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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59화 (149/191)

159화

이딜로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여러 생각들과 불안감이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삼 사제가 아릴에게 거짓말을 할 때가 있다. 그저 선하게만 느껴지던 그가 실은 목적이 있어 그랬던 것이라면.

그리고 그가 만약, 친절한 척 정체를 숨기고 있던 아천타라면.

이딜로스는 아릴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걸 말해 보는 게 좋을까. 하지만, 그저 오해일 뿐이라면? 그의 잘못된 추측이 아릴에게 폐를 끼치게 될지도 모른다.

이딜로스는 입술을 적시고서 말했다.

“그럼…… 혹시 그에게서 이상한 점을 느끼신 적도 있으십니까?”

아릴은 타오르는 석양에 짙게 물드는 그를 보며 머리를 덮은 로브 자락을 뒤로 넘겼다.

새하얀 머리칼이 숨김없이 드러나자 단숨에 제 색을 잃고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아릴이 이딜로스에게 한 걸음 다가가 고개를 들었다. 이딜로스는 당황해 한 발을 뒤로 뺐다.

갑자기 다가온 아릴이 발돋움까지 해 코가 맞부딪힐 것 같은 거리였다.

“글쎄. 그런데 네 말을 듣고 보니 그런 생각이 들기는 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아릴이 내쉬는 간지러운 숨이 그의 입술을 스쳤다. 그녀는 최근의 모습답지 않게 평소보다 제 생각을 더욱 드러내고 있었다. 꼭 서로의 사이를 가로막은 벽을 허물기라도 한 것처럼.

위에서 내려다본 아릴의 눈은 노을의 색이 섞여 평소보다도 신비롭게 빛났다.

당장에 해맑게 눈가를 휘며 웃을 것 같았지만 그녀의 눈은 웃음기를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대신, 알 수 없는 진지한 열망과 긴장감이 가득했다.

아릴의 두 손이 이딜로스의 어깨로 내려앉았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이딜로스는 통나무처럼 굳었다. 아릴은 그를 다독이듯 손으로 어깨를 두 번 토닥였다.

아릴이 작게 속삭였다.

“차라리 내 의심이 진짜였으면 좋겠어.”

그리고 입술이 가볍게 맞닿았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온기가 그의 입술을 온전히 감쌌다. 꼭 이슬을 머금는 요정 같은 입맞춤이었다.

이딜로스는 이도 저도 못 한 채, 감긴 아릴의 눈꺼풀을 바라봤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해보다 충동이 먼저 들었다.

아릴을 끌어안아도 될까.

속으로 몇 번이고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결정을 내리기도 전에 아릴은 온기를 남기고서 떨어졌다.

이딜로스는 그녀의 긴 속눈썹이 서서히 걷혀 올라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릴의 얼굴은 보다 진지해져 있었다.

그에게서 손을 떼고 한 걸음 물러난 아릴이 중얼거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네.”

그 나직한 말은 쓸쓸한 웃음과 함께였다.

다음으로 아릴은 고개를 살짝 치켜들었다. 그녀는 평소의 오연하고도 무심한 태도를 되찾으며 말했다.

“충고 하나 할게. 너무 깊이 파고들려고 하지 마.”

“…….”

“그럼 이만 출발하지. 생각해 보니 굳이 마차를 끌 필요 없이, 말을 타고 이동하면 될 듯하군.”

다시 위엄 있는 신격체의 모습으로 돌아온 아릴은 그를 지나쳐 갔다. 마법처럼 잠시간 허물어졌던 벽은 다시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정신을 바로잡으며 아릴의 모습을 눈으로 좇았다. 그녀는 마차에 묶인 말을 풀어 주고 올라타는 중이었다.

그녀에게 아슐란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마음은 자취를 감췄다.

조금 전의 아릴의 행동으로 그는 어렴풋이 눈치챘다. 그녀 역시 많은 것에 의심을 품고 속으로 수십 번의 갈등을 겪고 있다. 그걸 말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방금 입을 맞춘 건, 아마 제 의심의 진위를 저울질하기 위함이겠지.

이딜로스는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그녀에게 다가갔다.

네가 품고 있는 것을 뭘까. 넌 대체 무엇을 의심하고 있기에 그런 행동을 했을까.

그 무엇도 쉽게 확신할 수 없는 기로에서, 이딜로스는 마음을 견고히 했다.

‘정확하지도 않은 사실은 아릴에게 혼란만 주게 될지도 모른다. 아천타의 일에는 심증이 아닌 확실한 증거가 필요해.’

이딜로스는 아릴의 옆에 있던 다른 말에 올라탔다. 그가 먼저 말했다.

“시간이 늦었습니다. 이만 가 보죠.”

아까의 당혹감과 의구심은 철저히 배제된 목소리였다. 아릴은 그를 물끄러미 보더니 먼저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러지.”

“모래바람이 심하니 모자는 다시 쓰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아까의 일은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은 채로, 그들은 셀리드를 떠났다.

* * *

늦은 밤, 이딜로스는 숙면에 좋은 따뜻한 캐모마일차가 담긴 찻주전자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그는 데워진 찻잔에 차를 부었다. 모락모락 희뿌연 김이 올라갔다.

“아릴 님께서 솔레드로트에서 머무르자고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딜로스는 맞은편에 앉아 있던 아릴에게 차를 내밀었다. 아릴은 따끈한 찻잔을 받으며 무심한 어투로 말했다.

“이 호텔의 주인인 그대가 있는데 누릴 건 누려야지.”

“…….”

아릴과 이딜로스는 나누어진 두 개의 방 사이에 만나기 쉬운 거실이 있는 객실을 빌렸다. 다름 아닌 아릴이 그렇게 하자고 한 거였다.

아릴은 옆에 두었던 지도를 당겨 오며 말했다.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계획이라면 도들로프로 가는 것 아닙니까?”

“아니. 우린 그곳엔 안 가. 거기에 간다는 건 눈속임일 뿐이지.”

이딜로스는 의문이 담긴 눈길을 보냈다. 아릴도 분명 그걸 느꼈을 테지만 그녀는 거기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해 주지 않았다.

그는 다시 아릴이 선을 긋고 있음을 느꼈다. 너무 깊이 파고들지 말라고 했던 그녀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는 의문을 저 멀리 치워 두고서 물었다.

“그럼 이제부터 무엇을 합니까?”

“우린 이곳에서 쉴 거야. 앞으로 나흘간.”

“네?”

“나흘은 도들로프에 들렀다가 수도로 출발하기까지의 대략적인 시간이지. 그 후에 황성으로 갈 계획이고.”

황궁에 간다는 말에 이딜로스의 표정이 반사적으로 어두워졌다. 그걸 알아차린 건지 아릴이 말했다.

“그곳에 들리는 건 하룻밤 투숙을 위한 것일 뿐이니 너무 신경 쓸 것 없어. 날 알아보는 이들이 많아 다른 곳에선 지낼 수가 없어서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지난 기록을 통해 확인한 바 있으니까요. 그간 여러 차례 황궁에 머무르셨던데……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도 뵌 적이 있으십니까?”

아주 당연한 물음이었다. 하지만 이딜로스는 조심스러움을 담아 진지하게 물었다.

아릴은 안연한 낯으로 대답했다.

“수차례 만났지.”

“…….”

“공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알겠군. 그들은 내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니 신경 쓰지 마.”

“알겠습니다.”

아릴은 차를 말끔히 비우고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잠옷 위에 걸치고 있던 숄을 아무렇지 않게 벗어 소파 위에 툭 내려 뒀다.

몸의 실루엣이 다 보이는 얇은 잠옷이 드러나자 이딜로스는 기겁했다.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머리 위에서 태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이만 자러 가지. 차는 잘 마셨어. 차 맛이 좋아 잠이 솔솔 오는군.”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그래. 공도 그러길 바라지.”

발걸음이 멀어졌다. 그리고 저편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이딜로스는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긴장이 확 풀리는 게 느껴졌다.

‘많이 변한 줄 알았더니, 조심성이 없는 건…….’

그러다 문득, 그녀의 마지막 말에 어렴풋이 웃음기가 묻어났다는 걸 깨달았다.

잠시 넋 놓고 있던 이딜로스가 입을 살짝 벌렸다. 설마 방금, 아릴이 장난친 건가?

그는 아릴이 떨구고 간 푸른색 숄을 바라봤다.

최근 들어 아릴의 저의를 알기 힘들어졌다고는 하지만, 어제오늘은 아무래도 사상 최고인 것 같다.

아침이 밝았다. 이딜로스는 그날 하루 동안 아릴과 세 끼의 식사를 모두 함께했다. 전부 아릴이 불러서였다.

그동안 아릴은 제법 이상한 모습을 보였다.

“잠깐. 내 것과 바꾸지.”

아릴은 자신이 한 입 먹은 스테이크를 아직 손도 대지 않은 이딜로스의 것과 멋대로 바꿨다.

식사 시중을 들기 위해 온 이들은 전부 내보내 버리고, 이딜로스가 마시려던 와인은 자신이 빼앗아 가 한 모금 마시곤 도로 돌려주기도 했다.

이딜로스는 와인 잔을 든 채로 그녀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먹지 않나?”

아릴이 지적하고서야 들고 있던 와인을 마셨다. 아릴이 한 모금 먹다 남기고 준 그 와인을 말이다.

‘꼭 독이 들었나 확인이라도 하는 것 같군.’

아릴이 자신의 과거에 찾아와 마구잡이로 먹을 것들을 쓸어 갔던 일이 생각났다.

그가 먹으려던 것들을 모조리 뺏어 가기에 그땐 그저 식탐이 강한 요정인가 보다, 생각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아천타의 흔적이 묻어 있는 것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던 이딜로스는 멈칫했다.

‘설마…… 지금 여기에도 그런 게 묻어 있나?’

보일 리 없다는 걸 알지만, 이딜로스는 눈을 게슴츠레 좁힌 채 음식들을 바라봤다. 갑자기 입맛이 뚝 떨어졌다.

‘내게 돌려준 걸 보면 괜찮다는 거겠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그는 슬쩍 포크를 내렸다. 그러곤 입을 헹구기 위해 물 잔을 입에 대려다가 왠지 모를 찜찜함에 다시 내려 두었다.

“왜 그래?”

“……아닙니다.”

이상한 데 꽂혀 식사는 망치게 되었지만. 그래도 아릴이 자신을 어느 정도 신경 써 주고 있다는 걸 알게 되어 그의 기분은 살짝 좋아졌다.

그다음 날도 아릴은 식사에 함께했다. 그런데 하룻밤 새 아릴의 안색은 확 어두워져 있었다.

“아릴 님, 어디 안 좋으십니까?”

“아니. 괜찮아.”

아릴은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듯 식사를 깨끗이 비우고서 돌아갔다.

하지만 점심때는 더 창백해진 낯으로 방에서 나오더니, 저녁때가 되었을 땐 식사를 아예 거절했다.

아릴이 어딘가 안 좋은 게 분명했다. 이딜로스는 망설임 끝에 따뜻한 차를 끓여 그녀의 방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섰다.

“아릴 님, 괜찮으십니까?”

“…….”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문 너머에서 희미하게 몰아쉬는 숨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이딜로스는 다시 한번 노크한 후에, 문고리를 잡으며 말했다.

“아릴 님. 제가 들어가 봐도…….”

“들어오지 마!”

“……네?”

날카로운 목소리에 이딜로스는 반사적으로 문고리를 놓았다.

잠시 후에 아릴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나한테 너무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리고 내가 부르기 전까진 찾아오지도 말고.”

아릴이 너무 완강한 나머지 그는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린다. 벽을 짚고 겨우 문가에 서 있던 아릴은 비로소 안도했다. 아릴은 문에 등을 기대고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하필이면 지금 나타날 게 뭔가.

어쩌면 피해 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망할 짐승 같으니…….”

눈을 질끈 감은 그녀의 입술 새로 힘겨운 신음이 새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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