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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60화 (150/191)

160화

아릴은 나흘째가 되어서야 모습을 보였다.

끼니도 모두 거르고 방에서 대체 무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던 아릴은 다시 만났을 때 전에 없이 창백한 낯이었다.

이딜로스는 걱정스러움에 물었다.

“아릴 님, 정말 괜찮으신 겁니까? 안색이 안 좋으십니다.”

“난 괜찮으니 어서 출발하지. 지금 수도로 가야 늦지 않아.”

그녀는 솔레드로트에서 준비해 준 마차를 탔다. 그러는 중에도 아릴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숨을 헉헉대는 것은 예사에, 넋이 나간 듯한 멍한 눈으로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보다 못한 이딜로스가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안 되겠습니다. 아릴 님. 차라리 저에게 기대시는 건…….”

“손대지 마.”

아릴은 소스라치게 놀라더니 마차 모퉁이로 몸을 딱 붙였다. 꼭 사람을 처음 보고 경계하는 아기 고양이 같은 눈을 한 아릴이 말했다.

“피곤해서 이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그냥 내버려 둬.”

아무리 봐도 그런 게 아니었지만, 입술을 꽉 물고서 그를 바라보는 아릴의 표정이 너무 살벌해 이딜로스는 조용히 손을 내렸다.

아릴은 그를 잔뜩 경계하더니 한참이 지나서야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이딜로스는 염려 가득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설마 음식에 정말로 그 지저분한 게 묻어 있어서 탈이 난 건가?’

지난날 아릴이 먼저 음식의 기미를 본 게 떠올랐다. 이딜로스는 낯을 험악하게 구겼다.

왜 꼭 긴 이동을 해야 할 때였던 건지. 아니, 굳이 그런 점이 아니더라도 이딜로스는 진심으로 아천타를 소거하고 싶어졌다.

“아릴 님, 불편하시겠지만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그의 진심 어린 말에도 아릴은 아무런 대답을 주지 않았다.

수도에서 거리가 꽤 먼 도들로프를 거치지 않은 덕인지 황성까지는 비교적 금방이었다.

그러나 이동 시간 동안 아릴의 상태는 심해지면 더 심해졌지, 호전의 기미는 조금도 없었다.

거기다 어째선지 이딜로스가 부축이라도 해 주려고 하면 질겁하며 몇 걸음씩이나 떨어졌다.

“아릴 님.”

“됐어.”

황궁에 도착해 마차에서 내릴 때조차 에스코트를 거절당한 이딜로스는 허전함을 느끼며 손을 말아 쥐었다.

대신 그는 아릴의 곁에 나란히 서 황궁의 정문을 넘었다.

“고귀하신 수인을 뵙습니다.”

여러 줄로 정갈하게 선 이들이 허리를 숙였다.

이딜로스는 그들 중 맨 앞에 있던 황제 부부를 발견했다. 의외로 그들도 공손히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워낙 개념이 없어 아릴에게 무례하게 굴진 않을까 싶었는데, 위아래는 아나 보군.’

이딜로스는 그들을 예의 주시했다. 마침 아릴이 그들을 눈으로 훑다가 말했다.

“고개를 들라.”

안색이 창백함에도 여전히 위엄 있는 기개였다.

“먼 길을 와 주셨군요. 이번엔 우리 조카까지 함께해 주시다니. 왕가의 크나큰 영광입니다.”

황후 베르제나가 웃으며 황제의 팔을 붙잡고 다가왔다. 그들을 보자 이딜로스의 기분은 절로 구려졌다.

‘그러고 보니 삼 사제가 그런 말을 했었지. 황궁이 아천타의 지배를 받는다고…….’

이딜로스는 앞에 선 백부와 백모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그러나 달리 이상한 점은 없었다.

애초에 아천타의 정신 지배를 받는다는 건 막연히 전해 들은 게 다이지, 정작 그게 어떤 것인지는 제대로 알지 못했다.

이딜로스 역시 비슷한 경험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이딜로스가 그들에게서 이상한 점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을 때, 아릴은 능숙하게 그들의 환대를 받았다.

“오랜만이군. 그대들 식사는 했나?”

아릴의 물음에 황제, 가르덴은 살갑게 반응했다.

“아직입니다. 수인께서도 아직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면 저희와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괜찮네. 난 공과 식사할 예정인데, 공은 그대들을 껄끄러워할 것 같아서 말이지.”

“……예?”

아릴은 당황해 되묻는 황제를 보며 눈매를 살짝 샐그러트렸다. 그녀는 이딜로스에게 따라오라는 눈빛을 보내곤 황제를 지나쳐 느릿하게 걸어갔다.

“모르는 척하지 말지. 나를 바보로 아는 것도 아니고.”

“저기, 수인께서 무언가 오해를 하신 듯한데…….”

따라붙는 황후의 목소리에 아릴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황후는 그녀가 제 말에 귀라도 기울여 준 줄 알고 화색을 띠었다.

그러나 아릴은 서늘한 얼굴로 대뜸 말했다.

“사과는 했나?”

황제와 황후는 얼어붙었다. 아릴은 그들을 훑어본 후에 진저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지나쳐 갔다.

그 지적이 의미하는 바를 눈치챈 그는 나직하게 웃으며 그녀를 뒤따랐다.

그들은 궁에 남아 있던 시종에게 방을 안내받았다.

확인한 두 사람의 방은 나란히 붙어 있었다. 황궁에 올 때면 늘 같은 침방을 쓰곤 하던 이딜로스였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공작이 아닌 반려의 신분으로 와서 그런가.’

확실히 황제의 방에 비견될 수준의 호화로운 침소였다. 오래전의 기억에 사로잡힐 일이 없다는 것에 그는 안도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곳에서의 추억을 회상하기는 어려워졌으니 그건 조금 아쉬웠다.

그들은 아릴의 방에서 가벼운 식사를 했다. 먼저 제안한 건 그녀였다.

‘다시 식사하는 걸 보니, 드디어 기운을 차린 건가.’

하지만, 아릴은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음식의 절반 이상을 남겼다. 그녀는 처음보다도 더 혈색이 없었다.

아릴은 식기가 치워지는 걸 멍한 눈으로 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난 좀 쉬어야겠어.”

이딜로스는 파리하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곤 참지 못하고 말했다.

“아릴 님,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것 같은데 제가 간호해 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하지. 난…… 혼자가 편해. 이만 나가 봐.”

아릴의 기운 없는 목소리에는 약간의 할딱임도 섞여 있었다. 이딜로스는 조금 더 우겨 보려다 말고 일어섰다.

아픈 사람이 그러고 싶다는데 의견을 고집하는 건 몹쓸 짓 같았다.

아릴은 오한이 들기라도 하는지 두 팔을 감싸고 있었다.

“내가 부르는 일이 아니라면, 이번에도 절대 찾아오지 마.”

“……알겠습니다.”

이딜로스는 어서 나가라는 아릴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그녀의 방에서 거의 쫓겨나듯이 나왔다.

‘무슨 일인지 말이라도 해 주면 좋을 텐데. 묻는다고 알려 줄 것 같지도 않고.’

이딜로스는 한숨을 살짝 내쉬곤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그는 제 방문을 열려다가 멈칫했다.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엔 엘리네 헤르핀드가 황궁에 있지 않았던가?’

엘리네는 황후의 남동생인 헤르핀드 공작의 여식이다. 그 덕에 그녀는 어릴 때부터 황궁으로 자주 놀러 오곤 했다.

이딜로스도 한창 어릴 땐 부모님을 따라 황궁에 놀러 왔다가 엘리네를 종종 마주쳐서 알았다.

그때도 학자 유전자를 타고났기 때문인지, 개미가 어떻게 교배하는지, 음식엔 왜 곰팡이가 피는지 등. 굳이 알고 싶지도 않은 사실들을 나불대던 탓에 이딜로스는 어릴 때부터 엘리네를 싫어했다.

워낙 사사건건 정보를 방출해 대며 알은체하는 탓에 재수 없다는 쪽이 맞았다.

하지만 나이가 붙으며 황궁으로 찾아오는 것이 소홀해진 이딜로스와는 다르게, 엘리네는 어엿한 숙녀가 되고 성년을 치른 후까지도 황궁에 찾아와 장기간 머물렀다.

그리고 딱 이맘때, 황후가 편지로 엘리네가 궁에 머무르고 있다고 매번 알려 줘서 알고 있었다.

‘그 둘이 가족이 맞긴 한가 보군. 궁금하지도 않은 걸 굳이 알리는 점이 닮은 걸 보니…….’

이딜로스는 마침 저편을 지나가고 있던 시종을 불러왔다. 한달음에 그의 곁으로 온 시종은 마치 잘 짜인 인형처럼 웃었다.

“부르셨습니까?”

이딜로스는 그 시종에게서 묘한 인상을 받았지만, 그러려니 하며 물었다.

“혹시 헤르핀드 공녀가 지금 머무르고 있나?”

“아, 헤르핀드 공녀님은 지금 궁에 머무르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런가.”

“예. 수인님과 공작 전하께서 방문하시기 전에 이미 떠…….”

시종의 웃는 입가가 부자연스럽게 굳었다. 그건 갑작스러운 일이었다.

시종의 입가가 부들부들 떨리며 웃었다 말았다, 를 반복했다. 그러더니 이번엔 떠듬떠듬 이상한 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떠나, 떠, 떠나셨…….”

“뭐? 왜 그러지?”

“떠나시지, 않…… 여전, 지하…… 에, 아, 으, 으아악!”

갑자기 새된 비명을 지르는 탓에 이딜로스는 흠칫하며 물러섰다. 시종은 고개를 마구 저으며 두 손으로 귀를 팍팍 치기 시작했다.

이상한 점은 저 뒤편에 보이는 먼지떨이를 든 하녀도 똑같은 행동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이딜로스는 기괴한 광경에 섬뜩해져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짜증, 나……. 망할, 죽여 버릴…… 감히, 내…… 것을.”

띄엄띄엄 중얼거리는 시종의 목소리에는 알 수 없는 괴성이 섞여 있었다. 꼭 품고 있던 괴물과 동화라도 된 것 같은 모습에 이딜로스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 괴성은 그의 기억 속에서 들은 적이 있던 거였다.

까맣고 거대한 짐승. 부모님의 사지가 찢긴 날, 피비린내 속에서 섬뜩하게 울리던 낮은 울음소리.

소름 돋는 상황에 그는 뒷걸음질 쳤다.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를 아슐란의 말들. 그중 하나는 진짜였다.

황성이 아천타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

이딜로스는 애써 침착을 되찾고서 눈앞의 시종을 한 번, 그 너머에 보이는 하녀를 한 번 바라봤다. 아무리 봐도 똑같은 행동을 하며 같은 괴성을 내고 있었다.

‘공통점이라곤 지배받는다는 것밖에 없을 텐데. 그럼 지배의 주체에게 무슨 일이 생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는 고향에 가 봐야 할 것 같다며 급히 신전을 떠나던 아슐란을 떠올렸다.

‘삼 사제…….’

한참이나 이상한 모습을 보이던 그들은 얼마 후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꼭두각시처럼 웃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만약 이딜로스가 아무것도 몰랐을 때라면, 그저 이 사람이 어딘가 아프구나, 하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이 상황이 얼마나 위협적인지 알 수 있다.

이딜로스는 그들을 경계하며 급히 걸음을 돌렸다.

이 상황만큼은 아릴에게 알려야 한다.

저녁 무렵, 이딜로스는 아릴의 방문 앞에서 서성였다.

이 시간이 될 때까지 그는 이곳에서 망설이다 돌아가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아릴에게 당장 황궁의 상황을 알려야 할 것 같기는 한데, 그녀가 절대 찾아오지 말라고 경고를 하지 않았나.

‘이번에도 쓴소리를 들을지도 모를 일이고…….’

아릴이 그 전에 그를 찾아 줬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녀가 방을 나온 적이 한 번도 없으니 말이다.

이딜로스는 아릴에게 어떤 말을 듣게 될지 몰라 크게 심호흡한 후에 노크했다.

“아릴 님. 저입니다.”

“…….”

“꼭 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

“아릴 님?”

이딜로스가 재차 그녀를 불렀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잠들었나?’

이딜로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자리를 떴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얼음주머니와 딸기 맛 감기약을 들고 다시 돌아왔다.

‘아릴은 고양이일 때도 고뿔 증세가 온 적이 있었지.’

아주 잠깐 동안만, 아릴이 잠든 틈에 그녀를 간호해 주고 싶었다. 분명 싫어서 먹지 않고 버티고 있을 약도 몰래 입에 넣어 주고.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그는 방문을 열었다. 어둑한 방이 시야에 들어왔다.

커튼까지 꽁꽁 쳐 둔 것인지 너무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고양잇과인 아릴에게는 잘 보일지 몰라도, 이딜로스에게는 조금 힘들었다.

이딜로스는 빛이 새어 들어 아릴이 깨지 않도록 조용히 문을 닫고서 조심조심 발을 들였다.

‘앞이 너무 안 보이는데…….’

아릴이 힘겹게 내쉬는 숨소리가 이정표라도 되는 양, 그는 소리를 쫓아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러다 이딜로스는 반사적으로 걸음을 멈췄다.

바로 앞에서 푸른 한 쌍의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너무 놀라 온몸이 굳었다. 그 순간, 날카로운 맹수의 눈이 가늘어지더니 단숨에 이딜로스를 끌어당겼다.

순식간에 이딜로스의 등 뒤로 푹신한 이불이 와 닿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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