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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66화 (156/191)

166화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마주한 그의 눈빛에 온몸이 꿰뚫리는 것 같았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거칠게 뛰었다.

두려움? 공포심? 불쾌감?

아니. 이건 대체 무슨 감정이지?

내 턱과 뺨을 억세게 움켜쥔 그가 날 내려다봤다. 점점 견디기 버거워지는 힘에 눈가가 절로 찡그려졌다.

“너, 네가 어떻게…….”

눈앞에 있는 건 틀림없이 아슐란이 맞다. 그와 너무나 닮았으니까. 냄새부터, 목소리, 모든 게 그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아천타이기도 했다. 늘 정확하던 내 직감이 그리 소리치고 있었다.

“왜, 이젠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아슐란……!”

“제대로 불러야지. 아천타라고.”

확인 사살을 가하는 그의 말에서 비릿한 웃음이 묻어났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신전에 오고부터 아슐란과 떨어진 적이 거의 없었다. 그를 의심하기 전까진 다른 누구보다 아슐란에게 의지했다.

그럼 난 가장 경계해야 할 이를 가장 가까이에 두고 있었던 건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머리가 새하얘지는 기분이다. 푸르고 창창한 숲이 갑자기 무더기로 떨어진 눈으로 뒤덮여 설원이 된다면, 그 충격과 벙벙함이 이런 기분일지 모르겠다.

“표정 한번 볼만하군. 배신감이라도 드나 봐?”

“너…… 넌 날 속였어! 네가 어떻게 이래?”

간헐적으로 헐떡이며 내지른 말에 아천타의 입매가 사납게 올라갔다.

“겨우 거짓말로 그러는군. 넌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도 모르고.”

“아, 윽…….”

아천타의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다. 억센 손아귀 힘에 고개를 내젓지도 못하고 겨우 인상만 찌푸렸다.

아천타는 느릿하게 내 얼굴을 훑었다. 그의 선명한 녹안이 지나간 자리 위로 오싹함에 경기를 일으키듯 솜털이 바짝 섰다.

거부감에 숨이 막히려 했다.

“궁금하지 않나? 너와 내가 왜 다시 마주쳐야 했는지.”

“그게 무슨…….”

“이게 다 매정하신 신 때문이거든. 네겐 참으로 안됐군.”

그의 엄지가 내 턱을 지나쳐 올라오더니 내 아랫입술을 무지막지한 힘으로 짓눌렀다.

“기회만 있다면 네년을 한 번 더 죽여 버리고 싶다고 수백 번도 넘게 생각했지.”

“…….”

“그런데 이렇게. 신께서 친히 내게 기회를 다 주셨지 않나. 그것도 하필,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기도록…….”

아천타가 눈썹을 일그러트리더니 웃음을 흘렸다. 포악함과 광기가 한 번에 느껴져 절로 뒷걸음질하게 만들었다.

“아펠리아. 그 바람에 끝까지 네가 내 모든 걸 망치게 생겼다.”

나는 힘을 견디지 못하고 얼굴을 움켜쥔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아천타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왜 자꾸만 나를 이전에도 만난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하지? 그리고, 왜 날 갑자기 아펠리아라고 부르는 거야.

아천타의 두 눈에 짙은 증오와 분노가 폭포수처럼 세차게 넘실대는 것이 보였다.

어떻게든 아천타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안간힘 써 가며 그의 손을 떨어트리려 했다.

하지만 그러한 내 노력은 더 세게 내 고개를 틀어쥐는 손길에 무용지물이 되었다. 턱뼈가 으스러질 것 같았다.

“너만 아니었어도 말이다!”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한 자 한 자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그러자 아천타의 두 눈에 정신 나간 듯한 웃음기가 어렸다. 생각이 긴박하게 돌아갔다.

‘지금 날 죽이려 하면 어떡하지? 나는 대항할 수 있나? 내게 반격할 수단이 있던가?’

아천타에겐 나를 죽일 확실한 수단이 있다. 굳이 아천타의 검을 회수해 갈 정도로 그의 힘이 내 상상보다 약할진 몰라도. 적어도 그는 수인을 죽일 방법을 안다.

아천타의 비늘에 수인은 상처를 입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그건 과거의 숱한 상처들을 통해 증명된 사실이다.

반면에 난 그를 죽일 방법을 모른다. 어림짐작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긴장한 채 아천타를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어떻게 하면…… 이 무도한 존재로부터 살 수 있지?

“처음부터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이거, 놔……. 그만해……!”

괴로움에 생리적으로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때, 마주친 아천타의 눈빛이 변했다.

그게 어떤 불길한 징조인지 몰라 눈을 질끈 감는 순간, 붙잡힌 고개가 홱 내팽개쳐졌다.

나는 신경질적인 힘에 못 이겨 넘어졌다. 멍이라도 든 것 같은 턱이 얼얼함에 덜덜 떨렸다.

‘드디어 풀려났어…….’

나는 두려움과 적개심이 뒤섞인 마음으로 고개를 쳐들어 아천타를 노려봤다.

그는 더없이 서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대체 목적이 뭐야.”

“그게 궁금한가?”

아천타가 내 앞까지 다가와 키를 낮췄다. 위험을 직감했지만, 물러날 틈이 없었다.

그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거짓말처럼 몸이 굳었다.

어느새 평정을 되찾은 듯, 아천타는 냉정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한 줌 쥐었다.

“그게 그리 알고 싶다면, 알려 주지.”

시선을 피할 수가 없다. 짙푸른 빛을 띠기 시작하는 아천타의 눈을 마주하자 점점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몸이 가라앉고, 마음이 붕 뜬다.

뭔가가 몸을 옭아매고 정신이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아천타의 손이 내 뺨을 살짝 감싸 쥐었다. 이번엔 가벼운 힘이었다. 그래서인가, 이상하게도 그의 손이 닿은 감촉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내게도 평생을 기약한 반려가 있었지. 연갈색의 머리칼에 맑은 푸른 눈을 가진, 사랑스럽고도 현명한 여자였다.”

아천타의 목소리가 점차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멀어졌다.

“그 여자의 이름이 뭔줄 아나?”

“뭔…… 데?”

“아펠리아. 감히 날 처단하려던, 내가 아주 사랑한 계집이었지.”

“아펠리아……?”

의식이 점멸하려 했다. 그리고 눈앞의 풍경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흐려지더니, 어느 순간 나는 처음 보는 곳에 주저앉아 있었다.

귓가로 나긋한 목소리가 속삭여 왔다.

“그래, 너야. 나를 이토록 버겁게 만들고 내 모든 것을 추락시킨 내 반려. 내가 얘기한 적 있듯이, 난 내 반려를 직접 해쳤지.”

눈앞에 무수한 별이 떨어지고, 그를 모두 집어삼킬 듯한 해가 강렬하게 타올랐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는 뒤에서 들린 부름에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아펠리아 님.”

돌아본 순간, 다시 한번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어째서 내 손에 죽어야만 했는지, 똑똑히 보도록 해라.”

느릿하게 흘러가는 목소리를 들으며 눈앞의 사람을 홀린 것처럼 바라봤다.

그러자 바로 앞까지 다가온 상대가 의아한 낯으로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펠리아 님? 왜 그러세요?”

“아…… 카얀.”

나는 몽롱함에 고개를 내저으며 정신을 차렸다.

아까까지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았는데, 잠시 졸기라도 했나?

그보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었지?

나는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카얀은 별을 부수어 담아낸 것 같은 눈을 살며시 휘며 웃었다.

“알고 있어요. 긴장감에 잠 못 이루신 거죠?”

“……내가 그랬어?”

그가 픽 웃음을 흘리더니 한 걸음 다가왔다. 코앞에 선 그는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곤 뺨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펠리아 님이 힘써 주신 만큼, 승리하는 건 저희가 될 테니까요.”

그리고 그는 떠오르는 해를 등지고 내게 아침 인사라도 하듯 입을 맞췄다. 황금색의 찬란한 그의 머리칼이 붉은빛으로 짙게 물들었다.

꼭, 타오르는 불이 번지는 모습 같았다.

* * *

거침없이 달리던 말이 투레질하며 멈췄다.

말에서 뛰어내린 이딜로스는 달려오는 동안 쏟아진 비에 흠뻑 젖은 로브를 벗어 던지곤 신전에 들어섰다.

황급히 주변을 둘러봤다. 지나가는 이 아무나 붙잡아 아릴이 어디에 있는지 물으려 했다.

그런데 북적여야 할 신전은 고요했다.

이딜로스는 오늘이 신전에 어떤 행사가 있던 날이던가, 그래서 단체로 신전을 비우기라도 한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신전의 높은 이들만 출입할 수 있는 신궐로 향했다.

이곳은 그 어떤 행사가 있어도 자리를 비우지 않는 노동의 현장이다. 그러니 어느 정도 인기척이 느껴져야 정상인데…… 이곳도 분위기는 같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이딜로스는 무작정 아무 곳이나 들어가 보려다가 걸음을 멈췄다.

뒤편에서 느릿한 발소리가 다가오고 있었다. 공기가 묵직해지는 듯한 섬뜩함을 느끼며 뒤돌아봤다.

“카델라로트 공. 오셨군요.”

아슐란이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두 눈에 힘을 주고 그를 보다가, 물러설 생각 없이 마주 다가갔다.

적당한 거리에서 멈춰 서자 아슐란은 반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군요. 그런데 아까부터 뭔가를 찾으시는 것처럼 급히 가시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아슐란이 순박하게 갸웃했다. 이딜로스는 말없이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이 자가 이미 신전에 왔다는 건, 그가 무슨 짓을 벌였다는 말이 된다. 그러니 신전에 아무도 없는 거겠지.

대답이 없는 이딜로스를 보던 아슐란이 탄식했다.

“아, 혹시 찾으시는 것이 이것입니까?”

아슐란이 손가락을 튕겼다. 그 순간 천장에서 뭔가가 훅 떨어져 대롱거렸다. 이딜로스는 놀라 숨을 들이켰다.

천장에 매달린 것으로부터 벌건 물이 뚝뚝 떨어졌다. 굳게 감겨져 있는 앳된 얼굴은 아주 익숙했다. 예닐이었다.

아슐란은 싱긋 웃으며 물었다.

“찾으시는 게 이게 맞습니까?”

“당신, 무슨 짓을……!”

“표정을 보니 이게 아닌 모양이군요. 그럼…… 여기 중엔 있습니까?”

다시 한번 아슐란이 손가락을 튕긴 순간, 천장에서 무더기로 축 처진 인영이 나타났다.

대롱거리는 발들을 본 이딜로스는 사색이 되었다.

반사적으로 뒷걸음질하자 아슐란이 소리를 내어 웃었다.

“왜 그러십니까? 찾으시는 게 없다고 하지는 않으시겠지요? 힘들게 꺼내 놨는데 말입니다.”

고작 몇 걸음뿐인 거리를 아슐란이 좁혀 왔다. 그가 다가올수록 안개가 걷히듯 녹색의 눈이 점차 선명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걸음이 멈췄을 때, 본래의 모습을 찾은 아슐란이 웃음을 띠었다. 밤보다 짙푸른 그의 머리칼이 흔들리다 멈췄다.

“설마 아릴 님을 찾으십니까?”

“……아릴은 어디 있지?”

아슐란은 그를 비웃기라도 하듯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말했다.

“미안하지만, 공. 이것 하나 명시하지요.”

“뭐지?”

“아릴 님은 제 것입니다. 처음부터, 죽어서까지. 그리고 당신은 제 것의 손에 죽게 될 겁니다.”

“뭐?”

“훔쳐선 안 될 것을 훔친 죄라고 해 두죠.”

이딜로스의 눈이 미심쩍게 커졌다. 눈앞의 이 존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아슐란은 이딜로스가 이해할 틈을 주지 않고 사납게 읊조렸다.

“그러게 주제를 알았어야지. 카얀 노아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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