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이딜로스는 대신전의 아슐란 앞으로 아릴의 행방을 묻는 서신을 보냈다.
그리고 답신이 올 동안, 카델라로트의 인력을 총동원해 아릴을 찾아 나섰다.
아릴이 이렇게 큰 스케일의 장난을 치지 않을 것이라는 걸 알았음에도, 이딜로스는 공작저도 샅샅이 살폈다. 차라리 그녀가 장난친 것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그래서 아릴이 사라진 며칠은 그녀가 돌아와 있지는 않을까 싶은 생각에 몇 번이고 아릴의 방을 찾아갔다.
그러는 이딜로스의 손에는 언제나 반지가 꼭 쥐어진 채였다.
하지만 하루, 이틀, 닷새, 이내는 보름까지도. 아릴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긴 시간 동안 대신전으로부터 온 회신도 없었다. 그쯤 되자 이딜로스는 불안감에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목숨이 위태로운 아릴이 위험에 처했을까 봐. 그래서 그가 없는 어느 곳에서 자신을 간절히 부르고 있을까 봐.
그에게 편지의 내용은 뒷전이었다. 아니, 처음부터 아릴이 남기고 간 그 말은, 이딜로스에게 그녀의 안위에 무슨 문제가 생겼음을 알리는 수단밖에 되지 않았다.
이딜로스는 수도든 황궁이든 온 대륙을 이 잡듯 뒤졌다. 하지만 아릴은 어디에도 없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릴은 너무나 손쉽게 눈앞에서 사라졌다. 언제나 그랬듯 요정처럼 말이다.
“하…….”
이딜로스는 소파에 기대어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잠을 못 자 온몸이 괴사할 것 같은데 마음까지 불안감에 허덕거렸다.
언젠가 데비드가 말해 주었던 신명이 바로, 아천타와 수인 간에 큰 사건이 일어난다는 것 아니던가.
거기에 아릴이 휘말리면 어떡하지. 과연 내가 아릴을 구할 수 있을까.
이딜로스는 그러한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아릴.”
얼마 후 시종이 찾아왔다. 그가 가져온 커다란 얼음 잔에 이딜로스는 브랜디를 콸콸 부었다. 시종이 놀라 눈을 크게 뜨는 듯했지만 이딜로스의 안중에는 없었다.
그저 이 타는 듯한 심정을 가라앉히고 싶었다. 불안감과 막연함, 그리고 그 밖의 모든 것들을 잠시라도 좋으니 날려 버리고 싶었다.
그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잠들면 꿈속에서 아릴을 만날 것이다. 그런다면 가장 먼저 아릴의 상태를 살필 것이고, 그 후엔 대체 어디에 있는 거냐고 그녀에게 캐묻고 싶었다.
그리고 아마 마지막쯤에, 아침이 밝아 오는 걸 직감하며 묻겠지.
네가 남긴 그 편지는 대체 무슨 말인 거냐고.
아릴이 사라진 마당에 구태여 신경 쓰지 않고 있지만, 실은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함이 더 컸다. 그래서 기회만 된다면 묻고 싶었다.
깊은 잔에 넘칠 듯이 채운 술에서 달큼한 향이 풍겼다.
막 이딜로스가 잔을 입에 대려는 때였다. 줄곧 옆에서 저걸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머뭇거리던 시종이 입을 열었다.
“가주님, 전할 소식이 있습니다.”
이딜로스는 버쩍 죽은 눈빛으로 말없이 시종을 바라봤다. 그사이 그는 브랜디를 몇 모금 넘겼다.
“대신전에서 회신이 없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신관 중 한 분이 살해당했다고 합니다.”
“……뭐?”
“범인이 누구인지, 내막은 알 수 없습니다. 그 탓에 대신전은 현재 문을 걸어 잠근 상태입니다.”
이딜로스는 하마터면 잔을 떨어트릴 뻔했다. 겨우 테이블 위에 잔을 탁, 소리 나게 내려 두었다. 찰랑이는 액체가 불안정하게 넘실거렸다.
자신의 심경과 꼭 닮은 그 모습을 보다가, 이딜로스는 조용히 입을 뗐다.
“알겠다. 이만 나가 봐.”
“예.”
시종이 나가는 걸 확인한 이딜로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곧바로, 무너지는 고개를 두 손이 받았다.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아릴…….’
그는 한참 만에 다시 술잔을 잡았다. 얼음이 다 녹은 브랜디를 그는 한 번에 털어 마셨다.
다음 날 아침이 되었을 때, 이딜로스는 시끄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전하!”
“……안셀?”
눈앞에는 안셀의 급박한 얼굴이 보였다. 이딜로스는 깨질 듯한 머리에 잠시 미간을 찡그리다가 몸을 일으켰다.
안셀은 눈치 빠르게 옆에 있던 물 주전자에서 물을 따라 건넸다. 이딜로스는 물 잔을 받아 마시며 생각했다.
‘내가 무슨 꿈을 꿨던가.’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어젯밤 바랐던 대로 꿈속에서 아릴을 본 것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다만 은은하게 아릴의 목소리가 기억났다.
<카얀.>
고대어일까. 루다비토의 언어일까.
낯선 발음을 가진 그 언어가 무슨 말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어쩌면 꿈에서 헛것을 들은 걸 수도 있고.
이딜로스는 물 컵을 협탁 위에 올려 두며 안셀을 바라봤다. 물끄러미 보내던 시선이 이내 와락 찌푸려졌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제 침실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새가 지저귀고 있는 이른 아침.
안셀이 아침부터 허락도 없이 제 구역을 침범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불쾌해졌다.
“무슨 일로 이곳까지 온 거지?”
“큰일입니다, 전하. 어서 일어나 보십시오!”
안셀이 발을 동동 구르며 하는 말에 이딜로스의 낯은 더욱 구겨졌다. 가뜩이나 머리도 지끈거리는데.
그러면서 이딜로스는 착실히 침대에서 일어나 주었다.
“용건이나 말해.”
“황제 폐하께서 전하를 황궁으로 부르셨습니다. 지금 당장 알현하러 이동해야 합니다.”
“무슨 연유로?”
“그게, 전하를 루다비토로 파견하시겠다고 합니다……!”
이딜로스는 귀를 의심했다. 백부께서 나를 타국으로 보내겠다고?
하필…… 지금?
굳어 있던 그는 안셀이 눈물 쇼를 하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리고 채비를 했다. 황제가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러는 것인지 알아야 했다.
급한 만큼 바쁘게 이동한 끝에 델트로타에는 금세 도착했다. 이딜로스는 곧바로 황궁을 방문해 황제의 알현을 청했다.
그렇게 안셀을 동반한 채 그는 황제, 가르덴을 마주했다.
가르덴은 오랜만에 만난 조카를 향해 활짝 웃었다.
“이딜로스. 참으로 오랜만이구나. 아무 탈 없이 건강해 보여 다행이야.”
그 말에 이딜로스는 뾰족한 마음을 애써 숨겨야 했다. 몇 번이고 이딜로스를 사지로 내몬 장본인이 저런 말을 하다니.
이딜로스는 최대한 감정을 내비치지 않으며 말했다.
“저를 루다비토로 파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아아, 그래. 최근 네가 디자이너 하나를 루다비토 공주의 청으로 정행 보내지 않았느냐. 루다비토는 크로델리아와 겸상도 하지 않으려던 치인데. 내 너를 아주 기특하게 여긴 것을 모르지 않겠지.”
감사를 입에 올려야 할 상황에 이딜로스는 무신경하게 가르덴을 바라보기만 했다. 평소 같았더라면 무례한 놈이라며 꾸짖을 황제였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루다비토와 크로델리아의 국교는 사정이 나쁘지. 그러니 네가 나라를 위해 애써 주었으면 좋겠다.”
“국교를 위해 지금 저를 옆 나라로 보내겠단 겁니까?”
“그래. 네가 사절로 가 주었으면 좋겠구나. 황실을 대표하기엔 내겐 자손이 없으니 너만 한 인물이 없지 않으냐.”
“제 의사는 안중에도 없군요.”
이딜로스가 낮게 뇌까렸다.
그의 머릿속엔 하필, 왜, 지금, 어째서 같은 말들이 토막 난 채 몰아치고 있었다.
그의 음산한 낯을 본 황제가 비소를 흘렸다.
“내가 네게 허락이나 구하자고 부른 줄 아느냐? 이건 황명이다.”
이딜로스가 치아를 빠드득 소리 나게 물었다. 그를 살피던 안셀은 안절부절못했지만, 황명 앞에서 안셀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무슨 목적이신 겁니까?”
“뭐?”
중얼거리는 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한 황제가 되물었다.
이딜로스가 고개를 바짝 쳐들었다. 까마득한 옥좌에 앉은 황제에게 한순간 격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천타와는 무슨 사이인 겁니까?”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 이딜로스의 모습에 황제는 멈칫했다. 하지만 곧 재밌는 걸 봤다는 눈길로 입매를 끌어올렸다.
“아천타?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모른 척 말 돌리지 마십시오, 폐하!”
“이딜로스. 네가 만약 내 명을 거스른다면 나 역시 너를 신민으로 취급하지 않을 거다. 크로델리아의 이름 아래에서 네가 가진 작위와 재산을 나라에서 몰수하고 추방당할 것을 각오해야 할 거다.”
이딜로스가 분에 겨운 눈으로 가르덴을 노려봤다. 호흡이 가쁘게 떨렸다.
황제는 나른히 웃음을 띠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이만 나가 보아라.”
안셀은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이딜로스를 억지로 끌고 알현실을 벗어났다.
이딜로스의 눈은 분노로 들끓고 있었다. 안셀은 그가 뛰쳐 돌아가 황제의 멱살이라도 잡을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꾸역꾸역 황궁 밖으로 나가서야 이딜로스의 팔을 놓았다. 아니, 이딜로스가 내팽개친 것에 가까웠다.
“망할, 빌어먹을!”
이딜로스는 한 손에 고개를 묻고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아천타와 황제가 손을 잡고 벌이는 수작질에 놀아나고 있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 말은 아릴이 떠난 상황을 아천타 역시 알고 그에게 수를 쓴다는 거였다.
그는 낭패감에 주저앉고 싶었다.
이미 아릴이 아천타를 마주쳤을지 모른다. 아릴을 찾을 수조차 없게 저를 타국으로 내쫓는 백부의 행동에 너무나 화가 났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안셀이 이딜로스를 시한폭탄 대하듯 살며시 건드렸다. 이딜로스는 신경질적인 숨을 토해 내더니 말없이 마차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토록 분하고 답답한데 그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차라리 아천타가 아릴의 털끝도 건드리지 않을 테니 네 심장을 뽑아다 바치라고 한다면, 이딜로스는 기꺼이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결국 이딜로스는 카델라로트령으로 돌아갔고. 마멜라에게 사정을 말했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황명으로 크로델리아를 떠났다.
* * *
촤악.
청빈하고 거대한 성전에 붉은 것이 후드득 튀었다. 예리하고도 서늘하게 벼린 검에서 피가 진득하게 떨어졌다.
“끄으, 윽…….”
문드러진 살갗을 쥔 한 인간이 피 웅덩이를 기었다. 존엄을 상징하는 하얗고 신성한 옷자락은 붉게 물든 지 오래였다.
악착같이 바르작대던 인간의 움직임이 서서히 멎었다. 그의 목깃에 달린 일곱 개의 별이 그려진 브로치만 유유히 광났다.
검을 쥔 장신의 인영은 비릿한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시선이 성전 중앙에 걸린 신상을 향했다.
“그거 아십니까?”
낮은 목소리가 고요한 성전에 울렸다.
“본디 마음이란 어설프게 닿았다 떨어져야만 더욱 깊어지는 법입니다.”
신상을 향해 다가가는 그의 긴 머리칼이 흔들렸다.
“우리를 빚어 만드셨을 신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실 테지요. 당신은 모르는 것이 없을 테니.”
신상 앞에서 걸음을 우뚝 멈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에 오만하게 자리한 신상을 보자 그는 표정을 지웠다.
뚝, 뚝.
검날을 타고 흐르는 핏물의 소리만 들렸다. 발밑에 떨어진 성배가 걸리적거렸다. 성배를 발로 밀어낸 그가 쯧, 혀를 찼다.
이내 그는 다시금 신상을 올려다보며 웃었다. 신실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소 속에서 심연을 닮은 녹색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제가 이러리란 것도 예측하진 못하셨겠죠. 이번엔 제가 한 수 위로군요.”
눈가를 휘어 웃은 그는 검을 들어 허공을 가볍게 그었다. 검을 흥건히 적신 피가 신상에 튀었다.
그 너저분한 꼴을 흡족하게 본 그는 검을 팽개쳤다.
챙그랑. 요란한 소리였다.
손에 묻은 피를 불쾌하다는 듯 털어 낸 그가 말했다.
“본의 아니게 시끄럽게 하고 더럽히기까지 했군요. 미안합니다.”
진심을 담아 사과하고서 성전에 걸린 시계를 봤다.
“아, 시간이 제법 되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의 얼굴은 아무 짓도 하지 않은 것처럼 청렴하기만 했다. 눈이 멀 듯한 아름다움으로 환히 웃은 그가 자랑하듯 이야기했다.
“당신이 제게 점지해 주었던 이가 기다리고 있거든요.”
“…….”
“재미있지 않습니까? 분명 내 것인 이가 다른 반려를 두고 있던데.”
일순 그의 미소가 사납게 비틀렸다.
“감히 말입니다.”
다시 흘긋 시간을 본 그는 눈을 깜빡이더니 탄식했다.
“이런, 또 사설이 길어졌군요. 이제 정말 가 보겠습니다. 아릴 님을 기다리게 해선 안 되니까요.”
신성한 공간을 죄악으로 물들인 그는 그 자리를 유유히 벗어났다. 터벅터벅, 묵직한 걸음 소리가 싸늘히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