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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53화 (143/191)

153화

아슐란은 아릴의 노기등등한 표정을 보다가 가슴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였다. 그의 높게 올려 묶은 긴 머리칼이 한쪽 어깨로 쏟아졌다.

“죄송합니다. 아릴 님께서 공을 그리워하시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어쩌면 이번에는 재앙이 닥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변명이라기엔 턱없이 부족한 핑곗거리였다. 아릴은 눈살을 살짝 찌푸려졌으나 곧 한숨을 내쉬었다.

아슐란은 고개를 조아리며 말을 덧붙였다.

“아릴 님을 위해 그런 것입니다. 화를 돋우게 만들었다면 죄송합니다.”

아릴은 아슐란을 잠시간 노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너도 생각이 있으니 그런 거겠지. 하지만 날 위한 일이더라도 이제부턴 독단적으로 행동하지 마.”

“네, 아릴 님. 명심하겠습니다.”

아슐란의 녹색 눈이 다정하게 휘어졌다.

그는 사실 알고 있었다. 아릴이 자신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것을.

그래서 어떤 잘못을 하더라도 쉽게 눈을 감아 주리란 것을 말이다.

‘오죽하면 네가 들인 인간들보다 나를 더 신뢰할까.’

아슐란은 그녀의 자비에 안도하는 척 생글생글 웃었다.

그때 어느 사제가 찾아와 말했다.

“카델라로트 공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아릴의 눈썹이 짧게 움칠했다. 아슐란은 그녀의 반응을 살피곤 카델라로트 공작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낮은 단을 올라 아릴이 앉은 자리 옆에 서자 그녀가 아슐란을 바라봤다. 그녀는 우뚝 서 있는 아슐란에게 키를 좀 낮춰 보라고 손짓했다.

“아슐란.”

“네.”

아슐란이 몸을 살짝 숙이자 아릴이 그를 올려다봤다. 아릴은 부쩍 가까운 거리에서도 아무렇지 않게 속삭였다.

“난 이딜로스에게 차갑게 굴 거야. 만약 같이 있는 것만으로 재앙이 닥치면…… 그땐 네가 알아서 해.”

퉁명스러운 말투였다. 간질거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를 들으며 아슐란은 아릴의 깜빡이는 속눈썹을 가만히 바라봤다.

베이비 파우더와 꽃 내음이 섞인 오묘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가만히 시선을 교차하던 아릴이 눈가를 설핏 좁혔다.

“왜 그렇게 봐?”

“……아닙니다. 아릴 님 말대로 하겠습니다.”

아슐란은 기분 나쁜 시큰거림을 느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얼마 후 이딜로스가 찾아왔다.

아릴과의 대면을 의식한 것인지 그의 차림새는 수인의 알현식 때보다도 정갈한 기품이 묻어났다.

그는 잠시간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아릴을 올려다보다가 예를 갖추었다. 한쪽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숙인 그가 인사했다.

“이딜로스 록센 카델라로트가 고귀하신 수인을 뵙습니다.”

이미 한 번 지적을 받은 탓에 이딜로스는 공대를 잊지 않았다. 그에 아릴만 찰나 간 손끝을 말아 쥐었다.

“고개를 들어도 좋다.”

마침내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한쪽은 뾰족한 창살 같은 눈빛인 반면, 다른 한쪽은 그것마저 부드럽게 감싸 안을 듯한 따스한 눈빛이었다.

아릴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냉담히 말했다.

“카델라로트 공작, 그대는 지금부터 임시 반려의 직위를 가지고 그에 맞는 직무를 이행해야 한다.”

“예. 결코 허투루 하지 않겠습니다.”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선 진중함이 담뿍 묻어났다.

아릴은 그에게서 조금도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앞으로 일주일간 삼 사제가 공의 교육을 맡을 거다. 자세한 이야기는 아슐란에게 듣도록 하라.”

아릴은 이만 용건이 끝났다는 듯, 등받이에 몸을 푹 기대었다. 조금 더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주고받을 수도 있었다.

이딜로스는 당연하게도 그걸 바랐다. 방금의 대화는 너무 짧지 않나.

하지만 아릴은 더 이상 대화할 생각이 없는 것처럼 오연하게 다리를 꼬았다. 개인적인 시간을 보낼 것이니 나가라는 뜻 같았다.

그때 눈치 좋게 아슐란이 끼어들었다.

“카델라로트 공. 임시이긴 하나 반려가 되신 것을 경하드립니다.”

방긋 웃은 아슐란이 박수를 쳤다. 엄연히 대신관보다 높은 대우를 받는 자리가 반려였다.

조용하던 신궐에 해맑은 박수 소리가 울리자 아릴은 눈총을 보냈다.

그에 아슐란이 흠칫하기를 한 번. 곧 풀이 죽어 손을 내렸다.

이딜로스는 언제나 조금씩 이상한 삼 사제를 쳐다봤다.

아슐란은 멋쩍게 웃고서 단에서 내려왔다.

“공께서는 일주일간 저와 여러 가지를 배우시게 될 겁니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이야기 나눌 것도 있으니 이만 가 보도록 하지요. 아릴 님께 인사드리겠습니까?”

잠자코 그들이 어서 가기를 바라고 있던 아릴은 멈칫했다. 아릴은 아슐란을 살짝 째려봤다.

그사이 나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릴 님, 제게 기회를 주셨으니 평생토록 곁에서 성심껏 모시겠습니다.”

“…….”

“……오래전에 약속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아릴이 시선을 돌리자마자 미약한 웃음을 걸친 이딜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꼭 그녀의 안위를 살피고 안도의 웃음을 띠는 것 같아 아릴은 굳었다.

일부러 매몰차게 대하고 대화도 삼가고 있는데, 왜 넌 이토록 실망하고 상처 받은 티조차 내질 않는 걸까.

제대로 된 이유도 적혀 있지 않은 짧은 편지만을 두고 떠나 이제는 남이 된 것처럼 굴고 있는데, 왜 화조차 내질 않는 거냐고.

아릴은 잇새를 세게 물었다. 그러다 곧 차분히 숨을 내쉬고서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이 냉소의 빛을 띠었다.

“공과 난 서로 알고 지냈던 사이지.”

네가 정을 떼지 못한다면 내가 정을 떨어트리는 수밖에.

이딜로스의 눈빛에 이채가 감돌았다. 그녀가 그 이야기를 해 준 것이 기쁜 듯 감격 어린 미소를 미약하게 피웠다.

“그렇다 해서 주제넘게 구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

아릴이 눈가를 좁혔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와의 관계가 불쾌하다는 얼굴을 하며 매정히 말했다.

“원한다면 언제든 다른 사람으로 교체할 수 있는 위치. 공은 딱 그뿐이니 과거의 연으로 임시라는 자리를 잊지 말라는 거다.”

그 순간만은 아슐란도 뭐라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아슐란이 애써 누그러트린 분위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아릴은 냉정하게 이딜로스를 쳐다봤고, 그 역시 그녀를 마주 올려다보고 있었으나…….

그는 곧 고개를 떨어트렸다.

아릴이 마지막으로 본 이딜로스의 얼굴은 여전히 미약한 웃음을 틔우고 있었으나 입꼬리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의 목소리로부터 아릴은 마침내 이딜로스가 상처 받았음을 눈치챘다.

그녀는 내색 않고 고개만 돌렸다.

두 사람을 난처하게 번갈아 보던 아슐란은 급히 이딜로스를 붙잡아 이끌었다.

“공은 저와 함께 이만 가 보실까요. 공께 인수인계해 드릴 것이 많습니다.”

“……예.”

아슐란은 이딜로스를 데리고 금세 알현실을 떠났다.

차가운 냉기만이 감도는 알현실에 홀로 남은 아릴은 내리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복잡한 생각이 오가는 낯이었다.

* * *

아슐란은 왕성의 본성만 한 널따란 신궐을 돌아다니며 이딜로스에게 곳곳을 소개했다.

그 역시 이딜로스가 임시 반려를 맡는 것에 동의를 표한 이였기 때문인지 제법 신난 걸음을 했다.

“이곳은 후원 자금의 관리가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후원을 보낸 곳의 명부와 후원금이 어디로 보내어지는지 상세히 기록하는 것 또한 이곳 재계 관리부의 일이지요. 후원금에 대한 환불을 요구하는 분들도 꽤 있으므로 늘 바쁜 곳입니다.”

이딜로스는 재계 관리부를 둘러봤다. 외부인은 출입할 수 없는 신궐의 주요 행정을 맡은 사제들은 흔히 신전에서 보던 이들과 사뭇 달랐다.

우선 차림새부터가 그러했고, 그들의 눈 밑 다크서클의 차이가 가장 컸다.

이딜로스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아챈 아슐란이 말했다.

“재계 쪽은 본래 반려께서 일정량을 맡아 하십니다. 지금은 아릴 님과 이곳의 분들이 분담해 처리하고 있지만요.”

“……반려의 일이 상당히 많군요.”

오늘로 닷새째. 그간 아슐란을 따라다니며 하나하나 보고 배운 것들을 추려 보던 이딜로스의 안색이 살짝 어둑해졌다.

아슐란은 위로의 말을 건넸다.

“한동안은 제가 도와드릴 테니 걱정 마시지요.”

“전 괜찮습니다만 반려의 일도 이렇게 많은데 수인이신 아릴 님은 괜찮으실지 염려되는군요.”

“…….”

아슐란은 말없이 미소 지었다. 그가 업무량 때문에 낯이 어두워졌다고 생각한 건 오산이었다.

애초에 일로 제 몸을 혹사하는 것이 익숙한 게 바로 카델라로트 공작이었다.

참으로 진득한 애정 공세이기도 하지.

“그러고 보니 이곳을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티 나지 않게 눈썹을 구겼다 푼 아슐란은 다른 이야기를 꺼내며 그를 이끌었다. 웬 유리 전시관의 앞이었다.

유리관 속에는 돌돌 말려 있는 두꺼운 종이가 보였다.

아슐란이 손으로 유리관을 짚자 신성한 빛이 피어나더니 말려 있던 종이가 펼쳐졌다.

[-역대 후원자 실적 순위-

1. 이딜로스 록센 카델라로트 (6,985,000,000 마니크)

2. 아시어 벨데어디프 (3,750,000,000 마니크)

3. 데일린 헤인레이 (3,200,000,000 마니크)…….]

이딜로스는 눈을 의심했다. 무슨 경기장 순위표처럼 3위까지에 오른 이름들에는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슐란이 옆에서 조잘거렸다.

“무려 부동의 1위이십니다. 매번 후원해 주실 때마다 한 마을의 땅값 정도는 되는 금액을 기부해 주시니 지난 300년간 변함이 없던 1위가 뒤바뀌었지요.”

“……2위에 있는 분이 300년 전 사람이라는 겁니까?”

“그럼요.”

“…….”

“보내 주신 후원금은 구제 활동에 감사히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매년 후원자분들께 소정의 선물을 드리는데 잘 받으셨습니까?”

“소정의 선물이요?”

“아, 공께서는 1위이시니 신전에서 감사의 마음을 담은 큰 기념품이 전달되었겠군요.”

그간 매년 신전의 이름으로 도착하던 알 수 없는 선물들을 떠올린 이딜로스는 살짝 어이가 없어졌다.

가장 최근에 받았던 건 신전의 건물을 본떠 만든 조각상이었다.

“그러니까 그게 기념품…… 이란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아슐란이 싱글벙글 웃었다. 이딜로스의 표정이 마뜩잖아졌다.

이딜로스는 무신론자다.

“……그것참 감사하군요. 여동생이 좋아했습니다.”

이딜로스의 싫은 티를 눈치챈 아슐란은 쿡쿡 웃었다. 그는 유리관에서 손을 떼며 은근하게 운을 띄웠다.

“이번 년도엔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아릴 님의 조각상을 보내 드릴 예정…….”

“언제 주시는 겁니까?”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아슐란은 재미있다는 듯 눈가를 휘었다.

“준비가 되면 안내해 드리지요.”

그들은 관리부 건물을 나왔다.

“반려가 맡는 업무는 여기까지입니다. 다소 여러 가지를 겸행해야 하니 처음에는 조금 난처하실 수 있습니다. 내일부터는 저와 함께 실무를 경험하시게 될 겁니다.”

드디어 대략적인 설명은 끝났다는 것인지 아슐란의 얼굴에도 빛이 돌았다.

“오늘은 공께 드릴 말씀이 있어 일찍 일을 마쳤습니다.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웬일로 웃음기를 걷어 낸 아슐란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이딜로스는 잠자코 그를 따라갔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신궐의 끝에 위치한 조그만 기도실이었다. 잘 쓰이지 않는 모양인지 창고처럼 먼지 쌓인 물건이 여럿 놓여 있었다.

이딜로스를 먼저 들여보내고 문을 닫은 아슐란은 어둑한 기도실에 뽀얀 먼지가 내려앉은 등을 켰다.

“하실 이야기가 무엇이길래 이런 곳으로 오십니까?”

“우선 여기 앉으십시오.”

아슐란은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탁자와 의자를 끌어와 이딜로스에게 자리를 내어 주곤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이렇게 지저분한 곳으로 모셔 죄송합니다. 하지만 감히 듣는 귀가 없는 곳은 이런 곳밖에 없어 말입니다.”

아슐란은 자그만 기도실에 놓인 신상을 바라봤다.

그의 말대로 이곳은 인적이 드물어 다른 이가 오가질 않았다.

설령 누군가 듣는다면, 그건 아마 신뿐일 테지.

아슐란이 다시금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그는 진중한 낯으로 입을 열었다.

“반려가 되신 이상, 공께서 꼭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아릴 님이 공을 멀리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관한 것입니다.”

“……이유라니요?”

이딜로스가 멈칫했다. 아슐란은 염려 깊은 눈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아릴 님께선 타인을 사랑하실 수 없습니다. 이곳의 백성들도, 카델라로트 공녀도, 그리고 공까지도. 모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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