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그는 아릴이 먼저 인사를 건넬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래서 멍하니 입만 벙긋거리다가 고장 난 정신을 붙잡고 서둘러 대답했다.
“전 언제 어디서든 잘 지냅니다.”
바보같이 대답한 그는 뒤늦게 후회했다. 좀 더 멋있게 말할 것이지.
하지만 후회에 시름하기도 전에 이딜로스는 대화를 이어 가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넌, 아니. 아릴 님께선……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자연스레 말을 짜내려니 머리가 빙빙 돌았다. 자신이 이토록 횡설수설할 수도 있다니.
“공의 그 말은 꼭 지난 2년간 잘 지내었냐고 묻는 것 같은데.”
“……느끼신 대로입니다. 이곳에 온 2년간 잘 지내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여기가 내 집인데 못 지내었을 리는 없지.”
아릴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 말속에 뼈 박힌 거리감에 이딜로스는 나지막이 웃음을 흘렸다.
고작해야 공작과 신격체 간의 사이. 그의 예상을 깨고 먼저 인사를 건넨 아릴이었지만, 기대와는 달리 그녀는 그러한 사이를 전제로 이딜로스를 대하고 있었다.
‘말없이 날 보자마자 떠나는 것보단 이편이 낫나.’
이딜로스는 마음을 다스리고서 말했다.
“아릴 님. 제가 정리해 올린 재계 장부는 확인해 보셨습니까? 조금 더 보기 편하도록 표기의 방식을 바꾸어 보았습니다.”
“……재계 장부?”
아릴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이딜로스가 갑자기 일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는 얼굴이었다.
사실 이 뜬금없는 일 얘기는 아릴을 떠나보내지 않을 최선의 방법이었다.
벌어진 이 거리감에 맞는 아주 공적인 이야기.
하지만 유일하게 그녀의 발목을 붙잡을 수 있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이딜로스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기존의 장부는 약 300년 전의 화폐 단위인 ‘마니크’를 사용하고 있더군요. 시대가 바뀌고 있으니 그에 대한 부분을 조정하는 것이 좋을 듯해 기존의 장부는 그대로 두되, 새롭게 현 화폐의 단위로 모든 값을 변환시킨 장부를 올렸습니다만……. 이렇게 직접 설명을 드리는 편이 제 입장에서도 편한데 찾아가는 족족 저를 돌려보내시더군요.”
마지막에는 진심을 담아 아릴을 책망했다. 업무에 비효율적이라는 말까지 덧붙이자 아릴의 표정이 묘해졌다.
“곧 있을 정행의 인원도 매년 삼 사제님께서 이맘때쯤 선발하신 기록을 참고해 제가 임의로 리스트를 작성해 두었습니다.”
“……음.”
“다른 이를 통해 전달하면 아릴 님이 이의를 표하실 때 제가 답할 수가 없으니 보류해 두었는데, 후에 직접 찾아뵈어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정행 중 아릴 님의 안위와 연관되는 중요한 건이니 이번엔 저를 돌려보내셔선 안 됩니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영락없는 보좌관이었다.
반려의 일 중에서도 수인의 보필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보좌관으로서의 역할이 아닌가.
이제는 조금 어리바리한 눈빛으로 이딜로스의 말을 듣던 아릴은 그가 대답을 재촉하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뵈러 가면 되겠습니까? 이 이상 미루는 건 시간적으로 좋지 못할 것 같습니다.”
본래 이딜로스의 성미대로라면 해야 할 일을 제시간 안에, 그도 모자라 훨씬 이르게 끝내는 게 맞다.
이딜로스는 일의 효율성을 일일이 짚어 주며 자신이 찾아갈 때마다 들이지 않았던 것을 계속해서 꾸짖었다.
졸지에 아릴은 별다른 대꾸도 하지 못한 채 이딜로스의 잔소리를 들었다. 결국 아릴은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이걸로 내일도 볼 수 있겠군.’
그녀의 답을 억지로 끌어낸 그가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아릴의 입장에선 일의 능률을 최대로 생각하는 이딜로스답다고 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이건, 자신을 공적인 상대로만 대하려고 하는 아릴에게 맞추기 위한 것일뿐.
‘네가 내게만 과하게 매몰찬 건 이유가 있어서겠지.’
이딜로스는 아릴이 자신에게만 유독 매정하게 군다는 것을 알았다.
남들과 똑같이 하듯 대한다면 아마 이딜로스는 그편이 더 속상했을 것이다. 적어도 이건, 아릴에게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증거니까.
이제껏 모든 일에 있어 밀어내는 쪽은 그였다면, 이제는 그가 다가갈 차례였다.
그것도 그녀가 밀어내는 만큼 아주 서서히 다가갈 요량이다.
“책을 멋대로 빌려 간 건 죄송합니다. 이렇게라도 해야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그랬습니다. 오늘 돌아가는 즉시 반납해 두겠습니다.”
“……그래.”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이딜로스는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하고서 등을 돌렸다.
“잠깐.”
미약한 힘이 옷자락을 쥐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잠시 숨을 삼켰다가 뒤돌아봤다.
나를 왜 붙잡은 거지.
지금이라도 그간 했던 말과 보였던 눈빛은 진심이 아니라고 해 줄까.
덩그러니 남기고 떠났던 그 편지의 진실을 알려 주려는 걸까.
왜 그랬는지, 왜 지금 이러고 있는지 모두 털어놓을 셈인 걸까.
시선이 마주치자 아릴은 흠칫하더니 불이라도 덴 듯 이딜로스의 옷자락에서 손을 뗐다. 마치 무심코 벌인 제 행동에 기겁하는 것 같았다.
이딜로스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물어볼 게 있는데……. 혹시 최근에 만난 이 중에 수상한 자가 있었나?”
“……수상한 자요.”
이딜로스는 진이 빠져 피식 웃었다.
자신이 떠올린 그 많은 추측과 기대 중에 맞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니.
그는 쓸쓸한 마음을 뒤로한 채 대답했다.
“없었습니다. 아릴 님이 지키시는 이곳에 수상한 자가 있을 리 없지 않겠습니까.”
“……그렇군.”
대답을 마친 후, 이딜로스는 문득 아슐란을 떠올렸다.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린 그는 아릴을 바라봤다.
아마 아슐란은 아릴이 가장 신뢰하고 있는 사제일 터. 그러니 사제들을 뒤엎었을 때도 아슐란 만큼은 여전히 곁에 두고 있는 걸 거다.
‘삼 사제가 수상하다는 말을 꺼내야 할까.’
섣불리 그러한 말을 꺼내기엔 아릴이 아슐란을 너무 믿는 것 같다는 게 걸렸다.
이딜로스가 고민하는 사이, 아릴이 말했다.
“그럼 최근에 자주 만났던 이들은 누가 있지?”
“……예닐 사제를 자주 만났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걸 묻는 것인지 여쭈어도 됩니까?”
만약 그녀 또한 주변에서 수상한 낌새를 느꼈기에 이런 걸 묻는 것이라면…….
“아무것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마. 나 먼저 가 보도록 하지.”
그러나 아릴은 그에게 깊은 사정은 알려 주지 않고 가 버렸다.
이딜로스는 또 먼저 떠나가 버린 아릴의 자취를 따라 문을 바라봤다.
요즘 들어 그는 아릴의 생각과 속마음이 절실하게 궁금했다.
* * *
“……예닐이었다니.”
오로지 신격체만의 공간.
청빈하면서도 우아한 신궐의 깊은 기도실에는 높은 천장에서부터 쏟아져 내리는 성수의 평온한 물소리가 가득했다.
떨어지는 성수가 이룬 신성한 못 앞을 서성이며 아릴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도실을 더욱 신비롭게 하는 물안개가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렸다.
아릴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이내 그녀는 형체도 없는 물안개를 친구 삼아 속삭였다.
“이딜로스의 냄새가 이상했어. 난 워낙 후각이 예민해서 그런 걸 잘 구분하는데…… 이딜로스인 줄 몰랐어.”
아릴은 물안개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었다.
닿기를 바란 것이지만 만져질 리가 없었다. 아릴은 쓸쓸한 웃음을 흘리며 손을 거두었다.
이야기를 들어 줄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런 짓을 벌일 존재는 아천타밖에 없지. 그러는 이유는 여전히 알 수 없지만, 예닐을 이용했나 봐. ……나도 알아. 내가 안일했어.”
아릴은 흰 옷자락을 끌며 성수의 못으로 다가갔다. 그 모습은 마치 여신을 형상화한 것 같았다.
“처음엔 못마땅했지만, 그래도 이딜로스가 내 손이 닿을 거리에 있으니까 나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주변으로 그가 오는 바람에, 더욱 아천타의 눈에 띄게 되고 말았다.
“큰일이지. 이딜로스를 내쳐야 하는 상황인데 더욱 곁에 둬야 하게 생겼어.”
아릴의 걸음이 멈췄다. 못을 내려 보던 그녀는 허리를 숙여 물속으로 손을 넣었다. 흰 손과 손목, 그리고 긴 소매가 모두 차가운 수면에 잠겼다.
그곳에서 그녀는 종이 하나를 집어 꺼냈다.
신비롭게도 물속에서 건져진 종이는 젖은 흔적이 없었다. 손과 부드러운 옷자락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시 꼿꼿이 허리를 편 아릴은 단정히 반으로 접힌 종이를 펼쳤다. 그녀의 눈이 익숙하게 종이 속의 글자를 좇았다.
낯익은 글씨체를 본 그녀의 눈동자는 금세 촉촉이 젖어 들었다. 이내 아릴은 힘없는 웃음을 피워 냈다.
네가 돌아오기 전까지는, 네가 여전히 날 사랑해 줘서 기뻤는데.
나를 간절히 찾는 이 편지가 마음 아팠지만, 그래도 이건 내 유일한 안식처였어.
편지를 쥔 아릴의 손에 미약한 힘이 실렸다.
오늘 말이야. 네가 날 사무적으로 대해서 슬펐어.
하지만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던 거야. 이대로 네가 내게 정이 떨어져 나를 사랑하지 않게 되었으면 좋겠어.
차라리 누구도 상처 받지 않게. 그리고 너만은 안전하도록.
“……이딜로스는 나와 함께하기엔 너무 위험하잖아. 그렇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가 날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텐데.
너를 완전히 내치거나, 혹은 완벽하게 지키거나…….
“너라면 어떻게 할까.”
네가 내 상황이 된다면, 그리고 내가 그 속에서 네가 된다면. 넌 그때도 날 온전히 사랑으로 끌어안아 줄 거야?
어떤 위험이 도사릴지 모르는 이곳에서 넌 나를 저 밖으로 밀쳐 내지 않고, 네 품에 담담히 가둘 수 있겠어?
나는……
무서워. 너를 잃는 게, 너를 사랑하는 만큼.
그리고 네가 나를 사랑해 주는 만큼.
* * *
“간밤은 무탈히 보내셨습니까, 아릴 님.”
“나야 늘 그렇지. 공은 어땠나?”
“아릴 님께서 잘 보내셨다면, 저도 그렇습니다.”
이딜로스와 아릴은 제법 친근하게 인사를 주고받았다.
지난번, 예닐의 계획으로 아릴과의 만남에 성공한 이후로 이딜로스는 일을 핑계로 매일같이 아릴의 얼굴을 볼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엔 이딜로스의 노력이 한몫한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요점은 이거였다.
중요한 일이 아니라면 내칠 것 같던 아릴이 그의 사소한 방문에도 지적을 하지 않았다는 것.
“공. 이것 좀 행정 관리부에 전하고 와 줘.”
“알겠습니다.”
여전히 아릴의 태도는 공적인 사이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이딜로스는 지금의 상황에 만족했고, 이 순간이 있기에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릴의 심부름으로 행정 관리부에 찾아간 그는 관리장을 맡은 사제에게 문서를 전달했다.
“오, 감사합니다. 이딜로스 님께서 노력해 주신 덕분에 오늘도 숨 쉴 틈이 있군요.”
사제가 정말 살 것 같다며 이딜로스의 능력에 칭찬을 퍼부었다.
이딜로스는 예의상 입매만 대충 올렸다. 본래 남에게 정을 잘 붙이지 않는 그였다.
하지만 이곳 사람들은 아릴이 뽑은 이들이기에 그나마 편히 대할 수 있는 거였다.
그가 기억하는 사고뭉치 고양이는 이제 현명하게 옳고 그름을 꿰뚫어 보는 대단한 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이틀 뒤면 아릴 님과 함께 정행을 나서시겠군요.”
“그렇습니다.”
이딜로스의 단정한 대답을 들은 사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심각한 낯을 했다.
“어허. 그러고 보니 하필 시기가 겹칠 듯한데……. 부디 아무 일 없기를 바라겠습니다.”
“시기요?”
“뭐, 엄연히 ‘반려’인 이딜로스 님께서 계신데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 허허…… 많이 바쁘실 테니 전 이만 방해하지 않고 가 보겠습니다.”
“아니, 잠깐…….”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사제는 제 말만 하고 가 버렸다. 이딜로스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어이없는 탄성을 터트렸다.
시기라니. 대체 뭘 말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