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시기라……. 영 짚이는 게 없는데.”
잘 준비를 마친 늦은 밤.
이딜로스는 신전의 행사 및 일정을 정리해 둔 달력을 뒤적였다.
아무리 찾아봐도 정행을 가기로 한 날에 겹치는 또 다른 일정은 없었다. 그 전후의 일정도 딱히 별다를 게 없고.
“그분이 뭔가를 잘못 말씀하신 건가.”
목욕 가운을 입은 채 소파에 기대어 있던 그는 들고 있던 일정표를 테이블 위에 내려 두었다.
‘그런 거라면 좋겠지만 좀 걸리는군.’
아릴의 곁엔 위험한 것들이 도사리고 있으니까. 이딜로스는 그녀를 지키기 위해 늘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내일 물어볼까.”
내일은 아릴과 만나 정행 계획을 다시 짚어 볼 예정이었다. 그때 아릴에게 물어보면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문제는 아릴이 그 물음을 사적인 의문으로 받아들이면 어쩌냐는 것인데.
이딜로스의 낯이 급격히 심각해졌다.
여태껏 아릴과의 만남은 모두, 그가 아주 공적으로 대하면서 성사된 것들이었다.
처음보다는 거리감이 많이 허물어졌다지만, 아릴과 그의 사이에는 여전히 벽이 존재했다. 그녀에게 이딜로스는 그저 함께 일하는 관계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의 질문은 괜찮지 않을까.
이딜로스는 마침내 결심하곤 잠자리에 들었다.
* * *
검소한 테이블을 두고 앉은 이딜로스는 준비해 온 명단을 꺼내었다.
“아릴 님께서 정해 두신 목적지에 대해서는 조사를 마쳤습니다. 소수 정예를 원하셨으니 호위는 일행으로 따를 성기사 둘, 그리고 멀리서 아릴 님을 엄호할 실력자 넷을 배치했습니다.”
아릴은 그걸 살피더니 침음을 살짝 흘렸다.
“이전 기록을 보았을 텐데. 호위로 따르는 이들을 꽤 줄였군. 이유가 있는가?”
아릴은 어리둥절한 낯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딜로스는 무심결에 그녀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녀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이딜로스는 예전의 아릴이 떠오르곤 했다.
아릴이 눈가를 살짝 찌푸리고서야 이딜로스는 아, 하고 탄식했다. 그는 정신을 차리고 한쪽 눈썹을 찡그리듯 웃었다.
“제가 최측근에서 아릴 님을 보호할 텐데요.”
“그러니까 공이, 일행에서 제외한 여러 성기사들을 합친 것보다 날 더 잘 지킬 수 있다는 건가?”
“아마 그들은 보장하지 못할 테지만, 전 할 수 있습니다. 아릴 님을 위해 제 목숨을 걸 수 있음을 말이죠.”
명단을 집어 들던 아릴의 손이 잠시간 멈칫했다.
“……열정이 과해.”
“제 마음이 커서 그렇습니다.”
이번에는 아릴의 눈빛이 굳었다. 그녀는 이딜로스를 살짝 째려보며 경고했다.
“그대의 위치를 잊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나에게 선 넘는 마음은 가지지 마.”
“전 그런 마음이라고 한 적 없습니다만.”
이딜로스가 여유롭게 웃었다. 그 미소에 아릴은 황당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이딜로스는 다시 한번 입꼬리를 피식 올리더니 시선을 살짝 내리며 말했다.
“그저 수인이신 분을 우러러보는 마음입니다.”
이딜로스는 쓸쓸한 심정을 억눌렀다.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사실은 아릴의 명확한 선에 속이 상했다.
이딜로스는 그 속마음을 숨긴 채, 유연하게 화제를 바꿨다. 그가 어제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그 주제로.
“그런데, 혹시 정행을 가는 기간 동안 제가 모르는 다른 일정이 있습니까?”
“일정? 그런 건 없는데. 그건 왜 묻지?”
“어제 행정 관리 부서의 사제님께 우연히 들었습니다. 정행을 가는 날이 어느 시기와 겹친다고.”
“…….”
이딜로스는 아릴의 얼굴이 묘하게 질리는 것을 보곤 급히 말했다.
“혹 제가 모르는 일인 거라면 알려 주십시오. 뭐든 도움이 되겠습니다.”
“그건 그대가 참견할 바 아니야.”
아릴이 날카롭게 일갈했다. 그러곤 더 이상 이야기하기 싫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끝내겠다. 정행은 그대가 올린 명단대로 하고, 우린 그날 보는 걸로 하지.”
“……알겠습니다.”
이딜로스는 아릴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뜨는 것을 바라봤다.
아직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정행을 가기 전까지 찾아오지 말라는 것과 다름없는 말을 남긴 그녀는 가차 없이 모습을 감췄다.
이딜로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아릴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침착하게 그녀의 반응을 떠올렸다.
‘……예민해. 뭔가가 있긴 한 모양이야.’
마음 같아선 더 캐묻고 싶다. 하지만 이미 떠난 아릴을 두고 그럴 수도 없거니와 붙잡았다간 정행조차 따라가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정도 물음에는 답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제법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나 보지.
이딜로스는 자조하며 그녀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절감을 느끼며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하기엔 반려란 자리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그가 하지 않으면 결국 아릴이 해야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건 이딜로스가 용납할 수 없었다.
‘타지에 가 있는 동안은 손볼 수 없으니 어느 정도 처리해 두고 가야겠군.’
그녀가 말해 주지 않는 그 시기에 대해선 차차 생각해 보기로 했다.
설령 아릴과 함께 떠나 있는 도중에 무슨 일이 생겨도, 그녀의 곁에는 늘 자신이 있을 테니 괜찮을 테니.
* * *
“…….”
거울 앞에 몇 분이고 서 있던 이딜로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거울에는 눈가를 잔뜩 구긴 준수한 모습의 그가 비쳤다.
루다비토의 사람들이 본다면 장미를 백만 개쯤 날렸을 미모지만, 이딜로스는 영 마음에 차지 않는 듯 음울하게 중얼거렸다.
“어제 늦게 자는 게 아니었는데.”
떠나기 전에 급하게 일을 마무리 짓느라고 오랜만에 과로를 한 게 문제였다. 오늘은 아릴을 보는 날인데…….
“진짜 왜 이렇게 생겼지.”
이딜로스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는 것을 끝으로 거울에서 눈길을 거뒀다.
이렇게 들여다봐봤자 창백한 낯에 생기가 가득해지는 일은 없었다.
대신 그는 깔끔히 내린 머리칼을 다시 한번 정리했다. 그러곤 정행용으로 입은 브라운 코트의 옷깃도 흐트러진 곳은 없는지 확인했다.
‘그래도 이만하면 못 볼 꼴은 아니겠지.’
이딜로스가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출발 시간보다 훨씬 이른 때였다.
이딜로스는 먼저 나와 마차를 점검 중이던 이들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고선 먼저 마차에 올랐다.
‘……피곤하군.’
폭신한 마차 의자에 몸을 기대자마자 눈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는 피로를 풀 요량으로 잠시 눈을 감은 채 생각했다.
이번 정행의 목적은 빈민가 시찰이다. 그렇기에 목적지 역시 번영한 도시로부터 외곽지에 위치한 여러 궁핍한 지역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머릿속으로 아릴이 짚었던 이동 경로를 그려 보다가 눈가를 살짝 좁혔다.
그녀가 고집한 경로는 빠른 길을 두고 굳이 수도를 거쳐 갔다. 뭐라 물어볼 틈도 없게 그녀가 곧바로 다음 본론으로 넘어갔기에 이딜로스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수인이 수도를 지나가는데 황궁에서 가만히 있을 리도 없고. 폐하를 뵙게 생겼군.’
그가 마지막으로 황궁에 방문한 것은 루다비토에서 크로델리아로 돌아온 날이었다. 그간 안 봐서 좋았는데, 또 보게 될 거라니.
2년 만에 돌아와 황제를 마주했던 일을 떠올리던 그는 미간을 설핏 구겼다.
이딜로스는 그날 대충 예의를 흉내 낸 인사만 남긴 채, 피곤하다는 핑계로 황제의 식사 요청도 거절하고 돌아갔다.
그 덕에 지긋지긋한 황궁에 오래 있지 않을 수…….
‘가만, 그때 폐하께서 나를 어떻게 대하셨지?’
평소와 조금 달랐던 것 같다. 하지만 워낙 황제의 앞에서 불량한 태도를 고수하던 그였기에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았더니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폐하께 예의 차리지 않아 후회되기는 또 처음이군.’
뭐, 그래 봤자 자신이 성공적으로 루다비토와의 우호 관계를 쌓고 온 것에 좋은 반응을 보인 게 다겠지만.
이딜로스는 그 이외에도 여러 생각을 이어 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잠들고 말았다.
피로를 줄이기 위해 눈을 감고 있던 것이 문제였다.
팔짱을 낀 채 한참을 꾸벅거리던 이딜로스의 고개가 어느 순간 옆으로 기울었다. 이대로면 창문에 머리를 부딪칠지도 모른다.
그러나 넘어가던 이딜로스의 고개는 누군가의 손에 저지되었다.
부드러운 손이 그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받쳤다. 이딜로스는 잠결에 그 손에 얼굴을 기대고서 살짝 뒤척였다.
그의 황금빛 머리칼이 상대방의 손에 얽혀 들었다.
“……부드러워.”
이딜로스에게로 인기척이 다가왔다. 잠시 머뭇거리던 손 주인은 큰 결심을 한 듯 받치고 있던 그의 얼굴을 살며시 어루만졌다.
고개를 따라 기울어진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 정리해 주고, 체온이 전해지는 따스한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럴 때마다 이딜로스의 코끝에 간지러운 무언가가 자꾸만 닿았다. 반복되는 간질거림에 이딜로스는 미간을 찡그리다가 눈을 스르륵 떴다.
몽롱함에 젖은 그의 시선은 지척에 있던 푸른 눈을 발견하고서 멈칫했다.
그의 앞에 허리를 살짝 굽히고 선 아릴이 있었다. 이딜로스의 눈이 놀라 커지는 것 못지않게 푸른색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릴은 이딜로스의 뺨에서 손을 홱 거두었다.
“아, 이건…….”
“…….”
“공이 졸고 있는 모습이 영 불안해서…….”
얼마나 당황한 건지 떠듬떠듬 애매하게 말을 내뱉던 아릴은 자신의 말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 눈을 했다.
이딜로스는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말했다. 아직 그의 뺨에는 아릴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제가 졸다가 벽에 부딪힐까 걱정되어 붙잡아 주셨단 거지요, 감사합니다.”
이딜로스가 덤덤히 감사 인사를 하자 아릴 역시 불필요한 표정을 감추고 맞은편의 자리에 앉았다.
“공도 참 유별나군. 아침 일찍 떠나야 하는 날을 앞두고서 늦게까지 일하다니.”
“그건 어찌 아셨습니까?”
“……전해 들었어.”
아릴은 차창을 통해 출발하라는 신호를 보내었다. 곧 마차가 움직였다.
이딜로스는 여전히 창밖을 보고 있는 아릴을 응시하다가 말했다.
“제가 일을 미루면 아릴 님이 하시게 될까 걱정되었습니다.”
아릴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로 돌아왔다. 이딜로스는 정행 계획을 정리했던 그날의 일을 떠올라 짤막하게 웃음만 흘렸다.
그는 곧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 * *
“가장 먼저 시찰하실 곳은 ‘셀리드’로군요.”
여섯 시간의 이동 끝에 도착한 마차는 어느 후미진 길에서 멈춰 섰다.
이딜로스는 먼저 내려 아릴의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러는 도중 갑작스레 모래바람이 불어닥쳐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수도로부터 동남부에 위치한 셀리드는 갑작스러운 일조량의 변화로 땅이 급격히 황폐해져 가뭄이 끊이질 않는 곳이었다.
그에 따라 다양한 자원의 공급처를 잃게 되면서 낙후되기 시작한 셀리드는 단 몇십 년 만에 열악한 빈민 지역이 되었다.
이딜로스는 바람이 그칠 때까지 아릴의 얼굴을 손으로 가려 줬다. 눈도 뜨기가 힘들었다.
그러다 바람이 겨우 멈췄을 때, 이딜로스가 말했다.
“바람이 심하군요. 햇볕도 뜨겁고.”
이딜로스는 뒤따른 호위 기사들로부터 로브를 건네받았다.
뜨거운 햇볕에 표정 관리도 못 하고 인상을 찡그린 그는 곧바로 로브를 아릴의 어깨에 둘러 끈을 꽉 매어 줬다.
그러곤 아릴에게 모자까지 푹 씌운 후에야 자신도 로브를 대충 뒤집어썼다. 그제야 그의 찡그린 미간이 풀어졌다.
“이제 가면 될 것 같습니다.”
이딜로스는 아릴이 또 선을 넘었다느니 토를 달기 전에 얼른 그녀를 이끌었다. 설마 옷 하나 입혀 준 거 가지고 뭐라 하겠냐마는.
그가 힐끔 옆을 보니, 다행히 아릴도 그걸 가지고 트집을 잡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다만 눈빛은 묘하게 생각이 많아 보였다.
대화 없이 걷다가 막 근처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이딜로스가 입을 열었다.
“아릴 님, 여기가 오늘 둘러보기로 한…….”
“수인은 개뿔! 그딴 괴물은 없어져야 해!”
날카로운 외침에 그들의 걸음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