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아천타의 목적
“……이딜로스, 방금 그거 들었어?”
“대신전 쪽에서 폭발 소리가 났지.”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다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그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소란스러움과 연기를 쫓아 도착한 곳은 대신전의 성물과 귀물을 보관하는 성전이었다.
주변을 둘러본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어디보다 잘 관리되고 보안이 철저한 성전의 천장이 반쯤 날아가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차라리 거기서 그쳤더라면 안심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전은 천장뿐 아니라, 여러 성물들까지도 폭발해 그 잔해가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나는 처참한 광경을 둘러보다가, 어느 한곳에 사제들이 모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웅성거리고 있는 그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무슨 일이지?”
“아, 아릴 님!”
“폭발음을 들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아는 자가 있나?”
“저희도 폭발음을 듣고 달려온 참입니다. 이곳을 지키던 성기사들 역시 갑작스럽게 폭발이 일어났다고만 할 뿐, 폭발을 일으킨 자는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 그들은 지금 어디 있지?”
“폭발에 부상을 입어 신전 내 치료소에서 치료 받고 있는 중입니다…….”
“……상태는 괜찮은가?”
“경상을 입은 자들도 있지만, 내부에서 지키고 있던 이들은 중경상을 입었습니다. 부상자의 수를 헤아려 보았으나 이곳을 지키던 인원과 같았습니다.”
“그래…….”
만약 이곳을 지키던 기사가 폭발을 일으키고 의도적으로 경상을 입어 부상자들 틈에 숨어들었다면, 그건 훌륭한 알리바이가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럴 가능성을 거의 배제했다.
왜냐면 이 정도 규모의 폭발을 일으킬 만한 범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아천타의 짓이군.”
마침 이딜로스가 중얼거렸다. 나는 동조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릴 님, 그보다 이곳을 좀 봐 주십시오!”
사제들 중 한 명이 말했다. 한곳에 모여 있던 사제들이 양측으로 갈라섰다. 나는 그들이 터 준 길을 지나갔다.
그리고, 사제들이 둘러싸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자마자, 걸음을 멈췄다.
“아천타의 검이 사라졌습니다!”
주변의 성물들은 마치 쓰레기라도 되는 양 부서져 굴러다니고 있는데, 오직 아천타의 검만이 온전한 모습 그대로 사라졌다. 폭발에 입은 잔해 하나 없이.
“……이건 무슨 생각인 건지.”
자기 것이니 이제 그만 찾아가겠다는 심보인가?
그 새까만 검 한 자루에 제법 강한 힘이 깃들어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니 다른 신격체인 수인에게 상처입힐 수 있는 거겠지.
하지만 그 정도의 힘은 아천타에게 새 발의 피도 되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걸 굳이 가져갔다?
나는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약한 모양이지? 이 정도의 힘도 회수해야 할 정도로.’
아천타가 천벌을 받을 때, 힘의 절반가량을 빼앗긴 것으로 알고 있다.
나머지 절반의 힘은, 신격체로서 목숨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이니 그만큼을 남겨 둔 것은 신의 자비였다.
아천타라면 쫓겨나고부터 지금까지 수백 년간 어떻게든 힘을 모을 것 같았는데, 그리 많이 모으지는 못했던 건가.
나는 난장판이 된 성전을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 성전은 할 수 있는 대로 정리를 마치고 부서진 성물은 제2 신전으로 보내도록 하라. 그곳에서 복원 작업을 진행할 테니.”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하고 성전을 나왔다. 함께 나온 이딜로스가 나를 멈춰 세웠다.
“아릴, 이야기할 게 있어.”
그가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는 걸 알아챈 나는 그를 데리고 한산한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일단 듣는 귀가 없는 곳으로 가자.”
우리는 다른 이들이 없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서로를 긴장 어린 눈으로 바라봤다.
아천타가 이렇게 직접적으로 큰 사건을 낸 것은 처음이었다. 이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징조이기도 했다.
이딜로스는 망설이는 눈빛으로 날 보다가 말했다.
“아릴, 삼 사제가 수상하지 않아?”
“지난번에도 그런 식으로 물었지.”
“응.”
“맞아. 수상해.”
나는 눈가를 살짝 좁혔다. 그것도 그냥 수상한 게 아니라 아주 수상하지.
이딜로스마저 그런 식으로 느꼈다면 아슐란이 이딜로스의 앞에서 의심 가는 행동을 보인 적이 있는 건가?
“아슐란이 아천타와 관련이 있는 게 분명해.”
“너도 그렇게 생각했군.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많아. 그 사람이 널 도와 네 목숨을 구해 준 것도, 널 해치는 데 방해가 될 나를 굳이 이곳에 머무르게 유도한 것도. 그뿐 아니라 삼 사제는 그간 너와 날 여러 번 도와주었지.”
“아슐란이 정말로 아천타와 연관이 있는 거라면, 분명히 아천타의 목적과 관련이 있는 행동만 하고 있을 거야.”
“아마 그렇겠지.”
나는 아슐란과 수없이 많이 나누었던 대화들 중에서 아천타에 관한 것들을 떠올렸다.
그간 아슐란은 아천타에 대해 아무렇지 않게 내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렇기에 더욱 그를 쉽게 의심할 수 없었던 것인데…….
“아슐란이 나한테 말한 적이 있어. 아천타의 목적은 복수일 거라고. 그리고 나를 죽이려는 거라고…….”
하지만 그게 맞는 걸까?
복수는 둘째 치더라도, 나를 죽이려는 게 맞는지부터가 의심이 간다.
이딜로스 역시 나와 같은 의문을 가진 것인지 진지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그런 거라면 삼 사제에겐 널 위협할 기회가 수없이 많았을 텐데. 또, 그걸 유도할 기회 역시 많았겠지. 하지만 그 사람은 처음부터 네가 죽지 않도록 막았지.”
“아천타에게 다른 목적이 있는 것 같아. 우리 생각이 맞다면, 아슐란도 그에 따르고 있는 것일 테고.”
이딜로스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뭔가 찜찜하다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아릴. 난 왠지 삼 사제가 그보다 좀 더…… 위험한 인물인 것 같은데.”
“응? 무슨 말이야, 그게?”
“……아릴, 넌 삼 사제가 정체를 숨긴 아천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어?”
* * *
이딜로스는 달리는 마차에서 글자가 휘갈겨진 종이를 만지작거렸다.
종이 속에는 엘리네 헤르핀드의 마지막 동선이 적혀 있었다. 그를 보던 이딜로스의 눈빛이 예리한 빛을 띠었다.
‘이상하군. 공녀가 아릴에게 잘못을 저지르고 근신과 외출 금지령을 받았을 때 분명 공작저로 돌아갔을 텐데.’
정보 길드를 통해 알아낸 엘리네의 동선은 바로 다음 날, 다시 황궁으로 향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날부터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쭉…….
‘이동 기록이 없군.’
이딜로스는 종이를 반으로 접어 코트 안에 넣고, 등받이에 등을 기대었다.
그는 아릴과의 대화를 상기했다.
<난 아직 잘 모르겠어. 그렇지만 네가 정말 그렇게 의심하고 있다면 더 자세히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아릴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러곤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짧은 탄성을 흘렸다.
<이딜로스, 혹시 최근에 엘리네를 본 적은 없어?>
이딜로스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엘리네 헤르핀드?>
<응. 엘리네가 날 바다로 밀쳤을 때. 그 애가 아천타를 알고 있단 걸 알게 됐거든. 그리고 날 꼭 구원자라도 발견한 눈으로 봤었지…….>
아릴은 그날을 떠올리는 듯 잠시 말이 없다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 후에 엘리네가 나한테 편지를 보냈어. 난 그때 황성이 아천타에게 지배받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이 자리에 오른 후에 엘리네를 찾으려고 해 봤는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거든.>
<…….>
<……이딜로스, 혹시 화났어?>
그의 낯을 살핀 아릴이 우물쭈물 물어왔다. 엘리네의 이름을 듣고 무심결에 인상을 구기고 있던 그는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삼 사제가 내게 해 준 말이 있어. 네가 헤르핀드 공녀의 편지를 받은 후에 내 곁을 떠났다고.>
<음, 계기가 된 부분은 있지? 아천타에게 화가 났으니까. 나와 너를 괴롭힌 걸로도 모자라서 다른 사람들까지 못살게 군다고 해서…….>
이딜로스는 조금 싫은 낯이었지만, 아릴이 뽀뽀하자 기분을 풀었다.
어찌 되었든, 지금 다시 아릴과 함께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 역시 언젠가는 아천타로 인해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것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그런데 삼 사제가 네가 그 편지를 받았단 사실을 어떻게 알지?>
<나한테 그 편지를 가져다준 게 아슐란이었어. 그땐 분명 누가 보내었는지까지는 모르는 것 같던데……. 맞아, 내가 엘리네한테서 편지가 왔다고 말했었어.>
그 순간, 아릴의 낯이 파리하게 질렸다. 아릴이 다급히 이딜로스의 손을 붙잡았다.
<이딜로스. 엘리네가 어디 있는지 알아봐 줄 수 있어?>
<그럴 수야 있지. 그런데 왜?>
<엘리네는 아천타와 직접 마주친 적이 있는 인간이야. 분명 아천타의 정체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고 있을 거야.>
아릴은 그에게 엘리네를 찾아 달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이미 믿었던 아슐란마저 믿을 수 없게 된 상황이 아닌가. 심지어 아슐란은 아릴의 가장 최측근에 있던 인물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은 그 누구도 쉽게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딜로스가 거기에 대해 말해 봤지만 아릴은 고개를 내저었다.
<엘리네는 왠지 적이 아닌 것 같아. 미안해. 이딜로스는 신중하게 임하는 걸 좋아할 텐데. 이건 그냥 내 직감이라서…….>
미안함이 어린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는 새삼 생각했다.
아릴이 정말 많이 성장했다고. 이전의 사고뭉치 아기 고양이의 막무가내 같은 면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딜로스는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그럴게. 네가 원한다면 난 뭐든지 해 줄 수 있어.>
이딜로스는 느릿하게 차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는 지금 엘리네 헤르핀드를 찾으려 황성으로 향하고 있다.
아릴을 혼자 두고 수도로 떠나는 것은 불안했다. 하지만 이건 그밖에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아슐란이 아천타의 수하 중 하나라면, 아천타는 여전히 신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고…….
아슐란이 아천타라면. 그건 더욱 신전 사람들을 함부로 믿을 수 없다는 것이 되고 만다.
‘떠나기 전에 입이라도 먼저 맞춰 달라고 하는 건데.’
이딜로스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아릴의 부탁을 들어주는 입장에서 그런 것 정도는 요구할 수 있었는데. 그냥 손만 흔들고 헤어진 게 못내 아쉽다.
“전하, 크로델리아 황성에 도착했습니다.”
마차가 멈추고, 마부가 문을 열어 주자 그는 웃음기를 감췄다.
‘엘리네 헤르핀드……. 이곳 지하 어딘가에 있는 게 분명해.’
지난번 아릴과 황성에 머물렀을 때, 그 이상 반응을 보였던 시종에게서 얻어 낸 힌트.
이딜로스는 느긋한 걸음으로 마차에서 내려 일대를 빠르게 훑었다.
황성 앞에서 기사 몇이 정원과 성문을 지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딜로스는 시종 겸 데리고 온 카델라로트의 마부에게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주고 말했다.
“지난번 방문 때는 빈손으로 왔으니, 오늘은 인근의 상점가에서 선물이라도 사갈까 싶구나. 산책도 할 겸 걸어서 다녀올 테니 폐하께 일러둬라.”
“예, 알겠습니다. 전하.”
이딜로스는 걸음을 옮기던 차에 성문을 지키는 기사들과 눈이 마주쳐 가볍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리고 그들을 유유히 지나쳐 기사들이 적은 반대편 성벽으로 향했다.
그가 황족이기에 내세울 수 있는 유일한 장점이 바로 황성의 지리에 빠삭하단 거였다. 오래되어 방치된 곳이나 개구멍 정도는 눈 감고도 찾아갈 정도로.
이딜로스는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는 성벽 옆의 오래된 다리 밑에 도달하고서 멈춰 섰다.
그의 앞에 그늘진 쪽문이 있었다.
이딜로스는 재차 머릿속을 정리했다.
엘리네 헤르핀드는 아릴에게 보낸 제 편지의 존재를 아슐란에게 들켰고, 자택에서의 근신 처분을 받은 바로 다음 날 황궁으로 붙잡혀 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곳 지하에 갇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