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그게 무슨……?”
이딜로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릴이 타인을 사랑할 수 없다니.
그러나 아슐란이 장난을 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종종 사차원적인 면모를 보이곤 하던 아슐란이지만, 지금만큼은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신격체의 운명이란 필시 따라야 하는 법. 하지만 아릴 님은 공에게 각별한 마음을 가지고 계시지요. 이는 하늘을 배반하는 짓입니다.”
몇 마디 말에 너무나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이딜로스는 잠시 그 모든 걸 받아들이지 못하다가 한 문장씩 쪼개어 이해하기 시작했다.
아릴에겐 주어진 운명이 있고, 그게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아릴은 이딜로스를 사랑한다.
그리고 그건 일어나선 안 될 일이다. 하늘을 등지는 짓이므로.
“…….”
“신격체가 사명을 어기면 재앙이 따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럼, 그 때문에 아릴이 제 곁을 떠나고 선을 긋고 있다는 겁니까?”
“잘 이해하셨군요. 그리고 그 시발점은 아마 연락을 취했던 헤르핀드 공녀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무래도 그 때문에 공의 곁을 떠난 것 같아 보였으니까요.”
이딜로스는 미간을 좁혔다. 원래도 웃지 않으면 날카롭기만 한 인상이 더욱 예민해 보였다.
지금, 굳이 사람이 잘 들지도 않는 이 먼지 가득한 곳에 단둘이 와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가 하나뿐이었다.
“저더러 제 발로 나가라 말하고 싶으신 거겠군요.”
이딜로스의 날카로운 한마디에 아슐란의 표정이 풀어졌다. 긴 머리칼을 하나로 묶어 어깨 위로 늘어트리고 있던 아슐란은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왜 그리 생각하십니까?”
“아릴이 저에게 가지는 마음 때문에 재앙이 닥칠 수도 있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삼 사제님이시라면 평화를 위해서라도…….”
“하하.”
아슐란이 난데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오해입니다. 충분히 그럴 만했으니 설명이 부족했던 제 잘못이겠군요.”
“무슨 의미입니까?”
“전 공께 그러한 무례를 범할 생각이 없습니다.”
아슐란은 잠시 이딜로스를 바라보다가 뒤이어 말했다.
“사제들에게 마침 돌아온 공을 반려로 들이자고 부추긴 건 저입니다. 곤란하게 만들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이딜로스의 표정이 오묘하게 변했다.
아슐란의 고마운 그 말에 놀라거나 안도를 받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딘가 모를 이질적인 느낌이 들었다.
아슐란은 늘 과하게 친절하다. 지금도 그는 이딜로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
자신이 얻는 이득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저 목적 없는 친절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지?’
아니, 목적이 없는 게 맞긴 한 건가?
그의 경계심이 뾰족하게 반응했다.
아릴은 분명 2년 전에 신전의 사람들이 아천타에게 세뇌당하고 있다고 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신전에서 바뀌지 않은 인물은 단 한 명.
이딜로스는 아슐란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물었다.
“그 말은…… 재앙이 따르더라도 사제님은 상관이 없다, 이 말씀입니까?”
“이런, 왜 그렇게 생각하시는지요.”
이딜로스의 배배 꼬인 어투에 아슐란이 곤란한 얼굴을 했다.
늘 지어 보이는 웃음도 친절함에 난처함 한두 스푼을 추가한 모양새였다.
아슐란은 아릴에게 아무런 위협을 가하지도 않았다. 늘 한결같이 아릴에게 친절하기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딘가 이상하다.
이 위화감은 뭘까.
“전 그저 공을 그리워하는 아릴 님이 마음에 걸려 그런 것뿐입니다. 어쩌면 재앙이란 한시적인 위협이었던 것일지도…….”
그때 아슐란의 말이 부자연스럽게 끊어졌다. 반사적으로 호흡을 멈춘 것 같았다.
“……삼 사제님?”
이딜로스는 의미심장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방금까지는 아슐란에게 미약한 의심을 느낀 게 다라면. 지금은, 미처 담아내지 못할 위화감에 온몸에 소름이 다 돋았다.
한순간이었다. 장막이 걷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슐란의 얼굴이 다르게 보였다.
분명 같은 얼굴임에도, 더러운 거울을 수건으로 깨끗이 닦아 낸 것처럼 지극히 또렷하고도 강렬한 인상이 밀어닥쳤다.
너무나 선명해 충격적이기까지 한 아름다움이었다. 마치 인간이 아닌 다른 무언가 같은.
그래, 꼭 정신을 쏙 빼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아릴처럼…….
이딜로스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꼈다.
잠시 넋을 놓고 굳어 있는 듯했던 아슐란이 시선만 굴려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뭔가를 걷어 낸 것 같던 그 짧은 순간은 이미 지나간 후였다.
이딜로스는 태연한 척 물었다.
“괜찮으십니까?”
“아, 네. 갑자기 오한이 들어 대화를 끊어 버렸군요. 죄송합니다.”
아슐란은 어물쩍 웃었다. 이딜로스도 딱히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처럼 굴었다.
아슐란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좀 전의 사과와 달리 대화를 수습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내심 미안한 낯을 띤 아슐란이 말했다.
“카델라로트 공. 미안한 말이지만, 아무래도 제가 한동안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습니다.”
“꽤 갑작스러운 통보군요. 아까까지는 내일부터 사제님과 함께 실무를 보게 될 것이라 하셨는데요.”
아슐란은 머뭇거리는 기색으로 웃었다. 그는 여전히 순박하고 때때로 진지하며 사차원적이기도 한 대신관의 모습이었다.
“잠시간 고향으로 돌아가 보려고 합니다. 제가 신력을 타고난지라 조금 전에 안 좋은 예감을 받았습니다.”
“아…… 그러셨군요. 별일 없을 겁니다.”
“네, 그래야 할 텐데요. 내일부터 있을 공의 실무는 다른 분이 도우실 겁니다. 아, 그리고 몇 주 후면 아릴 님이 소수의 인원들과 정행을 나서실 텐데…… 제가 없으니 공께서 아릴 님의 최측근에 함께하시게 되겠군요.”
아슐란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동안에 있을 일들을 이딜로스에게 간추려서 전달했다. 이딜로스는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며 경청했다.
“그럼 이만 가 보도록 하지요.”
“잠시만요.”
“아, 혹시 질문이 있습니까?”
“예.”
“제가 배려가 부족했군요. 어떤 점이 궁금하신지요?”
아슐란은 인상 좋게 웃으며 대응했다. 이딜로스는 심오한 빛깔의 녹색 눈을 면밀히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슐란의 시선이 뒤따라 천천히 올라왔다. 아주 묘한 차이를 둔 눈높이는 아슐란 쪽이 조금 더 높았지만 서로를 마주한 시점에서는 비슷하게 느껴지기만 했다.
웃음을 띠고 있던 그가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이딜로스도 그를 따라 픽, 입매를 살짝 올렸다.
“실례지만, 사제님의 고향은 어디입니까?”
아슐란의 눈빛이 어리둥절해졌다. 그는 얼떨떨하게 입을 열었다.
“아…… 그런 걸 질문하실 줄은 몰랐습니다만. 제 고향은 북쪽에 있습니다.”
“북쪽이라면 혹시 에펜도르가 있는 곳입니까? 최근 여러 재난이 일어났다던데, 그 문제로 고향에 가 보시려는 모양이군요.”
아슐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지만 곧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남다르십니다. 눈치가 아주 빠르시군요.”
“제가 맞췄습니까? 마침 어제 에펜도르에서 눈사태가 일어났다는 신문을 보았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런데, 들려오는 말이 있더군요. 에펜도르의 악재가 도망친 아천타로부터 일어난다고요. 매번 몹시 속상하시겠습니다.”
이딜로스의 목소리에 격려가 묻어났다. 그는 안녕을 기원하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들었다.
신을 믿지도, 그렇다고 사람을 쉽게 믿지도 않는 그가 진심으로 남을 위로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상대가 아슐란이더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이딜로스가 그런 사람이란 건, 아슐란도 아주 잘 알았다.
아슐란의 입꼬리가 서서히 올라갔다. 마침내 또다시 미소를 걸친 아슐란이었지만, 이번엔 그의 눈만큼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이딜로스를 뚫어지게 직시하며 입을 열었다.
“……제 속상한 마음을 알아주시다니. 일전에 반려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말했던 건 철회하겠습니다. 제가 당신을 잘못 봤군요.”
이딜로스가 그를 마주 바라보자 아슐란은 변함없는 정중한 태도로 말을 붙였다.
“전 사안이 급해 이만 가 보려고 하는데, 함께 나가시겠습니까?”
“아니요. 먼저 가십시오. 전 이곳에 좀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아슐란은 짤막한 인사를 남긴 채 먼저 자리를 떴다.
이딜로스는 아슐란이 나선 문을 바라봤다.
희미하게 틔웠던 웃음기는 서늘하게 식어 있었다. 이딜로스는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에 목덜미를 살짝 쓸었다.
<아천타가 신에게 벌을 받고 쫓겨나 몸을 숨겼다는 신화 정도는 알겠지. 에펜도르가 바로 아천타가 숨어들었던 곳이다.>
언젠가 데비드가 한 말이었다.
이딜로스는 천천히 기억을 되짚으며 무언가를 찾고자 노력했다.
바로, 아슐란이 아천타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 * *
아슐란이 자리를 비우고, 본격적으로 실무에 들어선 이딜로스는 금세 새로운 자리에 적응했다.
척하면 척, 맡은 일을 넘어 다른 것들까지 술술 해결하는 그의 능력에 사제들은 기립 박수를 치고 나섰다.
“이딜로스 님은 반려의 적임자세요! 신전의 복잡한 업무도 어려움 없이 해내시니, 진짜 반려의 자리에 공만 한 분도 없을 겁니다.”
“그렇습니까?”
옆에서 쏟아지는 폭풍 칭찬을 듣던 이딜로스의 입꼬리는 슬며시 올라가 있었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딜로스보다 어린 예닐 사제는 이딜로스에 대한 오만 칭찬을 늘어놓았다.
그가 바로 아슐란 대신 이딜로스를 옆에서 돕기 시작한 사제였다.
한창 귀 아플 정도로 종알대던 예닐은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탄성을 흘렸다.
“그러고 보니 이딜로스 님이 이곳에 오신 지도 벌써 보름째네요. 아릴 님은 만나 보셨어요?”
그 말에 이딜로스의 웃음이 거짓말처럼 굳었다. 꽤 들떴던 기분은 대번에 가라앉았다.
그의 표정에서 대답을 눈치챈 예닐은 안타깝다는 눈초리로 이딜로스를 흘긋 바라보고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잇지 않았다. 이딜로스를 배려하는 거였다.
한참 만에 이딜로스가 먼저 말했다.
“……다른 사제분들은 무리 없이 만날 수 있다고 하셨지요.”
“네. 대신전에 행정 직무가 있는 사제들 중에서도 업무에 관련된 분들 한정이지만요.”
이딜로스의 낯은 다시 어둑해졌다. 이곳에서 가장 아릴과 업무적으로 접점이 많은 이가 바로 반려의 자리에 있는 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딜로스는 그간 단 한 번도 아릴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아릴이 일방적으로 그와의 만남을 모조리 거절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탓에 반려의 가장 주된 임무이자, 그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수인의 보필’ 부분은 전혀 수행할 수가 없었다.
“…….”
“에이, 기운 내세요!”
“예.”
“기운 내시라니까요?”
“……낸 겁니다.”
“거짓말. 지금 절 보는 눈빛이랑 대답이 엄청 딱딱하신데요? 원래는 아주 살짝 입꼬리가 올라가신다고요. 근데 지금은 아니잖아요. 이거 보세요!”
미친 듯한 조잘거림에 이딜로스는 소리 없이 한탄했다. 문득 스쳐 가는 생각이 이딜로스의 눈빛에 드러났다.
‘왜 매번 내 곁엔 이런 사람들만…….’
당찬 예닐은 서운해하지도 않고 한 손을 입가에 붙이며 속닥였다.
“그러지 말고 저 한번 믿어 보세요. 사실 제가 어제 열심히 씻다가 생각해 낸 게 있거든요. 틀림없이 아릴 님과 만나실 수 있어요.”
“……그게 뭡니까?”
이딜로스는 자존심 상하게도 솔깃했다. 연갈색 머리의 어린 사제가 비장한 눈으로 말했다.
“그 방법이 뭐냐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