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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65화 (155/191)

165화

이딜로스의 눈빛에 경악이 차올랐다.

황제는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그의 입가에 광기와 야망이 번들거리는 웃음이 피어올랐다.

이딜로스는 일대를 둘러봤다. 그 옆에 있던 황후와, 자신을 붙잡은 기사들, 그리고 뒤편에 서 있는 시종들까지도. 그들 모두가 똑같이 웃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이상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게 바로, 아천타의 지배를 받은 결과라는 것을.

그때, 황제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이딜로스의 어깨를 탁, 붙잡았다.

“마시거라, 어서. 너도 쓸모는 보이고 죽어야지 않겠느냐?”

“……이게 아천타의 뜻입니까? 폐하께 이러라고 명했습니까? 저와 마멜라를 괄시한 것도, 제 부모님을 살해한 것도?”

“그분을 모함하지 말거라!”

황제가 핏발이 설 정도로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이딜로스를 지켜보던 모두가 미소를 감췄다. 실로 공포스러운 순간이었다.

“이건 내 독단적인 행동이다. 그리고 너를 죽이지 않은 것 또한 그분의 뜻이기 때문이니 감사한 줄이나 알거라!”

침을 튀겨 가며 소리치는 황제를 보며, 이딜로스는 머리를 급히 굴렸다.

‘백부가 나를 죽이지 않는 게 아천타의 뜻이라고?’

이딜로스는 아릴이 말해 줬던 엘리네의 편지 내용 일부를 떠올렸다.

아천타가 사람을 세뇌할 때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삿된 감정을 끌어 올려 이성을 지배한다고 했던가.

황제가 이러는 것이 아천타가 지시한 게 아니라면, 아마 그가 제 감정에 못 이겨 독단적으로 내린 행동인 게 맞을 거다.

하지만 그 또한 결국, 모든 건 아천타의 세뇌 때문이지 않나?

이딜로스는 황제의 얼굴을 싸늘하게 노려봤다.

만약, 아천타가 없었다면. 당신은 내 부모님을 죽이지 않았을까. 나와 마멜라에게 그런 잔인한 행동들을 하지 않았을까.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이렇게 이성이 삼켜진 지금, 속마음 어딘가에는 제 행동을 후회하고 멈추고자 하는 의지가 아주 조금 정도는 있을까.

“……이 차만 마시면 됩니까?”

“그래. 너도 마음이 동하나 보구나. 비록 네 눈으로 보진 못하더라도, 생각해 보거라. 대륙 최강의 황제가 탄생하는 거다!”

이딜로스는 황제가 신나 떠드는 헛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제 왼팔을 붙잡고 있는 기사를 팔꿈치로 쳤다.

기사가 팔을 놓아주자 그는 찻잔을 잡았다. 그리고 차를 입가에 가져가려다 말고 미간을 찡그렸다.

“……제가 사레들려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겠죠.”

“그럴 리가 있나. 뭐가 문제인 거냐?”

“이쪽 팔도 좀 놓아주십시오.”

이딜로스가 제 오른팔을 붙잡고 있는 기사를 바라봤다. 황제가 번거롭게 한다며 혀를 찼다.

“도망갈 생각일랑 말거라.”

황제의 턱짓에 기사가 물러났다.

이딜로스는 그를 유심히 살폈다. 아천타에게 지배를 받고 있다고 해서 황제와 신민 사이의 위아래는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이성이 삼켜졌다 해도 자신의 위치는 잊지 않는단 건가.

황제가 정신이 이상할지언정 제 일만은 마땅히 잘해 내고 있는 것처럼.

“쭉 들이켜거라. 어서.”

계속되는 재촉에 이딜로스는 자포자기한 채 찻잔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아니, 자포자기한 척했다.

그리고 황제의 눈에 기쁨이 번지는 순간, 이딜로스는 왼편의 기사에게 차를 뿌렸다. 찻잔은 매섭게 날아가 황제의 머리를 가격했다.

왼편의 기사가 고통을 호소할 동안, 이딜로스는 눈앞에 보이는 포크를 집었다.

순식간에 포크는 황후의 눈 위로 향했고, 이딜로스는 그녀의 목덜미를 틀어쥐었다.

“다들 물러서십시오. 그러지 않으면 황후 폐하는 영영 눈을 잃게 되실 겁니다.”

기사들이 주춤했다. 황제도 당황한 듯 입을 뻐끔거렸다.

아무리 정신이 지배당한다 한들, 제 위치는 아는 법. 기사는 모셔야 할 자를, 그리고 남편은 제 아내를 알아보는 법이다.

황제의 형제였던 선대 카델라로트 공작은…… 예외였겠지만.

“이, 이게 무슨 짓이냐, 이딜로스! 감히, 감히 내게……. 당장 치우지 못해!”

“일전에 저와 마멜라에게 말씀하신 적 있지 않습니까? 부모를 닮아 못 배운 것들이라고. 당신 말마따나 못 배워서 이러는 것이니 유식한 폐하께서 이해 좀 해 주시지요.”

“이딜로스! 지금 네 행동에 황족을 시해하려 한 죄를 물을 수 있단 걸 알고 있는 게냐! 당장 그 손 떼지 못해!”

황제의 호통에 이딜로스는 비틀린 웃음을 흘렸다. 황제는 이미 황족을 살해한 적이 있는 자 아닌가?

이 제정신도 아닌 사람들에게……. 어쩌면 제 의지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게 지금껏 대체 무슨 수모를 당해 왔던 것인지. 새삼 기가 막혔다.

“정말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전 폐하의 뜻을 따를 생각이 없는데 억지로 강요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를 얌전히 보내 주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너, 이 고얀 것!”

“저를 보내 주시기 전까지 이 손을 떼지 않을 겁니다. 그게 싫으시다면 절 죽이시던지요.”

황제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는 황제의 권위를 가지고도, 제 뜻대로 자신 하나 죽이지 못한다.

꼭두각시이자 장기짝에 불과한 이 사람에게 나는 대체 뭘 이리도 많이 잃었나.

내가 가진 것들이 그토록 보잘것없었단 말인가?

이딜로스는 황후에게 포크를 겨눈 채 백모를 끌고 천천히 뒷걸음질해 문으로 향했다.

‘아니지. 이 세상에 보잘것없는 게 대체 뭐가 있지? 이렇게 만든 건, 다 이 모든 것들을 업신여긴 아천타인데.’

이딜로스는 포크를 쥔 손이 떨릴 정도로 힘을 주었다.

마침내 등 뒤에 문을 두었을 때, 이딜로스는 황제와 기사들을 둘러봤다. 그들은 긴장한 얼굴로 제대로 다가오지도 못하고 있었다.

“제가 달아나거든, 저를 따라오실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제가 자결하면 그 원인은 폐하이실 테니 말입니다.”

이딜로스는 그 상태로 문을 천천히 열었다. 그리고 문이 완전히 열린 순간, 황후를 밀치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경고를 남기긴 했지만, 상식 밖의 인간들이니 쫓아올지도 모른다.

이딜로스는 급하게 아무 펜과 종이를 챙겨 지하로 내려갔다. 그러면서 조금 전 황제와의 대화 중 걸렸던 부분을 떠올렸다.

그의 자식을 두고 아비고 어미고 죽어 혼자 남을 아이, 라고 칭했던 것을 말이다.

황제의 다른 말을 생각해 봤을 때, 아천타는 지금은 그를 죽일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아릴도 그도 죽는다. 황제의 말이 그 받침이 되어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아천타가 원하는 바일 것이다.

그 이유가 뭐든 간에, 아천타를 막아야 한다. 그리고 모든 일의 원흉이나 다름없는 그 존재를 없애야 한다.

‘아직 말하지 못했는데. 돌아가면 아릴에게 루다비토의 공주가 전한 사실을 꼭 알려야겠어.’

이딜로스는 구슬을 꺼내 지하를 밝혔다. 그리고 엘리네 헤르핀드를 보았던 곳까지 거침없이 향했다.

손쉽게 잠입에 성공한 그는 잠잠한 철장 안을 들여다봤다. 그사이 엘리네 헤르핀드는 잠들어 있었다.

이딜로스는 철장을 가볍게 두들겨 엘리네를 깨웠다. 소리에 눈뜬 엘리네는 잔뜩 경계심을 세웠다.

“접니다.”

“아…….”

그를 알아본 엘리네가 눈에 띄게 안도했다. 눈빛에 어린 두려움이 씻겨 나듯 줄어드는 게 보였다.

이딜로스는 지체 없이 말을 꺼냈다.

“종이와 펜을 가져왔습니다. 받으십시오.”

그는 품에 넣어 온 수첩과 펜을 꺼내어 엘리네에게 전달했다. 엘리네가 다급히 펜의 뚜껑을 여는 것을 보며 그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지금 당장은 당신을 구하는 게 어렵습니다.”

[알아요. 전 괜찮아요.]

엘리네는 망설임 없이 글자를 휘갈겨 이딜로스에게 보였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한 대답에 이딜로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곧 쫓기듯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야 했다.

“공녀에게 확인해야 할 게 있습니다. 아릴은 당신을 꽤 믿고 있으니 아는 대로 대답해 주십시오.”

[얼마든지요.]

이딜로스는 긴장감에 침을 삼키고서 물었다.

“……공녀, 아천타가 어떤 외양을 하고 있는지 압니까?”

이딜로스의 질문에 엘리네가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수첩을 넘겨 펜을 쥔 손을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엘리네가 수첩을 돌렸다. 이딜로스의 눈에 수첩을 빽빽이 채운 날린 필체가 고스란히 들어왔다.

[그는 검은색의 긴 머리칼과 녹색 눈을 가지고 있어요. 생김새가 수려하고 오만한 인상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는…….]

수첩이 비좁아 부자연스럽게 끊긴 글자를 보곤 이딜로스가 급히 말했다.

“그다음은?”

엘리네는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수첩을 한 장 넘겨 마저 펜을 휘갈겼다.

[신전에서 선량한 사제인 척을 하고 있어요.]

엘리네의 다음 메시지를 본 이딜로스는 실소를 터트렸다.

아슐란이 아천타가 맞았다.

정말로 이렇게 가까이. 그것도, 한동안 경계를 허물었던 상대라니.

이딜로스의 굳어 가는 얼굴을 보던 엘리네는 아직 할 말이 남은 듯 철장을 두들겼다.

“왜 그러는 겁니까?”

[공, 설마 지금 수인님이 혼자 신전에 계시나요?]

“그건 아니고, 신전의 사람들과…….”

이딜로스는 멈칫했다. 엘리네를 바라보자 그녀는 다음 말을 적어 보였다.

[지금 당장 돌아가세요. 황후 폐하께 전해 들어 아천타가 신전을 비웠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존재는 지난밤 이곳을 다녀갔어요. 그날 아주 분개한 채 제 혀를 자르고 떠났지요.]

엘리네가 거침없이 써 내려간 글자를 본 이딜로스는 잠시 멍해졌다.

아슐란은 장기간 신전을 비웠다. 그런데 어제 이곳을 들렀다가 갔다는 것은…… 아마 제 볼 일이 다 끝났다는 것.

그 말은 즉, 다시 신전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다.

* * *

“심심해…….”

나는 부쩍 차가워진 밤공기를 마시며 기도실로 향했다. 신격체만이 출입할 수 있는 그곳은 이딜로스가 없는 지금, 혼자 시간을 보내기 딱 좋았다.

기도실에 들어서기 전, 나는 주변을 둘러봤다. 지나치게 한산했다.

“경비를 맡은 이들은 다 어딜 갔지?”

이 시간에 기도실을 오는 것은 처음이긴 한데, 설마 늘 농땡이를 피우는 건가.

‘아침이 되면 지적해야겠네.’

늘 위엄 있는 태도를 유지하긴 했지만, 신전 사람들과는 꽤 친근하게 어울리는 탓에 그들이 날 생각만큼 겁내지 않는다는 게 문제였다.

‘호랑이 상사가 되는 법’ 같은 책을 읽어야 하나.

나는 한숨을 내쉬며 기도실로 들어갔다.

넓은 개인 기도실은 성스러운 신의 터전을 표상한 것처럼 새하얬다.

내 집에 온 것 같은 편안함을 느끼며 숨을 크게 들이마신 순간이었다. 기이한 위화감이 찾아들었다.

‘……뭐지?’

나는 숨을 죽이고 주변을 둘러봤다. 하지만 눈에 띄는 이상한 점은 없었다.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한 걸음 옮겼다.

그때, 눈앞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추자, 누군가가 균열의 틈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확인한 나는 그대로 굳었다.

긴 흑 비단 같은 머리칼과 녹색 눈을 가진 인간.

아니, 인간이…… 맞나? 인간이 아니라 저건…….

아슐란을 닮은 듯 닮지 않은, 눈이 멀 듯한 아름다움을 지닌 남자를 바라봤다. 그는 나붓한 움직임으로 내 앞에 섰다. 고혹한 장미색을 띤 그의 입이 느릿하게 움직였다.

“이 모습으로 마주하는 건 참으로 오랜만이지.”

“…….”

“이젠 숨길 필요가 없으니 좀 편하군.”

나는 숨을 짧게 삼키곤 한 발자국 뒷걸음질했다. 내 반응을 본 그가 고개를 모로 기울이더니 나를 지긋하게 바라봤다.

“이상하군. 수백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런 걸 일일이 알려 줘야 하나?”

“너…….”

방심한 순간, 그가 내 턱을 붙잡아 강제로 들어 올렸다. 도무지 인간의 것으로 느낄 수가 없는 선명한 녹색 눈과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환영해 줘야지, 아펠리아.”

무감하던 그의 낯에 살기 형형한 웃음이 어리는 것이 보였다.

“너 때문에 모든 걸 망친 부군이 눈앞에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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