내 제자가 그렇게 천재이진 않았는데.”
“루다비토의 공주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이건 신이 저를 굽어살핀 것이라고. 그런데 그게…… 당신이라고요?”
데비드는 어안이 벙벙한 낯을 했다. 입까지 벌리고 있는 게, 아무리 봐도 신의 위엄 있는 모양새가 아닌데…….
“내가 그리 정체를 숨겨 달라고 부탁했건만……!”
그러니까, 신이 이렇다고?
이렇게…… 허술하다고?
낭패라며 혀를 차던 데비드가 눈을 부릅뜨고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이렇게 된 거, 숨길 것도 없게 되었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아천타의 약점은 수인의 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