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또다. 이 자가 ‘카얀 노아르크’라고 말하는 것이.
이딜로스는 오래전의 기억 속에서, 아천타가 훼손된 시신을 뱉어 내고 중얼거렸던 말을 기억했다.
카얀 노아르크.
그리고, 아릴이 기억을 되살려 준 후에야 서서히 생각난, 아천타의 다음 말.
<불쌍하게도, 반려의 자질을 갖춘 아이로구나.>
꿈에서는 아릴이 구해 주었지만, 현실은 달랐다. 아천타는 저 말을 끝으로 뒤돌아 떠났다.
그렇게 그 자리엔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부모님의 시신과, 아직 어렸던 열일곱 살의 그가 남았다.
이딜로스는 차오른 의문을 견디지 못했다. 그때는 깨닫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았다. 그게 누군가의 이름이라는 걸.
“왜 자꾸 날 카얀 노아르크라고 부르지?”
카얀 노아르크는 누구이며. 처음부터 자신이 수인의 반려임을 알았음에도 죽이지 않았던 아천타의 목적은 대체 무엇인가.
이딜로스의 열망에 가까운 의문에, 아천타는 오연하게 입매를 올렸다.
“그 이유만 궁금한가? 카얀 노아르크가 누구인지는 궁금하지 않고?”
정신을 파고드는 듯한 나긋한 저음이 내려앉았다.
“혁명에 실패한 반란자. 그리고 높은 이의 반려를 채 간, 주제도 모르는 쥐새끼.”
아천타가 가볍게 손을 들었다. 그러자 시야의 뒤편을 장식하던 시신들이 일제히 사라졌다. 마법을 쓰기라도 한 것처럼, 바닥을 흥건히 적신 피도, 냄새도 모두.
“더 궁금하다면, 아펠리아에게 물어보지 그래. 이젠 그 누구보다 잘 대답할 테니.”
“당신…… 아릴에게 무슨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아릴에게 손끝 하나라도 대었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다.”
정신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살벌한 눈빛을 하는 그를 보며 아천타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군. 그럼, 행운을 빌지.”
아천타는 이딜로스의 어깨를 토닥이곤 거짓말처럼 종적을 감췄다.
그가 사라지자마자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에 이딜로스는 급히 숨을 몰아쉬었다.
“아릴……!”
그리고 곧바로 걸음을 바삐 해 아릴을 찾아 나섰다. 이딜로스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신전엔 이미 큰 파도가 치고 간 것 같았다.
* * *
멀거니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나는 느껴지는 기척에 뒤돌았다.
“제 손 잡으세요, 아펠리아 님.”
“……응, 고마워.”
나는 카얀의 손을 잡고 말 위에 올랐다. 먼저 말을 타고 있던 카얀의 온기가 등으로 전해졌다.
이상하기도 하지. 카얀에게서 원래 이런 향이 났던가? 좀 더 시원하고, 꽃 내음 같은 느낌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의 카얀에게선 싱그러운 풀 내음과 약간의 흙냄새가 풍겼다. 숲에 들어온 것 같은 평온한 느낌이라, 이쪽도 마음에 들었다.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자 부드러운 금색 머리칼이 이마를 스쳤다. 살랑이는 느낌이 좋아 뺨을 살짝 문질렀다.
카얀은 말의 고삐를 잡으려다 말고 웃더니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아펠리아 님, 그거 아세요? 가끔 고양이 같아요.”
“고양이?”
“네. 저희 마을 두 번째 길에 있는 꽃 가게에 푸른색 눈을 가진 고양이가 있거든요. 꼭 그 앨 닮았어요. 아펠리아 님처럼 도도한데 가끔 애교도 많아서요.”
마을……. 꼭 평민처럼 이야기하네. 카얀은 귀족이 아니었던가?
나는 카얀의 웃는 얼굴을 보며 다시 생각했다.
맞아, 카얀은 귀족이 아니지. 원래는 작위의 계승권이 있었지만, 가문의 모든 걸 빼앗기는 바람에…….
멍하니 카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때, 말을 몰고 옆으로 온 누군가가 말했다. 그는 전장에라도 나가는 것 같은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카얀, 군사들이 모두 준비됐어.”
“그럼 이제 출발하기만 하면 되겠군. 모두에게 전해. 지금 성궐로 진군하겠다고.”
카얀은 예의 그 날카로운 눈으로 말했다. 나는 잠시 몸을 일으켜 카얀을 바라봤다.
그러고 보니, 아까 그 사람만큼은 아니지만 카얀의 복장도 어디 싸우러 가는 사람 같았다.
“카얀, 우리 어디 가?”
내 물음에 카얀이 의아한 낯을 했다.
“많이 피곤하신가 보네요. 저흰 지금 신전으로 갈 겁니다. 독재하고 있는 아천타를 끌어내리기 위해.”
“……응?”
카얀의 두 눈에 비장함과 희열이 뒤섞여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넋이 나가 있는 사이, 카얀은 말을 움직였다.
그리고 다시 눈을 깜빡인 순간 시야가 바뀌었다.
타오르는 붉은 하늘 아래, 눈앞에서 불꽃이 튀었다. 갑작스러운 장면에 놀라 뒷걸음질하는 순간, 누군가 나를 안고 물러났다.
“아펠리아 님! 괜찮으세요?”
“카, 카얀.”
나는 당황해 주변을 둘러봤다. 드넓은 언덕, 세계의 종말을 알리는 것 같은 붉은 하늘, 그리고…… 시신이 되어 뒹구는 수백, 아니. 수천 명의 군사들.
머리가 찡하게 아파 왔다. 반란, 반역 따위의 말이 머릿속에 휘몰아쳤다. 그리고 그것들의 무수한 충돌 끝에 남은 단어는, 실패. 그뿐이었다.
“아펠리아 님, 우선 피신해야 합니다. 어서!”
카얀은 이미 부상을 입고 힘겨워 보였다. 그는 내 손을 잡고 긴박하게 근처 숲으로 이끌었다.
나는 우거진 수풀 틈에서 카얀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아천타가 유일 신격체였던, 그가 군림하던 시대.
그리고 나는…… 아천타의 반려로서 그의 수명을 따라 몇백 년을 함께 산 존재.
그럼, 카얀은?
카얀은, 그런 아천타에게 맞서 반란을 도모한 반역자.
나는 왜 카얀과 함께하고 있는 거지?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기억의 회로가 빠르게 돌아갔다.
‘맞아, 내가 아천타의 약점을 알렸어……. 그를 반대하는 세력에 협조했고, 카얀은 그 세력의 주동자였어.’
걸음을 우뚝 멈추자 카얀이 돌아봤다.
“아펠리아 님, 왜 그러세요. 어디 다치셨어요?”
의식이 몽롱하게 흐려졌다. 나는 카얀이 잡은 내 손을 바라봤다.
타오르는 촛불의 심지가 싹둑, 잘려 나간다.
내가 아천타를 배신한 건가. 그래, 맞아. 내가 잘못한 거였어.
“아펠리아 님, 우선 저쪽으로……!”
“그만.”
뒤편에서 들린 낮은 목소리에 카얀이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수풀의 소리가 멈춘 것 같았다.
나는 반사적으로 흠칫하며 뒤돌아봤다.
차가운 배신감이 느껴지는 녹색 눈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펠리아. 정말로 그자와 뜻이 같은 건가?”
“…….”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입이 굳은 듯 떨어지지 않았다. 아천타는 분노가 여실히 느껴지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머리가 울렁거렸다. 마음 깊은 곳에서 뭔가가 나를 갉아먹는 것 같았다.
‘내가 죄를 지었어. 내가 해선 안 될 짓을 저지른 거야.’
이건 잘못되었어.
이건 잘못되었어.
그래 이건, 잘못되었어.
“아펠리아, 그대의 뜻이 그렇다면 나도 어쩔 수 없어. 널 부추긴 저 자를 처단하겠다.”
그는 결코 나를 죽이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천타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에서 묵직한 억압감을 주는 금빛의 창이 나타났고, 단 한 순간에 이곳으로 날아왔다.
궤적을 그리며 날아가는 창의 목표는 내가 아니다. 카얀이 있는 곳으로 날아가고 있다.
그 순간, 카얀이 내 손을 잡았다. 감싸 쥔 온기에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그가 나를 당겼다.
제 앞으로.
푹. 피부가 꿰뚫리는 소리가 섬뜩했다.
나는 발작적으로 호흡을 멈췄다. 끔찍한 통증이 느껴지는 등으로부터, 옷이 따뜻하게 젖어 드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지금 상황을 믿을 수가 없어 카얀을 바라봤다. 시선을 들기만 하면, 바로 앞에 있던 그가 보였다.
카얀이 내 손을 툭, 놓았다.
“카, 얀…….”
그리고 그는 나를 밀치고 뒤편의 수풀로 무작정 달려갔다.
나는 몸을 꿰뚫은 차가운 창보다도 마음이 더욱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을 느꼈다. 다친 몸과 마음 중 뭐가 더 아프고 피가 나는지 구분할 수 없었다.
‘그런 거였어. 카얀이 날 끌어당겨 미끼로 삼았어.’
그래서 내가 대신 죽었어.
아천타가 날 죽이려든 게 아니었다.
날 죽인 건, 카얀 노아르크였다.
* * *
이딜로스는 초조함에 몇 번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뜬 곳에는 미동도 없이 침대에 누워 있는 아릴이 보였다.
아천타가 떠나고, 아릴을 찾아 나선 그는 신궐의 깊숙한 개인 기도실에서 아릴을 발견했다. 그녀는 근처 의자에 기대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이딜로스는 아릴이 무사한 것을 보고 안심했다. 하지만, 그 잠이 일주일씩이나 이어질 줄은 몰랐다.
그가 신전에 돌아온 지 일주일째. 그 기간 동안 세간은 발칵 뒤집혔다. 신전에서 사제의 시신 여러 구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다행히 살아남은 신궐의 다른 사제들은 그 일에 대해 사실을 털어놓았지만, 사람들은 수인인 아릴이 제 성을 못 참고 벌인 일이라고 했다.
그녀는 이미 집단 처형을 강행한 적 있는 바. 그 이유조차 세간에는 그저 ‘수인의 심기를 거슬러서’ 정도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 의식조차 없는 아릴은 사람들의 반발과 규탄을 한 몸에 받았다.
‘……너도 피해자인데.’
이딜로스는 진실을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받아들인 이들에게 화가 났다.
사람들은 높은 위치에 있는 자는 그러한 피해에 휩싸일 거라고 쉽게 생각지 않는다. 다 같은 하늘 아래의 존재일 뿐인데.
아릴이 육체적 피해는 입지 못해도, 그들과 똑같이 아픔을 느끼고 마음의 상처도 생길 수 있는 것처럼.
“……아릴.”
이딜로스는 아릴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아천타가 네게 무슨 짓을 해서, 네가 영영 깨어나지 않게 되는 거라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난 어떡하면 좋을까.
그때, 아릴의 손끝이 움찔했다. 이딜로스가 황급히 아릴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릴?”
“…….”
그의 부름에 아릴은 눈가를 찡그리는 듯하더니, 곧 느릿하게 눈을 떴다. 이딜로스의 얼굴에 울 것 같은 안도가 피어올랐다.
“아릴, 깨어나서 다행이야…….”
아릴은 막 잠에서 깬 몽롱한 눈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간 아무런 표정 없이 그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손…… 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