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한바탕 사달이 난 것 같은 알현식이 끝나고, 아슐란은 사람들이 빠져나간 성전에 이딜로스를 불렀다.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선 다른 사제들이 이딜로스를 부담스러울 만치 쳐다보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애써 그 눈빛들을 무시하며 아슐란을 바라봤다.
“오랜만입니다, 공.”
아슐란은 예의 그 자애로운 미소로 이딜로스를 반겼다.
“예. 그간 잘 지내신 듯하시군요.”
이딜로스는 날 선 인사를 던졌다. 아슐란은 그의 매서운 얼굴을 보곤 난처하게 웃으며 물었다.
“제가 공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습니까?”
“2년 전에 아릴과 함께 사제님이 없어지셨을 때, 아릴이 납치당한 줄 알고 신고하려 했습니다.”
“아…….”
아슐란은 미안한 눈길을 보냈다.
“많이 걱정하셨을 마음 이해합니다. 저라도 연락을 남겼어야 했는데 아릴 님의 선택이 그러했기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아릴이 갑자기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인지 이유는 모르십니까? 혹 아천타가 관여되었다든가…….”
아슐란은 조용히 미소 지었다. 하지만 눈빛은 어쩐지 서늘해 웃는 얼굴과 묘한 괴리감을 자아냈다.
“사실 일전에 아릴 님과 함께 있을 때, 헤르핀드 공녀로부터 편지를 받으시는 걸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아릴 님께 전해 듣기론 황성이 아천타에게 지배받는 듯하다고 했었지요.”
“지배받는다니요?”
아슐란은 뒤편의 사제들을 의식하는 듯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제가 이곳에서 드릴 수 있는 이야기는 황성과 사이가 긴밀하다고 알려진 헤르핀드 공녀가 아릴 님께 연락을 취했다는 것입니다.”
힌트를 얻은 그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엘리네 헤르핀드는 아릴에게 위협적으로 군 적이 있던 여자였다.
그 여자에게까지 아천타의 손이 뻗어 있을 확률이 컸고, 아릴이 그녀로부터 편지를 받았다면…… 그 편지가 아릴에게 영향을 준 것일까.
그를 관찰하던 아슐란은 원래대로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제부터 공께선 반려로서 승계받을 일이 많습니다. 본래라면 수인의 반려가 해야 할 일을 지금은 사제들이 맡아 하고 있지요.”
뒤편의 사제들이 다시금 눈을 빛냈다. 이딜로스는 저 반응이 제 일거리를 줄여 줄 구세주를 향한 눈빛이었음을 그제야 알아챘다.
“우선 공께서도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 있으실 테니 준비를 마치면 대신전으로 와 주십시오. 반려는 본래 수인과 같은 신궐에서 지내니 간단한 짐도 챙겨 오시면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이딜로스는 조금 복잡해진 심경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아슐란과 다른 사제들에게 정중히 인사를 남긴 채 뒤돌아 성전을 벗어났다.
이딜로스는 곰곰이 상념에 잠겼다.
‘……괜찮을지 모르겠군.’
아릴의 곁에 있을 수 있고, 그녀를 지킬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겠지만 현재 신전의 상황을 모르는 그로서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무엇보다도 못 본 새 변한 아릴의 태도가 가장 걸렸다.
‘아릴이 변하게 된 건 엘리네 헤르핀드의 탓인가.’
신전 옆에서 대기 중이던 카델라로트의 마차가 보였다.
이딜로스는 성전을 떠나던 아릴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차로 다가갔다. 그때 언뜻 보였던 아릴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가 그녀의 곁에 남기 위해 저지른 행동이 아릴에게는 스트레스가 되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편지…….’
이딜로스는 마차의 문을 잡으며 시선을 내렸다. 아릴의 속을 알 수가 없어 눈앞이 잠시 암담해졌다.
이토록 내게 상처 입혀 네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뭐길래, 아릴.
넌 결코 이유 없이 이러지는 않잖아.
“전하!”
멍하니 붙잡고만 있던 마차의 문이 벌컥 열렸다.
이딜로스가 흠칫하는 순간, 안셀이 막무가내로 그를 당겨 마차에 앉혔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러신 겁니까. 카델라로트가 뒷전이 되다니요!”
안셀의 고함에 놀라기도 잠시, 이딜로스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릴의 일이 뒷전일 수는 없잖아.”
그리고 그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차창의 풍경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셀은 그를 보며 허망하게 웃었다. 안셀의 눈빛에 짙은 실망감이 일렁거렸다.
“왜 그리 태평하십니까?”
“뭐?”
“전하께서 겨우 붙잡아 올린 가문이지 않습니까. 늘 조바심 내고 안절부절못해 일을 붙잡았으면서 이번엔 왜 그리 경솔한 행동을 했느냔 말입니다.”
답지 않게 진심으로 화를 내는 안셀의 모습에 이딜로스는 잠시 당혹스러운 마음이 되어 그를 바라봤다.
당연하게도 그가 제 뜻에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셀은 보좌관이기 전에 친우였다. 그를 누구보다 걱정하는 이였고 그와 수많은 세월을 함께 보낸 둘도 없는 사이였다.
안셀이 화를 내고 실망감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결국 그 모든 건 걱정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안셀은 진지하게 그리 말하고 있었다. 네가 그녀에게 진심인 것도 알고, 그 마음을 무시하려는 것도 아니지만 왜 평생을 쌓아 온 것을 내팽개치고서 떠나려 하는 것이냐고.
이딜로스는 고개를 숙였다. 안셀의 눈을 도무지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 역시 이 무지막지한 충동에 의한 결과가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딜로스는…….
“사랑하니까.”
“……?”
안셀의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 이딜로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아릴을 사랑하니까. 그리고 맹세했으니까.”
그는 아릴과의 맹세를 결코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이미 아릴이 저버렸을지도 모를 마당에 그마저도 저버리면, 그 맹세는 뭐가 되고 그 마음은 어디로 사라지는 거란 말인가.
안셀은 여전히 화가 가시지 않은 눈으로 이딜로스를 조용히 바라봤다.
이딜로스는 안셀을 똑똑히 마주 봤다.
“널 카델라로트 공작 대리인으로 임명할 거다. 카델라로트의 사업의 모든 총괄 책임을 네게로 위임하고 갈 거야.”
안셀의 찌푸려진 눈이 커졌다. 이딜로스는 말을 이었다.
“이건 내가 일으킨 사업이지만 나만이 되살린 가문은 아니지. 네가 있어 키워 낼 수 있었다. 네가 내게 화를 내는 것도 아마 그 때문이겠지. 나 역시 많은 노력을 쏟았지만 너 또한 그랬으니 말이야. 그러니 난 네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잠시 동안만 자리를 비우려는 거다.”
“…….”
“미안하지만 네게 거절은 없어. 너밖에 할 수 없으니까.”
“제가 사표라도 쓰면 어쩌시려는 겁니까?”
“……그건 곤란한데. 아직 어린 마멜라를 데려와 앉힐 수도 없고. 성전에서 대신관과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친 걸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인데.”
이딜로스는 한숨과 함께 제 의사를 확연히 드러냈다.
“카델라로트는 견고해. 쌓아 온 것이 너무 촘촘해 잠깐의 바람으로는 쉬이 무너지지 않지. 난 그 사실을 아릴에게 배웠어.”
“…….”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다 해서 문제가 생기진 않을 거다. 너도 알잖아. 그냥 내가 장기 휴가를 다녀온다고 생각해.”
안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그 대화를 끝으로 안셀은 더 이상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생각에 잠긴 것처럼 심기 불편하게 입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적막 속에서 마차는 공작저에 도착했다.
이딜로스는 안셀에게 오늘은 이만 돌아가 봐도 좋다고 한 후에, 홀로 집무실로 향했다.
그는 자필로 카델라로트의 사업처들에 보낼 위임장을 작성하고 그 자리에 안셀의 이름을 채워 넣었다.
또한 저택의 집사장을 불러 오랫동안 저택을 비울 것임을 말했다.
‘마멜라에게도 알려야겠지.’
밤이 되자, 이딜로스는 마멜라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편지를 작성했다.
그걸 끝으로 그는 일찍 일과를 마치고 공작저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었다.
* * *
이딜로스는 짐을 실은 마차와 함께 이른 아침에 카델라로트를 떠났다. 짐이라고 해 봤자 실은 옷 몇 벌이 다지만.
이딜로스는 차창의 풍경을 바라보며 출발하기 전에 마중 나온 안셀을 떠올렸다.
안셀은 굳건한 눈으로 아침 인사도 생략하고 다짜고짜 말했다.
“전하의 말마따나 카델라로트는 제게도 의미가 큽니다. 그러니 잠시 동안만 책임져주는 겁니다. 제가 희생하는 만큼 전하께서도 아릴 님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셔야 합니다.”
안셀은 전날 동안 많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이딜로스는 안셀에게 진중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고맙다.”
“어디까지나 휴양을 다녀오시는 거란 걸 잊지 마십시오. 신전에서도 과로를 일삼으신다면 저 안셀, 사직서를 내고 신전 앞에서 시위를 벌일 겁니다!”
독실한 신자인 안셀의 반항에 이딜로스는 피식 웃었다.
그는 친구의 성화에 손가락까지 걸고서야 작별 인사를 고할 수 있었다. 안셀의 눈망울이 어쩐지 그렁그렁했던 것이 떠올랐다.
‘안셀이라면 믿을 수 있겠지.’
이딜로스는 마차에 기대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신전에서의 그의 목표는 오로지 아릴의 안전. 그녀를 지키기 위함뿐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언제 어떻게 위협을 가할지 모르는 아천타를 경계해야 하는데…….
그로서는 아천타에 관해 가지고 있는 단서가 부족했다. 그가 알고 있는 건, 단 두 가지.
하나는 아천타가 아릴뿐만 아니라 자신도 주시하고 있다는 것.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아천타가 오래전 자신의 부모님에게까지 손을 댄 것을 보면 그랬다.
그리고 두 번째는 바로, 루다비토의 공주가 건네주었던 문서에서 알아낼 수 있었던 아천타의 약점.
아릴과의 만남을 앞두고, 이딜로스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 * *
“카델라로트 공께서 오고 계시다는군요.”
“…….”
아무런 반응이 없자 아슐란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신전의 수인, 아릴은 어제부터 줄곧 말없이 화를 내비치고 있었다. 그 탓에 아슐란만 곤혹을 느끼고 있었다.
다른 사제들은 반려의 부재가 메워진 것에 쾌재를 부르며 생생하게 살아난 지 오래였다.
그들은 아릴이 조금 언짢아할 뿐이지 이다지 화가 났으리라곤 조금도 생각지 못할 것이다.
애초에 아릴이 화가 난 것은 전적으로 아슐란의 선택 때문이기도 했다.
아슐란이 어쩔 줄 몰라 하자 아릴은 한숨을 내쉬곤 입을 열었다.
“왜 내게 이딜로스를 반려로 맞으라고 했어? 다시 재앙이 닥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아릴의 낯이 어둑해졌다. 그녀로서는 낭패가 따로 없었다.
공교롭게도 맞물린 이딜로스의 정행 덕분에 아릴은 근 2년간 제 마음을 억누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딜로스에 대한 마음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여전히 좋아했다. 그걸 그녀 자신도 알았다.
그런데 떨어져 있기라도 하니 재앙은 거짓말 같이 멈췄다.
아릴은 그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계속 떨어져 있다 보면 언젠가는 마음이 멈추거나, 자신의 천명과 반려의 존재 사이에 깃든 이 모순의 이유를 밝힐 수 있으리라 여겼다.
이 마음이 평생 그치지 않더라도 어떻게든 해결책을 찾고 싶었다. 소중한 이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그런데 그 사실을 다 알면서도 아슐란은 그녀에게 사제들의 계획을 숨겼고 이딜로스를 들이라고 부추겼다.
아릴은 이해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