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어…….’
엘리네 헤르핀드가 아릴을 싫어하는 것은 자처하더라도, 적어도 예의 정도는 차릴 줄 아는 여자였다.
아릴이 가진 엘리네의 첫인상 또한 그랬다. 엘리네 헤르핀드는 우아하고 기품 있으며 고혹한 장미의 느낌을 주었으니까.
사실 굳이 이딜로스에게 매달리지 않아도 엘리네가 타고난 것들을 봤을 때 그녀에게 구혼하는 이들은 넘치고도 남았다.
하지만 엘리네는 여느 귀족처럼 야망이 있으며 머리 또한 명석했다.
신문에서 엘리네가 아버지를 이어 헤르핀드 공작가를 대표하는 명망 높은 학자라는 사실을 보았기에 아릴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대놓고 아릴을 무시하는 편지를 보내다니. 그뿐이 아니라 끝에 가서는 갑자기 아릴에게 사랑한다고…….
‘이 인간도 아천타의 정신 지배를 받고 있나 봐.’
갑자기 안쓰러워졌다. 이렇게 이상한 편지를 보낼 정도로 정신이 이상해지다니.
하지만 어쩐지 찜찜한 마음이 드는 것은 그저 기분 탓일까.
아릴은 엘리네의 편지를 보다가, 고이 접어 서랍장 안에 넣어 두었다. 그리고 얇은 숄을 걸치고 서재로 향했다.
엘리네 헤르핀드는 경계 대상이니 이런 비난만 가득한 편지 따위, 벽난로에 던져 태워 버리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엘리네가 보내온 이 편지에 신경이 곤두섰다.
그건 아릴의 동물적 직감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냥…… 엘리네 헤르핀드가 신경 쓰이는 걸지도 모른다.
밤을 맞이할 준비를 끝낸 공작저는 어두웠다. 오가는 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작은 조명이 복도를 은은하게 밝히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사람이 다니는 일이 적은 서재 쪽으로 향하자 완전히 소등되어 캄캄했다.
아릴은 정확히 빛이 끊기는 경계에 우두커니 멈춰 섰다. 복도의 커다란 창으로부터 은백색의 달빛이 쏟아져 들어와, 서재로 내려가는 계단을 비추고 있었다.
아릴은 손에 쥔 램프를 들어 올렸다. 일대가 순간 환하게 물들었다.
일렁이는 강렬한 빛이 이딜로스의 머리칼과 비슷한 것 같다고 생각한 아릴은 픽 웃음을 흘렸다.
자나 깨나 이딜로스의 생각.
‘내가 불러올 재앙을 떠올리면…… 이 생각도 그치는 것이 맞는데.’
아릴은 서재로 향하는 계단을 조심조심 내려갔다.
그러곤 일부러 이딜로스의 생각을 떨쳐 내기 위해 다른 것을 떠올렸다. 이를 테면, 지금 신경 쓰이는 엘리네 헤르핀드라든가.
기억은 바닷물에 휩쓸려 가라앉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가 아천타의 이름을 말했을 때, 그 인간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어.’
아천타의 정신 지배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아천타의 이름에 동요하지는 않게 될 것 같은데. 제 의식에 대한 통제를 완전히 잃게 되는 것이니 말이다.
그런데 그날 엘리네 헤르핀드는 어떤 표정을 지었는가.
놀라 동요하는 눈빛. 절박함이 드러나는 떨리는 눈썹. 그리고, 추락하는 아릴을 바라보며 빛낸, 닳고 닳은 간절함.
아릴은 서재에 도착해 수두룩한 책장들과 꽂혀 있는 책들을 램프로 비추었다.
‘크로델리아 공용어와 루다비토의 언어……. 엘리네 헤르핀드가 그냥 말한 것 같지가 않아.’
워낙 책을 자주 읽어서 책꽂이의 번호를 하나하나 외우고 있던 아릴은 손쉽게 언어 관련 책장을 찾아갔다.
‘여기 있다! 크로델리아 공용어와 루다비토 어의 역사.’
아릴은 램프를 한쪽 바닥에 내려놓고서 책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런데 하필 책이 맨 꼭대기에 위치해 있는 바람에 아릴은 발돋움까지 하며 낑낑댔다.
‘손이 안 닿아……!’
아릴은 책장을 짚은 한쪽 손에 중심을 잃지 않도록 무게를 실으며 조금 더 까치발을 들었다.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아릴의 관심은 오로지 제 키보다 한참이나 높은 책에만 쏠려 있었다.
‘난 작지 않아. 저 책을 꼭 꺼내고야 말겠다……!’
그때, 아래에서 뭔가가 우지끈하는 소리가 들렸다.
손으로 짚고 있던 견고한 책장이 휘청임과 동시에 중심을 잃은 아릴의 몸이 책장으로 쏠려 코를 박았다.
“아야!”
아픔에 눈물지으며 코를 만져 볼 새도 없이, 연이어 책장이 뒤로 기울었다. 여전히 책장을 붙잡고 있던 아릴은 넘어가는 책장에 끌려갔다.
“어어……!”
아릴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고통 대신, 부드러운 손길이 아릴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익숙한 체취가 들이닥쳤다. 아릴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곤 멍하니 깜빡였다.
“이딜로스?”
아릴이 돌아보려는 순간, 쿵! 소리가 나 반사적으로 흠칫했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뒤로 넘어간 책장이 뒤편에 있던 책장과 부딪친 게 보였다. 완전히 쓰러진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안심하기가 무섭게, 뒤편에 있던 책장도 무게에 못 이겨 뒤로 넘어지기 시작했다. 그 뒤편의 책장도, 그리고 그 뒤의 뒤편의 책장도.
쾅, 쾅, 쾅……. 연이은 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진 아릴은 입을 벌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도미노처럼 쓰러진 책장들을 본 이딜로스가 실소를 터트렸다. 조금 피로한 얼굴이 된 그가 그녀를 내려다봤다.
어쩐지 질타하는 기색이라, 아릴은 공손히 그의 팔 안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러나 이딜로스가 놓아주기는커녕 되려 더 힘을 주는 바람에 아릴은 물러나지도 못하고 다시금 그의 눈치를 살폈다.
이딜로스는 언짢은 기색으로 아릴을 한참이나 내려보더니 한마디 내뱉었다.
“사고뭉치네.”
“미안……. 내가 다시 세워 두고 정리할게.”
큰 사달을 낸 걸 알아서인지 아릴의 목소리는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정말 화가 난 건지 평소답지 않게 굳은 낯으로 아릴을 쳐다봤다.
아릴이 미안함에 우물쭈물했다. 아기 고양이 때 이후로는 이렇게 사고를 쳐 본 적이 없었기에 더 안절부절못했다.
그때, 갑자기 그가 우물거리는 아릴의 입에 키스했다. 아릴은 놀라 굳었고, 이딜로스는 능숙하게 아릴의 손을 찾아 붙잡고 연신 키스를 퍼부었다.
이 상황에 갑자기 입맞춤이라니. 원체 아무 상황에서나 뽀뽀해 대는 그였지만 이번엔 조금 당황스러웠다.
완전히 정신을 놓고 있던 아릴이 힘들게 이딜로스를 떼어 냈다.
벌렁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입가를 가린 아릴이 그를 소심하게 노려보다가 말했다.
“가, 갑자기 뭐야.”
“온종일 네 생각밖에 안 했는데 이렇게 예쁜 짓도 해 주니 너무 귀여워서 그만.”
아릴은 제 뒤의 처참한 광경을 떠올리곤 할 말이 없어졌다. 인간들 사이에선 돌려 까기라는 말도 있다고는 들었는데. 이딜로스의 반어법은 비난이지 진심인지 구분이 가질 않았다.
아릴은 이딜로스의 웃는 얼굴을 보자 이상하게도 마음이 울컥하는 것 같았다.
“속은 좀 괜찮아?”
“응…….”
“왜 날 안 불렀어. 서재도 나와 함께 왔으면 이 사달은 나지 않았을 텐데.”
“…….”
이딜로스는 아릴이 시선을 피하는 걸 보곤 픽 웃더니 그녀의 얼굴을 한 손으로 잡아 살며시 돌렸다.
그는 순순히 고개를 돌린 그녀의 양 뺨을 꾹 눌렀다. 요즘 그가 아릴에게서 보고 있는 재미였다. 아릴의 입이 붕어처럼 튀어나오자 이딜로스는 쿡쿡 웃었다.
장난스러운 이딜로스의 반응에 아릴이 눈썹을 모으곤 그를 째려봤다.
“어쩌지. 이렇게 예뻐선 화낼 엄두도 나질 않는데.”
“…….”
“여긴 네가 치울 필요 없어. 다치면 어떡하려고.”
이딜로스는 아릴의 붕어 입을 놓아주곤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어 정리해 주었다. 아릴은 뒤숭숭한 마음에 이딜로스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며 물었다.
“이딜로스, 여긴 어쩐 일이야? 내가 여기 있다는 거 알고 왔어?”
“응. 네가 서재로 갔다고 들어서. 그런데 넌 무슨 책을 찾길래 책장을 다 무너뜨린 거지?”
그의 말에 다시 한번 책장 예닐곱 개가 우르르 쓰러진 광경을 쳐다본 아릴이 겸연쩍게 대답했다.
“크로델리아 공용어와 루다비토 어의 역사…….”
“그래?”
이딜로스는 무너진 책장으로 가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그는 엉망이 된 잔해들 틈에서 책을 하나 건져 냈다.
“이거 맞아?”
“아, 응!”
이딜로스의 손에 들린 책을 확인한 아릴은 비로소 화색을 피웠다.
그녀는 이딜로스에게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어서 줘, 라며 눈빛을 반짝이며.
이딜로스의 한쪽 눈썹이 비뚜름해졌다.
“나보다 책이 더 반가운가 보지. 아까는 영 웃질 않더니.”
“아, 아니야. 당연히 이딜로스가 더 반갑지!”
“무슨 일 있지, 너.”
“응? 아닌데!”
“정말?”
“응, 나 정말 아무 일 없어!”
아릴은 보란 듯 맑게 웃었다. 이딜로스는 조금 미심쩍은 눈으로 아릴을 보더니 곧 가벼운 웃음을 걸쳤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만약 힘든 일 생기면 말해. 내가 뭐든 해결해 줄 테니.”
아릴은 대답 없이 웃었다. 대답하게 되면, 이딜로스에게 오늘만 벌써 세 번씩이나 거짓말을 하게 되는 거였다.
아릴은 미안함에 속으로만 마음을 털어놨다.
‘지금 일어난 일을 네게 말할 수는 없어. 난 내가 어긴 천명으로 인해 네게 닥칠 재앙이 두렵고, 넌…….’
그래, 넌. 그런 재앙 따위 달갑게 받을 것 같으니까 더욱 그 얘기를 할 수가 없어.
아릴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그가 찾아 준 책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다.
“이딜로스, 크로델리아 공용어와 루다비토의 문자가 관련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
“응, 알지. 고대에 크로델리아와 루다비토는 한 나라였으니까. 같은 문자를 썼는데 종교적 문제로 분열되면서 그 문자를 바탕으로 각기 다른 언어로 변화된 거잖아.”
아릴 역시 여러 책을 섭렵하면서 그러한 역사적 지식 정도는 알았다. 그러나 엘리네가 짚어 준 문자의 규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아는 것이 없어 책을 찾아보러 온 것이었다.
“이딜로스, 혹시 크로델리아에서 루다비토의 문자를 쓰는 경우가 있어?”
“거의 없지. 루다비토와 크로델리아는 종교적 대립이 커서 사이가 좋지 못해. 지금 크로델리아는 황제 폐하를 필두로 그쪽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 하지만, 루다비토 쪽에선 석연치 않아 하지.”
이딜로스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던 아릴은 문득 갸웃거렸다.
“응? 그런데 지난번에 내가 엿들은 거로는 네가 로비드를 루다비토로 출장 보냈잖아. 루다비토의 공주가 마르젠로트의 의상에 관심을 보인다면서 말이야. 그 나라가 제국을 좋아하지 않는데 어떻게 왕래도 없는 마르젠로트의 의상을 알아보고 적대국의 디자이너를 직접 초대를 해?”
“그래서 마르젠로트가 대단한 거지. 그 탓에 황제 폐하께서 날 달달 볶은 거고.”
이딜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답지 않게 과장된 움직임은 오늘따라 유독 표정이 좋지 못한 아릴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함이었다.
그의 마음이 통한 건지 아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럼 이제 널 괴롭히지 않겠네. 나였으면 네가 필요하단 걸 깨닫고 더는 위협하지 않을 거야.”
아릴의 말을 듣던 이딜로스가 피식 웃었다.
“그 사람은 내가 사업을 일으키면서부터 더 이상 날 죽일 생각이 없었어. 내가 제국의 번영에 쓸모가 있다는 걸 일찍이 눈치챈 모양이었지. 다만 계승권을 노릴 엄두도 내지 못하게 하자를 내려고 하는 거야. 그리고 그건, 내 사지가 멀쩡한 이상 계속될 테고.”
옆으로 시선을 흘긴 그가 나직한 웃음을 희미하게 내뱉었다. 와닿는 쓸쓸함에 아릴은 반사적으로 그를 안아 주려 했다가, 망설임 끝에 마음을 접었다.
아릴은 입 안을 살짝 깨물고는 그저 태평한 척 물었다.
“이곳에서 루다비토의 문자가 쓰이는 일이 거의 없다는 건, 그래도 쓰는 경우가 있긴 하다는 거지?”
“응. 루다비토와 접경지인 곳은 루다비토 어와 크로델리아 공용어를 섞어서 사용해.”
“그래? 거긴 여기서 많이 멀어?”
“라벨라르와는 정반대 방향이야. 또, 거긴 워낙 루다비토와 가까워서 오가기도 힘든 곳이지.”
아릴은 아쉬움과 동시에 조금 허망함이 밀려왔다. 이상하게도 엘리네가 그냥 한 말이 아닌 것 같아 파고들어 본 것인데, 정말 아릴을 까 내리기 위해 아무 말이나 한 거였나.
‘그밖에는 딱히 짐작 가는 것이 없는데…….’
아쉬운 표정을 짓는 아릴을 잠자코 보던 이딜로스가 별안간 입을 열었다.
“다른 경우도 있어. 루다비토 어가 제국에선 워낙 쓰이지 않아 배움의 폭이 좁은 데다 문자 간의 규칙성이 있어 그런가…….”
“응?”
“비밀리에 암호로도 간혹 쓰인다고 들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