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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51화 (141/191)

151화

이딜로스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멀거니 아릴을 바라봤다. 뒤에 서 있던 아슐란도 아릴의 반응에 당황한 듯 이딜로스와 그녀를 번갈아 봤다.

이딜로스의 표정이 위태롭게 무너졌다. 아릴은 눈썹을 살짝 움찔하다가,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내게 바라는 은혜가 있는가?”

원한다면 얼마든지 축복을 내리겠다는 투였다. 하지만 그건, 이딜로스와의 거리에 선을 긋는 말이기도 했다.

이딜로스는 입을 다물고 있다가 천천히 열었다.

“……제가 사랑하는 여인에게 행복만이 가득하기를.”

“…….”

“축복을 내려 주십시오.”

말끝이 볼품없이 떨렸다.

공적인 자리이기 때문에 아릴이 그에게 선을 긋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릴은 그와의 사적인 자리도 거절하지 않았던가.

속이 쓰렸다. 이딜로스의 두려움과 불안감이 결국 그의 안에서 승리를 외쳤다.

이딜로스가 힘겹게 내뱉은 말에 아릴은 잠시 말이 없더니 그의 위로 신성력이 깃든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그대가 사랑하는 이에게 행복과 평화가 가득하기를.”

이딜로스의 눈앞에 신비로운 빛 가루가 흩날렸다. 생경하게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으며 그는 치아를 악물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돌아섰을 때, 허망함에 시야가 흐려졌다. 웃음도 나오질 않았다.

수인과 공작의 만남을 구경하던 이들은 그들이 무슨 대화를 했나 궁금한 눈치였다.

단 위와 이곳은 거리가 꽤 되었고, 수인과 공작이 유독 오래 마주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딜로스는 곧바로 비치되어 있던 얼음물을 찾았다.

수인의 알현식이니만큼 신전에 흐르는 신성한 물을 제공해 목 넘김이 부드러웠지만, 이딜로스는 목이 꽉 막힌 것처럼 물도 제대로 삼키질 못했다.

타는 속을 가라앉히려던 것이 무색하게 더욱 괴로워졌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멀찍이서 그와 아릴이 만나는 걸 조마조마하게 지켜본 안셀이 사람들을 밀치고 다가왔다.

“너와 마멜라의 말이 맞았군.”

“예?”

“아릴이 마치 다른 사람 같았어.”

그리 중얼거리는 이딜로스는 넋이 나간 사람 같았다.

안셀이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에게 이만 나가자고 하려던 때였다.

사제 한 명이 앞으로 나오더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으흠, 흠! 마지막으로, 줄곧 공석이던 반려 자리에 어울리시는 한 분을 들일까 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반려의 자리는 수인이 맡는 막중한 업무부터 우리를 굽어살피는 일까지, 그 모든 것들을 거들며 수인과 한평생을 동고동락하는 위치요.”

연신 수인의 눈치를 살피던 사제는 눈을 부릅뜬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헛기침을 크게 하며 고개를 돌렸다.

수인은 기가 차다는 눈빛으로 주변에 있던 사제들을 쏘아봤다.

그러자 목소리를 내고 있던 사제가 크게 소리쳤다.

“수인께서는 오늘에야말로 이 자리에서 반려를 들여 전례를 따라 주십시오!”

“허…….”

듣고 있던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알현식에서 보고되지 않은 차례였던 모양이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한결같이 경악스러운 낯으로 아릴의 눈치를 살폈다.

수인이 이곳 신전의 사제들이 마음에 안 든다며 온갖 죄목을 붙여 내쫓은 게 불과 2년 전이었다.

그런데 그간 수인이 들이기 싫다며 눈 밖에 내놓았던 자리를 지금 언급하다니…….

아니지.

사람들은 생각을 바꿔 이딜로스 쪽을 흘끔댔다.

지금은 카델라로트 공작이 돌아온 시점이 아닌가? 그럼 지금 반려 자리를 꺼낸다는 건…….

아, 카델라로트 공작을 정식으로 반려 자리에 올리기 위함이겠구나!

사람들은 납득했다.

신격체는 한평생 한 사람만을 마음에 두고 반려로 삼는 존재.

애초에 수인의 연인이라는 카델라로트 공작이 아니면 그 자리를 차지할 이도 없었다.

수인도 그를 기다리기 위해 반려 자리를 비워 뒀을 터였다.

사람들은 기대가 가득한 눈빛으로 카델라로트 공작을 바라봤다. 덕분에 안셀은 이딜로스를 데리고 나갈 수가 없어졌다.

성전 내, 소란스러움이 번지기 시작하자 사제가 우렁차게 말했다.

“저희는 수인께서 연분을 지닌 카델라로트 공을 반려로 추천하나이다!”

뒤따라 다른 사제들이 그녀의 선택을 바라듯 간절히 단 위를 올려다봤다. 정말 막무가내가 따로 없었다.

“전례에 따라 수인의 곁에는 반드시 반려가 있어야 합니다!”

사실 사제들도 이러는 이유가 있었다. 반려 자리가 비어 수인 혼자 신전의 일을 처리하자니 그녀의 건강이 무척 걱정되었던 거다.

게다가 수인의 등장 이후 신전에 찾아오는 사람들과 베풂을 바라는 이들이 워낙 많아져 사제들의 일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이 모든 게 수인의 반려만 있으면 어느 정도 해결되는 것!’

그러한 사제들의 눈빛을 읽은 수인은 이마를 짚었다.

모두가 그녀의 입을 바라보는 상황이었다. 그들 대다수가 카델라로트 공작을 반려로 들일 것이라 굳게 믿었다.

수인은 한숨짓고는 무표정하게 말문을 뗐다.

“안타깝게도 내겐 아직 반려로 맞을 만한 이가 없어.”

“그럴 리가요. 저기에 카델라로트 공작이…….”

“저를 반려로 맞으실 생각이 없으십니까?”

사제가 횡설수설 꺼낸 말을 이딜로스가 가로챘다. 그의 한마디에 일대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안셀이 그의 팔을 붙잡았지만, 이딜로스는 개의치 않았다.

수인이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이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그녀는 단 한 번에 그를 찾아냈다.

아릴은 일관된 태도로 말했다.

“나는 반려를 들일 생각이 없다.”

명백한 거절이었다. 하지만 이딜로스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녀가 밀어낸다면 다가갈 작정이었다. 적어도 이유를 알아내 그가 납득하게 되기 전까지는.

“하여 계속 이렇게 반려를 두지 않으실 겁니까? 반려의 자리는 당신을 보좌하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혼자 모든 일을 처리하시기엔 힘에 부치실 겁니다.”

사람들은 카델라로트 공작이 열변하는 것을 보곤 놀랐다. 만사무심하던 이가 저토록 적극적이고 열의에 찰 수도 있을 줄은.

이딜로스의 말에 사제들이 옳다구나 달려들었다.

“공의 말이 맞습니다.”

“이 모든 것이 신의 대리인이신 수인님을 위한 것임을 알아주시길 바랍니다.”

“카델라로트 공작은 능력도 출중하니 반려의 자리에 이만한 이가 없을……!”

“그만.”

수인이 손을 들어 소란스러운 장내를 잠재웠다. 사제들은 눈치를 보다가 꼬리를 내렸다.

아릴은 느릿하게 팔을 내리며 이딜로스를 직시했다. 그 시선과 행동 모든 것이 권태를 품은 맹수처럼 느긋하고도 우아했다.

그녀는 그 태도 그대로 나른히 입을 열었다.

“반려의 자리는 원한다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대들이 알고 있는 그 낭만적인 속설대로, 반려란 첫눈에 결정되는 것이지.”

“…….”

“한데 카델라로트 공작, 그대는 아니야.”

이딜로스의 표정이 철렁 흔들렸다. 수인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단호히 입을 열었다.

“이 건은 여기까지…….”

“그럼 임시로라도…… 안 되겠습니까.”

“뭐?”

관내가 정적에 잠겼다.

이딜로스는 그녀의 시선이 거두어질 틈도 없게 연이어 말했다.

“임시로 반려의 자리를 맡는 것도 안 되냐 물었습니다. 언젠가 진짜 반려…… 그분이 나타나기 전까지 말입니다.”

그는 절박했다.

2년의 시간을 거쳐 겨우 아릴을 만났는데. 그 긴 시간 동안 얼마나 지옥 같은 나날을 헤매었는데.

이대로 아릴을 놓치면 다시는 그녀를 가까이서 보지 못하리라는 직감이 들었다. 이딜로스는 이대로 아릴을 놓을 생각이 없었다.

이전에도 이런 식이지 않았던가. 멋대로 다가올 땐 언제고 다시 멋대로 등 돌려 버리지.

‘넌 제멋대로야. 나를 대하는 마음조차 제멋대로지.’

하지만 난 그런 너를 사랑해.

이딜로스의 눈빛에 꺾을 수 없는 불길이 드리웠다. 갑작스레 자신을 밀어낸 그녀에 대한 분노 같기도 했고, 한없이 절절한 애정 같기도 했다.

그때 눈치를 보던 사제 한 명이 끼어들었다.

“아! 임시 반려라니, 그 역시 좋군요. 임시더라도 반려의 자리를 잠깐 동안 누군가 메워 준다면 신전은 물론이고 나라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사제들이 제각각 그를 거들기 시작했다.

수인은 제 뒤에 서 있던 아슐란에게 눈짓하더니 뭔가를 속닥였다.

아슐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카델라로트 공. 그 마음이 진심임은 알겠으나, 반려의 자리에 오르면 당신은 카델라로트의 일에는 손을 놓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신전의 일과 공의 일을 함께하기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이딜로스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안셀이 기함했다.

그를 따라 주변으로 웅성거림이 번졌다. 아슐란 역시 눈을 크게 뜨고 깜빡였다.

이딜로스는 단단히 마음먹은 듯 수인을 바라봤다.

“그게 문제인 거라면 카델라로트의 일이든, 다른 모든 것이든 전부 내려놓겠습니다. 저를 임시 반려로 받아 주십시오.”

“전하, 그건 좀…….”

당황한 안셀이 이딜로스를 뜯어말렸다. 하지만 이딜로스는 요지부동이었다.

아릴의 눈빛이 찰나 간 흔들렸다. 너무 한순간이라 그를 목격한 이딜로스조차 착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곧 그녀는 착잡한 낯을 했다. 양측에서 그녀를 설득하고자 사제들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반려를 들이는 게 그녀는 물론이고 이곳의 신민들 모두를 위하는 일이다, 하도 입 마를 틈 없이 조잘대는 탓에 알현식에 참석한 사람들도 어느새 동조하고 있었다.

“아릴 님.”

더구나, 아슐란조차 그녀를 조용히 설득했다.

결국 그들의 성화에 못 이긴 아릴이 답했다.

“알았으니 그만.”

아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높은 자리에서 그녀는 신성한 옷자락을 끌고 내려왔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고아한 나머지 사람들은 웅성대던 것도 잊고 넋을 놓았다.

하지만 그 수인은 어쩐지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

“그대들의 말대로 카델라로트 공작을 임시 반려로 들일 테니 이제 그만하라.”

다소 높은 고조로 말한 아릴은 낭패 어린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딜로스 록센 카델라로트.”

“예.”

“지금부터 그대를 임시적인 반려로 임명하겠다. 이것을 끝으로 오늘의 연례는 마치겠다.”

사제들과 다른 이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이 자리에서 낯이 굳어 있는 이는 이딜로스와 아릴, 그리고 안셀뿐이었다.

사제의 구호에 맞춰 모두가 그녀에게 가호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아릴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성전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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