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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55화 (145/191)

155화

팔랑팔랑. 이딜로스는 창밖에서 불어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을 쐬며 책장을 넘겼다.

그의 눈은 책 속의 글자를 따라 움직이고 있었지만, 정작 머릿속은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쳤군. 이런 방법으로 만날 수 있을 리가 없는데.’

이딜로스는 한숨을 내쉬곤 읽던 책을 덮었다.

그는 옆에 쌓아 둔 책 여러 권을 챙겨 도서 대출을 맡은 사제에게 다가갔다.

“대출…… 하겠습니다.”

“아, 반려 님이시군요. 요즘 자주 도서관에 오신다고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이렇게는 처음 뵙는데 저녁에 오시는 건 처음이시죠?”

“……예.”

종알대며 반가움을 표하던 사제는 이딜로스가 건넨 책들을 받았다. 그러곤 대출 표시를 하기 위해 책의 표지를 보는데…….

“……?”

사제는 묘한 눈길로 이딜로스를 힐끔 쳐다봤다. 이딜로스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다.

남사스러운 제목에 분홍빛 표지를 뽐내는 로맨스 소설만 여섯 권을 가져왔으니 저런 반응을 보일 만도 하지…….

이딜로스는 창피해 죽을 것 같은 속을 감추곤 무표정을 유지했다.

신전에서도 높은 이들만 오가는 이 신궐에, 어쩐지 있어선 안 될 것 같은 이 로맨스 책들은 아릴이 직접 공수해 대량으로 넣어 둔 것이라고 했다.

앉게 된 자리가 변해도 취향은 그대로란 건지……. 어이가 없는 한편, 이딜로스는 그 모습이 반가웠다.

그러다, 조금 전 자신이 골라 온 책들의 제목을 떠올린 그는 반사적으로 표정을 살짝 구겼다.

아무리 그래도 역시 이건 좀…….

“어, 저기. 다 되었습니다만…….”

“아, 예. 고맙습니다.”

“2주 내로 반납해 주시면 됩니다.”

이딜로스는 사제가 밀어 준 책들을 받으며 급히 돌아섰다.

사제는 어리둥절한 눈으로 떠나는 이딜로스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아릴 님과 취향도 같으시군.’

사제가 책상 아래에 펼쳐 둔 도서로 시선을 내렸을 때였다. 분명 아까 떠났던 이딜로스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실례합니다, 사제님.”

이딜로스의 얼굴을 확인한 사제는 서둘러 책을 밀어 두고 안경을 추켜올렸다.

“네. 무슨 다른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제가 까먹고 부탁하지 못하였는데, 혹시 대출 명단에서 제 이름만 지워 주실 수 있습니까?”

“……아, 대출한 내역이 없도록 말입니까?”

본인 취향이 알려지기 싫은 건가. 조금 전 대출 표시를 하며 확인했던 책들의 제목을 떠올린 사제는 그럴 만하다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러나 이딜로스는 그게 아니라는 눈빛으로 말했다.

“아니요. 대출 내역은 남겨 두시되 대출자에서 제 이름만 지워 주십시오.”

“아, 딱 이름만요……? 네. 알겠습니다.”

신궐에서도 말단 사제 측에 속한 그는 수인의 반려 자리에 있는 이딜로스의 말에 반기를 들 수 없었다.

부탁하는 대로 대출자의 이름을 지운 사제는 이딜로스에게 직접 확인까지 받았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이딜로스는 품에 책을 안은 채로 도서관을 떠났다.

그는 책의 표지가 삐져나와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불상사가 없도록 꽁꽁 숨겨 가며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이게 뭐라고.”

도착하자마자 이딜로스는 이 흉물스러운 책들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고선 곧바로 거리를 두었다.

이상한 걸 본다며 마멜라를 꾸짖을 때나 눈길을 주곤 했던 책을 설마, 자신이 보는 눈도 많은 도서관에서 직접 빌려 오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아릴을 만나기 위한 구실로는…… 뭐. 솔직히 말해 어이없는 방법이긴 하다만, 그래도 물불을 가리지 않을 처지에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했다.

이렇게 같은 거처에 기거하면서도 아릴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는 게 제 처지가 아니던가.

이딜로스는 예닐이 진지하게 내놓은 말들을 떠올렸다.

<사실 제가 도서관을 자주 다녀서 아는데, 아릴 님은 로맨스 소설 애독자이시거든요. 구입해 둔 책은 꼭 이름순으로 읽으시고 완독한 후에는 새로 책을 들여오세요. 도서관에 있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거니까 오해하진 마시고요.>

아릴이 도서관을 자주 간다는 말에 그도 그곳에 가서 기다려 볼까 생각했지만, 예닐은 눈치 빠르게 그러지 말라고 소리쳤다.

<아릴 님은 어디든 이딜로스 님이 계신 곳을 피해 가시는데 설마 도서관에서 대기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실까요.>

예닐은 고개를 내젓고선 연갈색 눈을 열렬하게 빛냈다.

<저를 믿어 보세요! 실은 아릴 님이 들여놓으신 책이 여섯 권 남았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거든요. 아릴 님께선 일주일의 주기로 한 권을 빌려 가시니까 앞으로 한 달은 족히 넘는 기간의 분량이에요. 그러니까 이딜로스 님이 그 책들을…… 어, 절 왜 그렇게 쳐다보세요? 무, 무서운데요…….>

<아릴 님의 독서 주기까지 파악하고 계시다니. 아무리 자주 도서관을 다니신다지만 수상해서 말입니다.>

이딜로스는 경계심과 불쾌함을 눈빛에서 아낌없이 드러냈다. 그러자 예닐은 화들짝 놀라더니 서둘러 손사래를 쳤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허둥지둥 이딜로스의 의심을 부인하던 예닐은 한참을 횡설수설 말하기 시작했다.

그 덕에 이딜로스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예닐은 2년 전만 해도 빈곤 지역인 브라우니 로데칼에서 거리를 전전하는 아이였다.

천애 고아에 오갈 곳도, 먹을 것도 없던 예닐은 어느 겨울밤, 아릴에게 거둬져 신전에서 지내게 되었다.

<아릴 님은 그때부터 제가 신전에 적응하며 이것저것을 배울 동안 제게 책을 가져오는 시중을 시키셨어요. 아릴 님은 정말 다정한 분이세요. 이런 낯선 장소에서 받는 환대에 제가 겁먹을 거란 걸 알고, 제게 적당한 역할을 내어 주신 거였거든요. 제가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요.>

예닐의 눈이 우상이자 은인을 향한 따스한 고마움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딜로스는 조금 뭉글한 기분으로 예닐을 바라봤다.

‘……아릴이 그랬단 말이지.’

지난 2년간 그는 아릴에 대한 걱정만 해 왔다. 하지만 아릴은 이딜로스의 생각보다도 더 대견하게 잘 지내고 있었다.

<어, 눈매가 풀어지셨네요. 제 이야기가 좀 안타깝죠? 그래도 지금은 잘 지내고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아 잠깐. 그러고 보니 무슨 이야기 하다가 이렇게 됐지?>

예닐은 다시금 제가 열심히 생각했다던 작전을 말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딜로스가 아릴이 앞으로 보게 될 책을 모조리 빌리고 대출 명단에서 이름만 지우고 떠나야 한다.

그러면 아릴은 책을 빌리러 왔을 때 자신이 읽을 책들이 하나도 남지 않은 것을 보곤 책을 빌려 간 사람을 찾으려 할 것이다.

그때 ‘우연히’ 그 자리에 있을 예닐이 이딜로스의 이름을 숨기고 그 대출자가 특정 시간에 같은 장소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귀띔한다.

그렇게 아릴이 그 장소로 가도록 유도하고, 이딜로스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작전은 끝.

예닐이 의기양양하게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어때요, 굉장하죠?>

아주 평면적인 작전에 이딜로스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작전으로 아릴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하지만 이딜로스는 예닐의 열정과 기대감으로 빛나는 눈을 보고선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리하여 지금. 이딜로스는 여섯 권의 화려한 책을 멀찍이 떨어트려 두고서 상념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온갖 제목에 ‘사랑’이라는 단어가 아낌없이 들어가 있는 책들을 잠시간 쳐다봤다.

문득 아슐란으로부터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사랑할 수 없는 존재라.”

아슐란을 의심하고 있는 마당에, 그가 지난번에 꺼내었던 이야기를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도 알 수 없는데.

이딜로스는 소파에 등을 기대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언제나 그로 하여금 기적을 바라게 만드는 그녀였다.

처음 사람 모습인 그녀를 다시 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순간이나, 그녀가 제 마음과 같기를 바랐던 순간이나, 많은 것들이 뭉쳐 갈피도 잡을 수 없는 지금처럼.

“이번엔 만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 * *

이딜로스는 점심 무렵이 되어서 예닐이 알려 준 장소로 갔다. 햇살이 잘 들어오는 자그만 서고였다.

도서관에서 오래된 책을 보관하는 곳인 건지, 쏟아지는 햇살 새로 떠다니는 먼지들이 보였다.

정말로 예닐의 말대로 아릴을 마주칠 수 있게 된다면, 재회의 장소로는 너무나 볼품없었다.

사실 이딜로스는 그리 큰 기대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어찌나 철저한지, 그의 시야에 머리칼 한 톨도 내비치지 않는 게 그녀였다. 같은 거처이니 동선이 겹칠 만도 한데 말이다.

이딜로스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먼지가 부옇게 쌓인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봤다.

적어도 잠시간 기다리는 성의라도 보이자는, 예닐에 대한 예의였다.

‘따뜻한 창가 자리는 아릴이 좋아하곤 했던 것 같은데.’

실없는 회상을 하던 그때. 뒤편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딜로스는 그 소리에 별 기대 없이 뒤돌아봤다.

그 순간만 해도 예닐이 실패했다며 울상으로 찾아왔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이딜로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다른 이였다.

문으로부터 책장 두 개가량을 사이에 둔 창가에 서서, 이딜로스는 그만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굳었다.

설마, 정말로 이 작전이 통할 줄은 몰랐다.

기적은 정말로 일어났다.

여느 때처럼 사랑스러운 머리칼을 가진 아릴이 그가 있는 곳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책장 틈으로 언뜻 보이는 아릴의 예쁜 얼굴에는 잔뜩 성난 기가 서려 있었다.

꼭, 그가 기억하는 아릴의 모습 그대로.

아니, 그가 기억하는 아릴이 맞다. 틀림없이.

그러니 이대로면 그를 발견하곤 한달음에 달려와 품에 안겨야 했다. 이딜로스의 품에 얼굴을 비비곤 고개를 들어 해사하게 웃어야 했다.

그런데, 그가 기억하는 아릴이 맞는데…….

그에게 간지럽게 사랑을 속삭여야 할 아릴은 책장을 지나 이딜로스의 모습을 마주한 순간 우뚝 멈춰 섰다.

푸른빛을 머금은 눈이 살짝 커지는 듯하더니 곧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네가 왜…… 하지만 분명 냄새는…….”

띄엄띄엄 중얼거리던 아릴은 곧 입을 다물었다.

표정을 지운 얼굴에서 유일하게 느껴지는 것은 알 수 없는 예리함과 단호함이었다.

이딜로스는 그녀가 돌아서 떠나기 전에 성큼성큼 다가갔다.

지금 놓치면 언제 또 보게 될지 모른다. 그러니 이 기회는 놓쳐선 안 되었다.

“할 말이 있습니다, 아릴 님.”

마침내 그녀를 코앞에 둔 이딜로스는 아주 오랜만에 두근거리는 심정을 느꼈다. 그는 머릿속으로 생각을 빠르게 골랐다.

아릴이 등 돌리지 않을 만한 이야기는 하나뿐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이딜로스가 막 입을 연 순간이었다.

“오랜만이야, 공. 그간 잘 지내었나?”

예상을 깨고 아릴이 먼저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이딜로스는 하려던 말도 까맣게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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