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58화 (148/191)

158화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앞에 보이는 아이였다. 그걸 감안해도 원색적인 비난에 이딜로스의 미간은 찌푸려졌다.

그때 아릴이 이딜로스와 눈을 맞춰 왔다. 아릴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녀는 로브 자락 안으로 새하얀 머리칼을 더욱 감추며 마을 안으로 들어섰다.

이딜로스는 마을을 구석구석 돌아보는 아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뒤따른 호위들도 아까와 같은 상황이 처음은 아닌 듯, 별말이 없었다. 하지만 이딜로스와 느끼는 바는 같은 건지 하나같이 표정은 태연하지 못했다.

이딜로스는 찝찝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성기사들에게 물었다.

“아릴 님께서 이곳에서 비난받으신 일이 오늘이 처음이 아닙니까?”

그들은 이전 시찰에도 따라온 적 있던 기사들이었다. 우람한 덩치를 로브로 가린 성기사, 테이든이 말했다.

“네. 이곳은 수인에 대한 반감이 큰 지역 중 하나입니다.”

“반감이 크다고요? 그건 어째서입니까?”

일전에 신문을 뒤적거리며 아릴에 대한 민심이 마냥 좋지 못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여러 사람들이 집단 처형을 이행한 아릴에게 두려움을 느꼈고, 또 그로 인해 분노를 느끼는 이들 역시 분명히 존재했다.

하지만 그게 지역 전체가 수인에게 반감을 품는 이유가 되기에는 어딘가 애매한 감이 있었다. 소규모 집단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셀리드는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로 인해 지역적 특성이 무너진 곳입니다. 그로 인해 이곳 사람들의 삶도 변해 버렸지요.”

테이든이 주변을 둘러봤다. 이딜로스도 따라 둘러본 곳들엔 모래 먼지가 자욱이 쌓인 낡은 집들과 누더기 망토를 걸친 주민들이 있었다. 그들 대다수가 앙상한 나뭇가지 같은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이딜로스 역시 과거에 기부 이력이 많았기에 알고 있었다. 셀리드가 손에 꼽히는 빈민 지역이라는 걸 말이다.

하지만 신전의 후원을 거쳐 이곳으로 지원금이 넘어오는 만큼, 셀리드는 신앙심이 높은 지역이기도 했다.

“저분들은 신을 믿기 때문에 더욱 아릴 님을 원망하시는 겁니다. 신이 내린 신격체라면 이 극심한 가뭄 정도는 멈출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죠.”

“하지만 아릴 님께서도 그런 힘은 가지고 있지 않으십니다.”

옆에 있던 다른 성기사가 거들었다. 그의 이름은 쥬크. 검은색의 구불거리는 머리칼을 가진 훤칠한 기사였다.

그들의 말을 듣던 이딜로스의 시선이 아릴을 좇아갔다. 아릴은 마을의 어느 노부부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앞도 보이지 않을 만큼 모자를 푹 눌러 쓴 아릴의 모습을 보다가 말했다.

“그럼 이곳 사람들은 아릴 님이 그런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구제하지 않는다 여기고 있다는 거군요.”

“애석하게도 그렇습니다.”

“그럼 아릴 님은 왜 그 사실을…….”

“다들 이쪽으로 와 주시겠어요?”

아릴의 목소리가 이딜로스의 의문을 끊었다.

마을 사람들을 의식해서인지 아릴은 이딜로스와 기사들에게 경어를 쓰며 손짓했다.

아릴로부터 한 걸음 멀리 떨어져 있던 그들은 바로 그녀의 곁으로 갔다.

“이번에 함께 와 주신 분들이에요. 이쪽은 저와 같은 사제님이시고, 이 두 분은 기사님들입니다.”

아릴은 담담한 목소리로 이딜로스와 기사들을 차례로 소개했다. 여태껏 이곳을 사제의 신분으로 방문한 것 같았다.

아릴은 이딜로스의 옷자락을 살짝 건드리며 말했다.

“이곳의 이장님과 그 부인이세요.”

“아, 처음 뵙겠습니다.”

이딜로스는 평소 거래자를 대할 때처럼 무심코 악수를 청하려다 멈칫하곤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오…… 이렇게 신께서 사제님들을 보내 주셔서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조금이나마 나은 생활을 위해 이번에도 물자를 챙겨 왔습니다. 가구마다 전달해 드릴 테니 사람들을 모아 주시겠어요?”

“예, 그래야지요. 바로 사람들을 광장으로 모으겠습니다.”

이장은 곧바로 저편의 사람들에게로 향했다. 그들이 직접 마을을 돌며 나눠 준다면 편하겠지만, 가구의 수에 맞게 구호 물품을 가져왔기에 오차가 생겨선 안 되었다. 그러니 이장에게 맡기는 편이 나았다.

옆에서 남편이 서두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부인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아이고, 수인은 하지도 않는 일을 그보다 낮은 사제분들께서 다 하시고……. 본보기도 갖춰 있지 않은데 이렇게 미덕을 행하시니 정말 존경합니다.”

그러며 아릴의 손을 가져가 주름진 두 손으로 꼭 쥐었다. 아릴은 그저 침묵했다.

적어도 우리는 수인이 보내어서 왔다, 이 정도의 말은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딜로스는 답답한 심정이었지만 끝내는 아릴의 반응을 따랐다.

당사자인 아릴이 아무 생각 없이 그런 오해를 빚고 있을 리는 없었다.

아릴과 이딜로스는 일행과 함께 부인을 따라 광장으로 이동했다. 부인과 서서 잠시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뿐인데, 광장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을 지나쳐 맨 앞에 있던 이장의 옆으로 가 섰다. 신전에서 온 것을 알아본 이들이 환호했다.

“줄을 서 주시면 저희가 준비해 온 것들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아릴은 능숙하게 사람들을 이끌고 물건을 나눠 주었다. 이딜로스와 기사들은 옆에서 아릴을 도왔다.

엄청난 인원에 서 있는 것도 힘들게 느껴질 무렵, 물품을 받은 한 남자가 넙죽 허리를 숙였다.

건네받으며 드러난 손목이 안쓰러울 정도로 앙상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당연한 일을 하는 것이니 그리 감사 인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릴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러자 남자가 중얼거렸다.

“수인이란 분은 우릴 이렇게 버려두는데……. 신격체가 비 몇 번 내려 주면 사제님들도 이런 고생하지 않으셔도 되지 않습니까.”

아릴의 입매가 굳었다. 그녀를 흘긋 쳐다본 이딜로스는 아릴이 더 이상 조금도 웃고 있지 않다는 걸 알아봤다.

남자는 연이어 그 수인을 원망했다.

“분명 그 잘난 능력은 제 배 불리는 데만 쓰고 있겠지요. 이유 없이 선한 사람들을 죽이질 않나……. 사제님들도 그런 이기적인 분 밑에서 힘드시겠습니다. 수인이 언제 또 밑엣것들을 죽이려 들지 모르니 얼마나 무서우실지…….”

“……다른 분들이 기다리고 계시네요.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릴은 그를 돌려보냈다. 그러곤 아무렇지 않다는 듯 다시 다음 사람을 맞이했다.

이딜로스는 잇새를 물며 묵묵히 아릴을 돕는 것에 신경을 기울였다.

그러한 비난은 물품 전달이 끝나기까지 몇 번이고 더 있었다.

그럴 때마다 아릴은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채 그들을 돌려보냈다.

이딜로스는 결국 답답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아릴을 찾았다. 어느덧 광장엔 그 많던 사람들이 떠나고 없었다.

그는 뒷정리를 돕고 있는 기사들을 확인하곤 아릴에게 말했다.

“아릴 님, 여쭈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들에게 내가 수인인 걸 왜 밝히지 않았냐고?”

물품을 담아 온 상자를 정리하던 아릴이 무심하게 그를 바라봤다. 이딜로스는 입을 살짝 벌렸다.

“아직 말도 꺼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아셨습니까?”

“공의 표정이 눈에 훤하니까. 그게 그렇게 화날 일인가?”

말문이 막힌 이딜로스는 급히 제 표정을 점검했다. 내가 화난 얼굴을 하고 있었던가?

어쩐지 물품을 받으러 오는 사람마다 자신을 보곤 황급히 눈을 내리깔더라니. 그런 이유였던 건가.

아릴은 이상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곤 픽 웃었다. 그녀는 말했다.

“난 그들이 내 베풂을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게 아니야. 그들의 형편이 보다 나아지기를 바라는 거지.”

“……그래도 아릴 님이 직접 구제하러 왔다는 것을 알리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아릴은 고개를 내저었다.

“저들은 비를 내릴 수 있는 존재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거다. 하지만 가장 신에 가까운 수인마저 실은 그럴 능력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면, 절망하겠지.”

그녀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이딜로스는 잠자코 들었다.

“나를 비난해도 속으로는 언젠가 수인이 이곳을 구원해 주리라 희망을 품고 있는 사람들이야. 그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건 그 희망마저 사라지는 일이지 않나.”

“……그렇군요.”

아릴은 쓸쓸하게 웃었다.

“난 비도 내리지 못하는 무능한 신격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이곳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꼭 찾고 말거거든.”

이딜로스는 그 미소에서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는 따스한 의지를 엿봤다.

이딜로스는 그런 아릴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를 마주하고 있는 지금, 낯선 생경함과 묘한 간질거림에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이곳 정리는 이만하면 된 것 같군. 공, 이 상자들 좀 들어 주겠나?”

이딜로스는 대답 대신 아릴의 손에 들린 상자들을 가져갔다. 그리고,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마음속에 묵직하게 내려앉아 있던 말을 꺼냈다.

“……아릴 님이 무거운 짐을 짊어지셨다고 해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도 되는 건 아닙니다.”

아릴은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곧 미약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명심하지.”

이후 그들은 빠르게 철수를 마쳤다.

준비해 왔던 것들을 짐마차에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끝냈을 때, 아릴이 호위로 온 테이든과 쥬크를 불렀다.

“그대들은 이만 돌아가 줬으면 해. 내가 탔던 마차를 끌었던 마부와 뒤따른 다른 기사들도 데리고 가 줬으면 좋겠군. 여기서부턴 둘이서 이동하겠다.”

“예?”

성기사 둘이 동시에 되물었다. 옆에서 듣고 있던 이딜로스도 당황해 그녀를 바라봤다.

호위 기사들부터, 마차를 끌었던 마부까지 모두 짐마차에 태워 돌려보내겠다는 것 아닌가.

“다음 행선지가 도들로프인 건 알겠지. 그곳은 타지민에 대한 경계가 심하지. 그건 신전에서 온 사제라고 하더라도 변함이 없어. 그러니 최대한 소수로 가겠다.”

“아릴 님, 그래도 위험합니다. 가뜩이나 호위의 수도 현저히 줄었는데 저희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아릴이 이딜로스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공이 날 지킬 테니 괜찮아. 공의 실력은 내가 가장 잘 알지.”

그녀가 이딜로스와 눈을 한 번 마주쳤다. 이딜로스는 순간 넘칠 듯한 그리움과 반가움이 밀려드는 것을 느꼈다.

“그러니 저들 모두 데리고 돌아가 봐. 이건 수인으로서의 명이다.”

아릴이 의견을 굽히지 않자 결국 기사들은 돌아섰다. 아릴은 굳이 고집해 그들이 먼저 떠나는 모습까지 확인했다.

그리고 마침내 둘만 남은 가운데…… 이딜로스는 기분이 좋은 것과는 반대로 걱정이 들었다.

“아릴 님, 굳이 마부까지 돌려보내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걱정하지 마. 마차를 움직이는 번거로운 일은 내가 할 테니. 공에게 굳이 시키진 않을 거야.”

“어떻게 그럽니까. 그런 일은 제가 더 잘할 수 있습니다. 그보다는 너무 적은 수로 가는 게…….”

“이딜로스.”

그는 말을 멈췄다. 동시에 숨도 같이 멈췄다. 잘못 들은 걸까 싶어 멍하니 아릴을 바라봤다.

아릴은 홀린 듯한 그의 시선을 받으며 날카롭게 말했다.

“저들을 너무 믿지 마.”

그녀의 경고를 듣고서 이딜로스는 정신을 차렸다.

그는 현기증이 날 것 같은 머릿속으로 겨우 생각해 냈다.

“저들을 믿지 말라니요?”

저들은 아마 아릴이 손수 뽑은 이들일 터다. 이번 정행에 따라온 자들도 모두 이전에 아슐란이 짜 두었던 기록을 참고해 구성된 이들이고…….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이딜로스는 미간을 살짝 좁혔다. 뭔가가 미심쩍었다.

그는 망설임 끝에 조심히 말을 꺼냈다.

“아릴 님, 혹…… 삼 사제님을 믿지 않으십니까?”

줄곧 그로부터 비스듬히 서 있던 그녀가 그 말에 완전히 걸음을 틀어 이딜로스를 올려다봤다. 아릴의 푸른 눈이 그를 온전히 집어삼키는 순간이었다.

생각을 고르는 듯 잠시간 다물려 있던 그녀의 입이 열렸다.

“아슐란은 내게 거짓말을 종종하거든.”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