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수인이 나타난 이후로 크로델리아에는 매년 한 번씩 주기적으로 수인 알현식이 찾아온다.
그곳에 참여하는 이들의 목적은 다양했다.
큰 고민거리가 있어 수인과의 만남으로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이.
지고하신 분을 뵈어 신앙심과 명예를 살리고자 하는 이.
수인의 존재에 가져선 안 될 흑심을 품은 이.
그들은 다양한 목적으로 수인을 뵙고자 했다.
다만 맨 끝에 언급한 이들은 본래부터 몇 없긴 했으나 대다수가 첫 알현식 때 나가떨어졌다. 그녀의 존재가 고귀한 만큼이나 지엄했고, 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군.”
안셀이 모아 온 알현식에 관한 여담과 소문들을 듣던 이딜로스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침을 튀겨 가며 말하던 안셀은 마차가 멈추는 소리에 멈칫했다.
‘걱정되는 게 한둘이 아니다만…….’
안셀은 저조했다. 자신이 정말 좋아하고, 드디어 제자리를 찾아간 존귀하신 아릴 님의 안위가 궁금하긴 했다.
그러나 그는 그보다 오늘 있을 알현식으로 이딜로스가 큰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지 더 신경 쓰였다.
‘나도 처음엔 믿지 못하였지만, 마멜라 아가씨께서는 그런 걸로 장난을 치실 분이 아니시니까.’
안셀은 걱정 어린 눈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그는 어느새 마차를 내려 먼저 걸어가고 있었다. 안셀도 서둘러 마차의 문을 닫고 그 뒤를 따랐다.
‘시간이 조금만 느리게 가 주었으면 좋았으련만. 마음의 준비를 할 겨를도 없이 찾아와 버렸구나…….’
안셀은 한탄했다. 그러다 이쪽으로 무수한 시선이 쏠리고 있다는 걸 눈치채곤 주변을 둘러봤다.
“전하. 이목이 너무 집중되는 것 같습니다.”
“내게 관심이 많은 거겠지.”
안셀은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을 상기해 냈다.
‘카델라로트 공작은 수인의 연인’이라고 퍼진 그 소문을.
때때로 수군거림이 이까지 들려오기도 했다.
그들은 수인과 카델라로트 공작이 어떻게 만났고 얼마나 깊은 사랑에 빠져 있는지. 그리고 공작과 수인이 떨어져 지냈던 2년간의 시간이 서로에게 어떤 의미를 지녔을지 유추해 댔다.
아예 로맨스 소설을 지으라지.
또, 어떤 이들은 수인과 카델라로트 공작의 사이가 틀어져 그가 수인을 두고 타국으로 떠난 것이라고도 했다.
이딜로스는 그 같잖은 소리들을 도무지 들어 줄 수가 없었다.
그는 제게로 모인 호기심의 눈길을 무시하며 신전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보이는 사제가 커다란 성전에서 알현식이 있을 것이라며 그에게 길을 안내해 주었다.
그 역시 지난번에 이딜로스가 본 사제처럼 그를 아주 반가운 눈길로 쳐다봤다.
이딜로스는 의문스러운 눈길로 사제를 바라보다가 알현실로 향했다.
그곳은 확실히 수백 명의 사람들도 거뜬히 모일 수 있을 만한 거대한 장소였다.
이런 곳조차 첫 알현식 때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사람이 붐볐다니. 새삼 크로델리아의 신앙이 대단하다고 그는 생각했다.
물론 신앙심이 아니라, 그저 호기심만 가지고 오는 이도 있었겠지만.
곳곳에 사제들이 여럿 서 있는 것을 보며 그는 성전 안을 걸었다. 그러나 머지않아 길이 가로막혔다.
“카델라로트 공! 귀국했다고는 들었소만, 오랜만이오.”
“어머, 카델라로트 공 아니신가요? 이렇게 뵈어 정말 영광이에요.”
순식간에 이딜로스를 둘러싼 귀족들이 과장되게 인사해 왔다.
‘날 대하는 태도가 이전과 확실히 달라졌군.’
속으로 조용히 혀를 찼다. 저들 중 2년 만에 귀국한 자신이 진심으로 반가운 이는 얼마나 될까.
그가 봐 온 숱한 사람들은 죄다 기회주의자에 이기주의자였다.
지금도 그랬다.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그에게 빌붙어 뭐 하나 뽑아 먹으려는 뱀 같은 교활함이 번들거렸다.
황제의 적극적인 지지로 옆 나라에 파견 가 국교를 원만하게 이루었고 사업 확장 성공의 성과를 거둔 카델라로트 공작.
거기다 황제보다도 더 지위가 높은 하늘 같은 수인의 연인.
아마 그들의 비열한 뇌는 재 볼 것도 없이 일단 공작에게 들러붙으라는 명을 내렸을 거다.
이딜로스는 지나치게 다가오는 이들에게는 냉담하게 선을 그으며 조용한 자리를 찾아 나섰다.
‘모처럼 아릴을 보게 될 날인데……. 기분 나쁜 인간들.’
이딜로스가 인상을 확 찌푸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함께 온 안셀은 온데간데없었다. 조금 전 이딜로스에게 알은체하려고 몰린 인파로 인해 밀려난 듯했다.
그는 애써 구겨진 미간을 문질렀다.
마음을 정리하고자 곧 마주칠 아릴을 생각했다. 알현식에 참석한 이들에게는 수인과 짧게나마 독대할 기회가 생긴다고 했다.
이딜로스는 이곳에 온 인원들을 눈대중으로 재 봤다. 저 몇백 명의 인원을 마주해야 한다니.
‘신격체도 할 짓이 못 되는군.’
이딜로스는 가만히 상념에 잠겼다. 알현실의 무지막지한 소란스러움이 일순 백색 소음처럼 멀게 느껴졌다.
‘아릴을 만나면 어떤 인사를 하는 게 좋을까.’
지난번, 신전에서 만남을 거절당한 후로 이딜로스는 오늘을 줄곧 생각했다.
당연하게도 아릴이 보고 싶었다. 그리움이 너무 커서 마음이 닳아 없어지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러니 아릴을 한시 빨리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그리움의 귀퉁이에는 아릴을 마주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도 어렴풋이 존재했다.
그녀가 정말로 자신이 싫어져 내친 것이면 어쩌나. 직면하게 될 사실이 무서운데, 이곳을 벗어나면 평생 그 사실을 몰라도 될 텐데…….
그럼에도 아릴이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커, 자리를 뜰 수가 없었다.
“수인께서 곧 드십니다! 모두 경건한 마음으로 예를 갖추시길 바랍니다.”
그 소리에 이딜로스는 상념을 꺼트렸다.
소란스럽던 일대가 한순간에 조용해졌다.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익숙한 대신관이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 모든 선악을 포용할 온화한 낯으로 나타난 칠성의 삼 사제는 마치 왕좌처럼 높게 위치한 자리로부터 조금 비켜선 단 위에 섰다.
성결하게 금실을 두른 흰 복장을 차려입은 그는 모인 이들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한낱 사제라기엔 지나치게 눈부신 후광에 곳곳에서 이곳이 어딘지도 잊고 멍하니 감탄을 터트리는 소리도 들렸다.
‘……지금 날 쳐다보는 건가?’
의아하게도 그 대신관, 아슐란의 시선은 이딜로스에게서 뚝 멈췄다.
그는 그대로 부드럽게 웃으며 이딜로스에게 가벼이 눈인사를 했다.
이딜로스의 주변에 한차례 소란이 일었다.
주변에서 ‘삼 사제님이 내게 인사해 주셨어!’ 같은 하찮은 소리들이 소곤소곤 들려왔다.
하지만 파문은 얼마 가지 않았다. 지금 수인이 드신다고, 아슐란이 차분히 말했기 때문이다.
이윽고 단과 가까운 왼편의 문이 양옆으로 활짝 열렸다. 신성한 존재의 등장을 알리듯 그곳으로부터 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빛에 흠뻑 젖은 인영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타박타박.
숨 막히는 정적 속, 집중해야만 겨우 들을 수 있는 가벼운 발걸음이 전당을 울렸다.
유유히 등장한 수인은 신성함과 존귀함이 느껴지는 신전의 복식을 입고 있었다.
이딜로스의 시선이 홀린 듯 높은 단으로 오르는 여자를 좇았다.
그의 기억보다 길어진 눈송이 같은 머리칼, 매서운 한기가 들게 하는 차가운 푸른 눈.
그가 기억하는 사랑스러운 얼굴이 맞았다. 그러나 그의 기억과 달랐다.
수인은 무료하게 내리깔고 있던 시선으로 일대를 둘러봤다. 이딜로스와 시선이 마주친 것은 한순간이었다.
그녀는 찰나 간 그를 응시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별 반응 없이 다시 매끄럽게 시선을 옮겨 높은 자리에 착석했다.
3초도 되지 않는 짧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딜로스의 심장을 절벽 밑으로 떨어트리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심장이 무자비하게 쿵쿵 뛰었다.
그건 재회의 반가움으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었다. 마주한 싸늘함에 질식할 것 같아 온몸이 바르작거리는 것이었다.
‘아릴이…… 맞지?’
이딜로스의 흔들리는 시선이 아릴의 모습을 찾아갔다.
그녀는 옆에 선 아슐란과 무어라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조차도 지극히 냉담해 보였다. 왕관만 쓴다면 그 자체로 옥좌에 앉은 제왕의 모습일 것 같았다.
그때, 또 한 번 아릴이 이쪽을 쳐다봤다. 이번에야말로 이딜로스는 놀라 숨을 삼켰다.
서늘했다. 날카롭기 그지없는 시선에 마음이 거세게 할퀴어진 것 같았다.
그토록 말갛게 웃던 눈으로 싸늘한 시선을 보낼 수 있다니.
차라리 제 뒤를 쳐다보고 있는데 자신이 착각한 것이라고 여기고 싶었다.
아릴이 변했다는 마멜라의 말은 맞았다. 그녀의 눈빛만으로 알 수 있었다.
가슴이 욱신거렸다. 심장을 손으로 터트릴 듯 꽉 움켜쥐었다가 미지근한 물웅덩이 위로 내팽개쳐 버린 것 같다.
그런데도 그녀가 어디 아픈 곳 없어 보인다는 사실이 반가워 웃음이 나왔다.
이유 없이 날 선 시선을 받고도 고작 눈이 마주쳤다는 이유로 심장이 뛰는 그였다. 이딜로스는 애써 시야가 일그러지려는 것을 참았다.
아릴의 행동에는 모두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 후로는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알지 못했다. 이딜로스의 정신은 귀신에라도 홀린 것처럼 아릴에게만 쏠렸다.
“하여 올해도 그대들에게 풍요의 축복을 내린다.”
오랜만에 그리웠던 목소리를 들었다.
여전히 바다 구슬 같은 매끄럽고도 몽글한 목소리가 기품 있게 신전의 성서를 읊었다.
남들 다 손을 모으고 기도를 올릴 때 이딜로스 혼자만 넋을 놓고 있었다. 지금의 아릴은 꼭 거룩한 여신 같았다.
그건 무척 새로웠지만, 이곳에 있으니 집고양이 같던 귀여운 매력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그의 눈에 낯선 아릴의 모습만 가득했다.
“지금부터 수인이신 아릴 님과 한 분씩 면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사오니, 차례를 지켜 기다려 주시길 바랍니다.”
그 말에 이딜로스는 정신을 차렸다.
수인에게 제 근심거리에 대한 해답을 얻거나 신력이 깃든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딜로스에게는 그녀에게 인사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는 긴장했다. 차례는 어떤 순서인지 알 수 없었다.
신분의 귀천을 따라 귀족이 우선시되는 법칙 따위는 이곳에 허용되지 않는 듯했다.
귀족이 호명을 받는가 하면 또 그다음으로는 평민이 부름을 받기도 했다.
이 자리에 온 이들은 모두 동등하게 신자, 그뿐이었던 거다.
하지만 이곳에서 유일하게 동등선을 타지 않는 것은…….
“카델라로트 공작.”
그였다.
이딜로스는 가장 마지막으로 호명되었다.
그 역시 그랬고, 남들 또한 그가 마지막으로 불린 것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였다.
하지만 이딜로스는 그녀의 앞으로 가는 동안 주변의 시선이 조금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까 전까지는 제법 웅성웅성하던 성전 안이 대번에 조용해졌는데도.
심장이 튀어 나갈 것처럼 뛰었다. 그리고 그건 걸음을 멈추는 순간 정점을 찍듯 거칠게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아릴의 맞은편에 서서,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맑은 바다 같은 시선이 이딜로스를 온전히 머금었다.
드디어 제집을 찾아온 듯한 안온감이 그를 부둥켜안아 왔다.
그녀의 뒤에 있던 아슐란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딜로스는 벅참을 온전히 느끼며 그녀에게 일그러질 듯한 웃음을 보였다.
“안녕, 아릴.”
애써 평정을 찾으려 했지만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수인은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와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그때 이딜로스는 잠시 벅참에 가려져 있던 불안감을 다시 한번 느꼈다.
웃음기 하나 없이 굳게 닫혀 있던 아릴의 입이 느릿하게 열렸다.
“카델라로트 공작.”
이딜로스의 흔들리던 시선이 뚝 굳었다.
지극한 권태로움이 드러난 얼굴이 그를 싸늘히 바라봤고, 이어진 목소리 또한…….
“그대 눈엔 내가 사사로운 존재로 보이나?”
더없이 차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