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안녕, 나의 반려
‘아니야, 아니잖아…….’
쿵,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가. 쿵쿵, 심장이 무식하게 치닫는 소리가…… 뒤늦게 현실을 마주하고 도피하려는 의식을 붙잡았다.
눈앞이 흐렸다. 떨리는 시선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막연함에 심장이 짓밟히는 것처럼 아팠다.
나는 과거의 그 무참했던 시간보다 불우한 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보다 참담한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줄도 모르고.
이건 꿈이 아니다. 나를 안온하기만 하던 잔잔한 세상에서 건져 올리는 지독한 현실이었다.
행복을 찾아 불평등하게 홀로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금 법칙을 따라 흘러가기 시작했다.
그 잔인한 감각이, 섬뜩한 진실이…… 무수하게 쏟아지는 화살 비처럼 온몸을 관통했다.
* * *
그날 새벽, 나는 도망치듯이 이딜로스의 품에서 벗어나 방으로 달려갔다.
다시 한번 이딜로스를 만지고 싶었지만 겁이 나 그러지 못했다.
내 천명이 그런 것이라면. 정말로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라면, 나는 이미 천명을 어긴 것이 아닌가.
그냥 어긴 정도도 아니고, 천명이라는 존재가 무참할 정도로 어겼다.
그러면 난 어떻게 되는 거지? 아천타처럼 천벌을 받게 되는 건가.
하지만 아천타는 천명을 심하게 거스른 죄로 벌을 받게 된 거잖아. 인간을 대학살 했으니까.
그에 비하면 나는 그리 심하게…….
더 이상 생각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심하게 거스르지 않았다니. 도무지 수긍할 수 없지 않나.
나는 이미 사랑하는 내 가족이 있고, 무엇보다도 이딜로스와는 평생을 약속할 정도로 그 마음의 무게가 묵직했다.
천명을 어기지 않았다고 뻔뻔하게 우기기엔 이딜로스를 너무 사랑하고 있다는 거다.
나는 밤이 지나가도록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그럼 내게 반려라는 건 왜 있는 거지?’
반려는 하늘이 점지한 인연이었다.
사랑의 정도로만 따진다면 그는 내 반려가 맞다고 확언할 수 있었다. 역사를 거쳐 제대로 성년을 맞이한 신격체에게 반려가 없던 경우 역시 없었다.
‘하지만 그 수인들의 천명은 평범한 것이고, 내 천명은 그렇지 않잖아.’
본래 반려는 수인이 선택하고 하늘의 입증과 축복으로 반려의 증명을 하사받게 된다. 하지만 나는 지금 수인의 위치에 있지 않아 그런 걸 따질 수도 없었는데.
‘그럼 난 처음부터 반려가 없었고, 이딜로스 역시 내 반려가 아닐 가능성이 있는 건가? 내 천명 때문에…….’
몰라, 모르겠어.
나는 머리가 아파 눈을 질끈 감았다.
이건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직감만이 들었다.
천명이 잘못되었거나.
……내가 잘못되었거나.
아침이 밝자 이딜로스가 나를 찾아왔다. 나는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방문을 열었다.
이딜로스를 보는 하루가 거듭될수록 그를 더욱 사랑하게 되는 나였다. 그런 내게 이 천명은 너무나 잔인했다.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는 천명은 나를 비참하도록 괴롭혔다.
“아릴, 눈떠 보니 네가 없어서 한참 찾았어.”
이딜로스는 나를 보자마자 와락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 안기게 된 나는 사고가 마비되는 듯한 느낌과 함께, 꼼짝없이 굳고 말았다.
“무슨 장난을 치고 싶어서 날 두고 갔어, 응?”
이딜로스는 내 머리 위에 얼굴을 기대었다. 그에게서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향기가 풍겼다. 심장이 마구 할퀴어지는 것처럼 설렜다.
나는 이딜로스를 놓치고 싶지 않아 그의 옷자락을 세게 쥐었다. 손이 잘게 떨렸다.
분명 그런 마음이었고, 여전히 한기 따위는 모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나는 힘을 주어 그를 밀어냈다.
“……아릴?”
순순히 밀려난 이딜로스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나를 바라봤다.
고작 내 사정으로 그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억지로 웃으며 명랑하게 말했다.
“미안. 그게, 갑자기 속이 안 좋아져서 돌아왔어. 이딜로스한테 토하면 안 되니까…….”
“괜찮아? 지금은 좀 어때.”
이딜로스가 걱정이 묻어나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먹먹한 기분이 들어 시선을 돌려 버렸다.
“지금도 조금 안 좋아……. 머리도 어지러워서 혼자 있고 싶어. 이따가 괜찮아지면 찾아갈게.”
이딜로스는 근심을 거두지 못하더니 내 이마에 손을 대어 열을 재 보고는 말했다.
“……열은 없는데. 그럼 삼 사제님께 네 상태를 좀 봐 달라고 요청할 테니 그분이 다녀가신 후에 쉬어.”
이딜로스는 내 이마에 입을 가볍게 맞추곤 내 뺨을 쓰다듬었다.
“괜찮아지면 네가 찾아오지 말고 날 불러. 내가 여기로 올게.”
“응…….”
이딜로스가 방을 나갔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실은 좀 더 그의 품에 안기고, 그의 입맞춤을 받으며 애정을 갈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바닥을 짚은 두 손을 그러쥐었다. 눈썹이 일그러졌다.
그저 핑곗거리로 한 말이었는데 정말로 속이 메슥거렸다. 억센 감정의 요동에 속이 쓰린 것을 참으며, 나는 두 손에 얼굴을 묻었다.
잠시 뒤 찾아온 아슐란은 내가 주저앉아 있는 것을 보곤 황망히 달려와 나를 일으켰다.
“아릴 님, 괜찮으십니까? 공의 말은 들었습니다. 몸이 많이 편찮으십니까?”
“그런 거 아니야.”
“……네?”
“아픈 거 아니라고……. 아닌가, 아픈 게 맞는 건지도 몰라. 나 마음이 너무 아파…….”
“아릴 님, 대체 무슨 일이십니까.”
매사 차분하던 아슐란의 눈빛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괜히 여기저기 걱정을 끼치는 꼴이 될까 봐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조금 진정되십니까?”
“응, 고마워.”
아슐란은 내가 입을 열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나는 밤새워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을 그에게 털어놓았다.
“아슐란, 천명을 어기면 아무래도 천벌을 받겠지? 천명이란 건 조금만 어겨도 신께서 포용하시는 상한을 넘게 되는 걸까?”
내 질문에 아슐란이 낯을 굳혔다. 뭔가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하지만 구태여 내게 자세한 것을 묻지는 않았고, 그저 충실하게 대답만 내놓았다.
“신께서 포용하시는 정도는 저 역시 자세히 모르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의 선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수인은 엄연히 절반이 인간이니까요.”
“그렇구나.”
나는 체념하듯 대답했다. 어쨌거나 나는 아직 천벌을 받지 않은 상태 아닌가.
불행 중 다행인 소식에 안도하려던 때였다. 아슐란의 뒤이은 말이 내게 찬물을 부었다.
“천벌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징벌입니다. 대신 천벌을 받기 전까지는 직접적인 벌 대신, 재앙이 따른다고 합니다.”
“재앙? 그게 무슨…….”
“기록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천명을 어길 시에는 주변에 불행이 닥치는 재앙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입니다. 천명을 어김에 따라 그 강도는 가중될 것이고…….”
아슐란의 목소리가 점차 멀어지는 듯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러나 마음은 끓는 물에 집어넣은 것처럼 미친 듯이 팔딱거렸다.
최근에 이딜로스가 쓰러졌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천타가 나로 모자라 이딜로스까지 위협하는 게, 설마 이 재앙 때문인 건가?
‘그럼 난 이제 어떡하지……?’
겁에 질려 주먹을 말아 쥐었을 때였다. 어깨에 무게감 있는 온기가 실려 고개를 들었다. 아슐란이 진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든 잘 해결될 겁니다.”
아슐란이 진심 어린 미소를 지었다. 전적인 신뢰와 의지를 주는 말에 나는 입을 꾹 다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한결 안정되었다. 역시 아슐란은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아슐란은 내가 두서없이 꺼내는 걱정거리들을 잠자코 들어 주며 위로했다. 그러다 뭔가가 생각난 듯 갑자기 내게 양해를 구하곤 옷을 뒤적였다.
이윽고 그가 뭔가를 꺼내어 내밀었다. 편지였다.
“그러고 보니 제가 이곳에 오는 길에 누가 아릴 님께 전해 달라기에 받아 왔습니다.”
“누가라니? 사용인이 아니었어?”
어딘가 묘한 그의 말투를 꼬집은 것인데 아슐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인상 좋게 웃으며 말했다.
“새까만 옷을 입고 있더군요. 행동거지며 차림이 무척 수상했습니다.”
“……뭐? 그걸 느꼈으면서 주는 걸 덥석 받아 왔어? 다시 인사하면서 보내 주고?”
“제가 그분과 정중히 인사를 나눴다는 것도 아시다니요? 역시 아릴 님이십니다.”
나는 잠시 말문이 막혀 그를 보다가 눈가를 슬쩍 좁혔다. 왜인진 모르겠지만 갑자기 그가 내게 변비와 비만이라는 오진을 내렸던 게 생각난 것이다.
아슐란의 손에 들린 편지를 홱 낚아채어 갔다.
편지는 봉투만 봐서는 발신인도 수취인도 알 수가 없었다.
나는 문득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수상한 행태의 인간이 편지를 주었다니, 혹 아천타가 보내온 편지는 아닐까 싶어서.
하지만 막상 편지를 열었을 때, 나는 다른 쪽으로 놀라 굳었다. 편지의 말머리에 적힌 이름을 바라봤다.
다행히 아천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내가 예상치도 못했던 인물이자 경계해야 마땅할 이였다.
“엘리네 헤르핀드…….”
조용히 이름을 읊조리자 아슐란의 눈이 찰나 간 이채를 띠었다.
* * *
아릴은 낮에 있었던 아슐란과의 대화를 곱씹으며 잘 준비를 마쳤다. 협탁에 놓인 엘리네의 편지로 자꾸만 시선이 쏠렸다.
엘리네 헤르핀드.
아릴을 차가운 바닷물에 밀어 넣은, 아천타와 한패일 것이 분명한 여자.
아릴로서는 그녀를 좋아할 수 없었고, 그건 아마 엘리네 헤르핀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대뜸 편지를 보내오다니. 평소에 소식을 왕래하는 사이도 아닌데, 그녀의 행동은 아무래도 이상했다.
하지만 걱정과 달리, 엘리네 헤르핀드의 편지는 정말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렇다고 상식을 지키는 편지라고 한다면 그건 또 아니었지만.
아릴은 엘리네의 의중을 알 수가 없어 참지 못하고 다시금 편지를 펼쳤다.
[안녕하세요, 아펠리아 로제트 양.
저는 위대하고 명망 있는 대학자 집안의 여식, 엘리네 헤르핀드입니다.
우선 이 편지는 혼자서 읽기를 바랍니다. 당신만이 알아줘야 할 내용의 편지니까요.
그날 바다에서의 일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바람이 유독 세게 불어 당신이 날아가 버린 것이니 단순 사고이며 제 탓이 아니긴 하지만요.]
아릴은 코웃음을 쳤다. 네 번 가량을 읽었어도 정말이지 뻔뻔하고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괜히 짜증이 치밀던 아릴은 이 몰상식하고 무례한 편지를 아슐란의 앞에서 읽지 못한 게 아쉬워졌다.
편지의 앞부분을 읽고 그나마의 예의를 지켜 아슐란을 돌려보내었는데, 괜히 그랬다.
내일이 되면 저택의 사람을 모두 모아 이 뻔뻔한 편지를 낭독하리라 마음먹은 아릴은 편지를 계속 읽었다.
[혹시 크로델리아 공용어와 루다비토의 언어가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아시나요?
무식한 당신은 모르겠지만, 루다비토의 문자는 여러 방향으로 돌리면 크로델리아 공용어의 문자가 되는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요.
저만한 학자가 아니면 모르는 사실이에요, 이건.]
어쩌라고.
[그러고 보니 당신이 겨울 연회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다는 건 들었어요. 알렉 하르빈더의 <시계 침의 춤>을 연주했다지요?
당신의 형편없는 연주를 듣고 싶었는데, 그날은 제가 참석하지 못해 아쉽네요.]
갑작스러우며 두서없는 내용…….
아릴이 이 편지를 여러 번 읽은 이유가 그거였다. 대체 엘리네 헤르핀드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던 거다.
마냥 비난이라기엔…….
아릴은 시선을 내려 그다음 내용을 읽었다. 가장 이해할 수 없고 당황스러운 부분이 거기에 있었다.
[이렇게 말해서는 멍청한 당신은 모르겠죠. 그러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그래요, 전 구애하는 거예요. 제게 관심을 달라고.]
……대체 뭘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