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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38화 (128/191)

138화

“윽…….”

이딜로스는 온몸이 쑤셔 오는 찌뿌둥함에 인상을 찡그리다 억지로 눈을 떴다. 익숙한 장소가 시야에 들어왔다.

드디어 그 긴긴 꿈이 끝났구나.

이딜로스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누군가 눈치 빠르게 이딜로스를 붙잡아 일으켜 줬다.

덕분에 편히 일어날 수 있었던 이딜로스는 감사 인사라도 하려다가 상대를 보곤 얼어붙었다.

이딜로스는 버석하게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선생님?”

“오랫동안 잘도 자더구나.”

이딜로스는 재차 주변을 둘러봤다. 여긴 카델라로트 저가 아닌 그가 아릴과 함께 휴양 온 라젠트의 별장이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왜 있는 거지?

“여긴 어쩐 일로, 아니 어떻게 알고 오셨습니까?”

“네 소식을 듣고 안셀과 함께 왔지. 다행히 우리 딸이 일을 잘 마친 끝에 네가 무사히 깨어난 거다.”

“……우리 딸?”

“그래 내 딸.”

“설마 아릴을 말하는 겁니까?”

“그럼 내 딸이 그 아이 말고 누가 더 있다고?”

“…….”

이딜로스가 떨떠름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데비드는 그러한 대화가 재밌었는지 연신 웃으며 이딜로스에게 물이 담긴 컵을 내밀었다.

이딜로스는 짤막하게 감사하단 말을 남기고서 물을 받아 마셨다. 그가 빈 컵을 협탁에 내려 두며 말했다.

“그럼 아릴을 만나 보셨겠군요.”

“그렇지. 네 기억 속에 들어갈 수 있도록 도운 게 나다만.”

“……감사합니다. 그런데 아릴은 어디 있는 겁니까?”

“너보다 한참 전에 깨어나더니 생각할 거리가 있다며 방으로 돌아갔다.”

고개를 끄덕인 이딜로스는 그녀를 보러 갈 심산인지 침대에서 벗어나려 했다. 데비드는 그런 그를 붙잡아 도로 앉히며 말했다.

“지금 네 몸이 얼마나 쇠한지 모를 거다. 몸에 있던 아천타의 오랜 힘은 뿌리 뽑았지만, 그 자리가 회복될 때까지 기다려야 해.”

“전 멀쩡합니다. 몸이 조금 묵직해서 그렇지 정신은 오히려 맑고요.”

“네가 누워 있기만 한 게 자그마치 석 달이야.”

“……네?”

이딜로스는 귀를 의심했다.

“뭘 그리 놀라? 네가 갇혀 있던 곳에선 그보다 더한 시간이 흘렀을 텐데.”

“그럼 아릴도 저 때문에 석 달 동안이나 잠들어 있었던 겁니까? 아릴은 괜찮습니까?”

제 몸이고 뭐고 아릴부터 걱정하는 모습에 데비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아인 엄연히 신격체인데, 신이 수인을 빚을 때 너처럼 비실비실하게 만들었을까?”

대충 둘러대는 말에 이딜로스가 고집스레 그를 쳐다봤다. 데비드는 참 무섭게도 쳐다본다며 진저리 치며 말했다.

“아무 문제 없이 건강해. 아마 이따가 찾아올 모양이더구나. 그 전에 식사부터 해야겠다, 넌.”

안 그래도 허약한 놈이 영양실조에 걸렸겠다며 요란을 부리던 데비드는 당장 식사를 준비해 왔다. 그가 식사를 들고 돌아왔을 땐 안셀도 함께였다.

이딜로스가 멀쩡히 깨어나 있는 걸 본 안셀은 눈물을 잔뜩 매달고 달려들었다.

“전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지난 석 달간 전하께서 영영 깨어나지 못하실까 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정말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 기분이었다고요!”

“…….”

이딜로스는 아무 반응 없이 제게 매달려 엉엉 눈물을 흘리는 안셀을 바라봤다. 안셀은 이딜로스의 조용한 반응에 울먹이며 말했다.

“설마 이 와중에 일 걱정을 하시는 건 아니겠지요? 그간의 업무는 제가 임의로 맡아 처리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고맙다, 안셀.”

“……예?”

안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었지만, 이딜로스의 표정은 온화하게 풀어져 있었다.

그의 지난한 과거 속에서 유일하게 믿고 마멜라를 맡길 수 있었던 친우가 바로 안셀이었다. 아카데미 졸업 후에는 당연하다는 듯 이딜로스를 돕기 위해 발 벗고 나서기까지 했지.

과거를 돌이키며 픽 웃은 이딜로스가 진심을 담아 말했다.

“그간 네게 이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정신이 없어 그 간단한 말 한번 하지 못했더군. 넌 내게 늘 고마운 존재야, 안셀.”

“가,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으흑, 전하답지 않단 말입니다……!”

이딜로스의 진중한 말에 눈물을 줄줄 흘리게 된 안셀은 팔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쏟아 냈다. 그들을 지켜보던 데비드는 홀로 웃음 짓다가 말했다.

“자, 이제 그만하고 식사부터 하거라. 안셀 너도 그만 뚝 하고.”

“으흐흑.”

“하여간 마음 약한 녀석 같으니…….”

데비드는 침대 위에 간이 책상을 놓아 준 후에 식사를 올려 주었다. 그러곤 제대로 울음보가 터진 안셀을 토닥이며 말했다.

“애 좀 달래고 올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네게 해야 할 말도 있으니.”

“알겠습니다.”

데비드가 안셀을 데리고 방을 나갔다. 이딜로스는 홀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수프를 떠먹었다.

깨어나자마자 아릴의 얼굴을 볼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점만은 조금 아쉬웠다.

‘내가 석 달씩이나 쓰러져 있었다니.’

그 이상 걸리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할지. 그랬다간 마멜라가 방학을 맞아 돌아오는 시기와 겹쳤을 것이다.

금세 식사를 마친 이딜로스는 사용인을 불러 식기를 치워 달라 하곤 욕실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완전히 일어서 있자니 새삼 자신이 과거에 머무르다 왔다는 것이 실감 났다. 다름 아닌 눈높이의 차이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스물세 살의 이딜로스가 시야가 훨씬 높았다.

목욕까지 마친 그는 개운한 기분으로 다시금 침대에 기대앉았다.

원래라면 막 병상에서 일어난 상황에서도 일거리를 찾아 손에 쥐었겠지만, 이미 과거에서 지리멸렬하게 서류를 보다가 왔기 때문인지 일거리는 쳐다도 보고 싶지 않았다.

또한 미친 과로를 일삼던 그 과거를 다시 경험하니 자신이 그간 얼마나 무리했는지 깨닫기도 했다.

‘이제는 휴식과 일의 균형을 좀 맞춰야겠어.’

그리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노크했다. 들어오라 허락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누군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이딜로스, 몸은 괜찮아?”

그의 귀여운 아릴이었다.

아릴 역시 석 달 만에 깨어나서일까, 어쩐지 조금 기운 없어 보였다.

그녀를 보자 기분이 대번에 좋아진 그는 입꼬리가 올라가는 걸 주체하지 못하고 말했다.

“난 괜찮은데 넌? 가까이 와 봐.”

이딜로스는 아릴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아릴은 멀찍이 서 있기만 할 뿐, 가까이 올 기미가 없었다.

거기다 열어 둔 문에 몸을 걸친 채라, 금방이라도 다시 나갈 것 같았다.

이딜로스가 의아함을 느끼고 직접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자 아릴은 그제야 서둘러 그의 옆으로 왔다.

“안 돼! 아직 더 누워 있어.”

“응.”

이딜로스는 얌전히 그녀의 말에 따랐다. 그러면서 아릴을 당겨 침대 끝에 앉혔다.

아릴은 그의 시선을 잠시간 피하는가 싶더니 겨우 그와 눈을 마주쳤다.

“꿈에서는 요정 같더니, 현실에서는 천사 같네.”

그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내뱉곤 아릴의 손을 깍지 껴 뒤로 당겼다. 아릴은 침대를 짚을 새도 없이 그의 다리 위로 풀썩 쓰러졌다.

눈을 휘둥그레 뜨니 이딜로스가 입매를 올려 만족스럽게 씩 웃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는 허리를 숙여 아릴에게 입을 맞췄다. 가벼운 입맞춤에 아릴이 움찔하며 굳었다.

이딜로스는 그녀의 이상한 반응에 잠시 멈칫했다. 그러다 확인하듯 다시 한번 가볍게 뽀뽀하다가, 이내 완전히 그녀의 입술을 머금었다.

우윳빛 뺨을 만지다가, 보드라운 눈송이 색 머리칼을 넘겨 준 그는 아릴의 입술을 살짝 깨물다 놓으며 능란하게 그녀의 입술이 벌어지게끔 만들었다.

부드럽고도 습한 감촉이 엉켜들자 아릴의 눈썹은 금세 바르르 떨며 허물어졌다.

아까부터 그를 밀어내려는 것처럼 그의 가슴팍을 짚고 있던 손에도 힘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이딜로스는 아릴에게 자신의 한결같은 애정을 보여 주고 싶은 만큼 그녀의 사랑스럽고 달콤한 입술을 마구 괴롭혔다.

아릴의 목선을 훑어 오르듯이 손을 옮기던 그는 그녀의 귓바퀴를 지분거렸다. 그러곤 그녀의 입 안을 좀 더 침범해 여린 살들을 모조리 헤집을 작정으로 고개를 기울였을 때였다.

이딜로스가 흠칫했다. 그리고 갑작스레 입술을 떨어트렸다.

온기가 사라지자 아릴은 찬물을 맞은 것처럼 눈을 번쩍 떴다.

이딜로스는 아릴의 붉어진 입술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릴.”

“응?”

“아 해 봐.”

“아?”

아릴이 어리둥절하게 입술을 벌린 순간, 이딜로스의 엄지가 그녀의 입으로 쏙 들어왔다.

아릴은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입을 우물거렸다. 어설픈 발음이 흘러나왔다.

“머, 머 해……!”

“크게 벌려 봐. 어서, 아.”

아릴이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그럴 때마다 이딜로스의 손가락에 뾰족한 무언가가 닿아 그가 흠칫했다.

이딜로스는 다른 손으로 아릴의 턱을 잡아 단단히 고정하고서 기어이 그녀의 입을 벌렸다.

“너 송곳니가…….”

이딜로스가 심각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아릴이 서럽게 울먹거렸다. 이딜로스는 당황해 그녀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아릴, 왜 울어. 내가 손 넣어서 그래? 미안해, 앞으론 안 그럴게.”

“아니, 그런 거 아니야……. 그건 좋았는데…….”

처음엔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 내는 정도에 그쳤던 아릴이 이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이딜로스는 당혹감에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아릴을 앉혀 끌어안고 열심히 토닥거렸다.

아릴이 훌쩍거리며 말했다.

“나, 나 송곳니가 엄청 뾰족해졌어……. 손톱도 엄청 날카로워져서 네가 깨어나기 전에 잘랐어. 몸도 이상해져서 아까 문손잡이도 부러트렸단 말이야……. 나 정말 호랑이가 되었나 봐.”

아릴이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울었다. 아릴의 말을 듣고 있던 이딜로스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다.

심각해하는 아릴을 두고 웃어선 안 된다는 건 아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릴의 행동이 너무 귀여웠다. 그래서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애써 입술을 꽉 깨물다가, 마음을 추스르던 이딜로스가 물었다.

“호랑이가 된 게 싫어서 그래? 아니면 설마, 내가 네 송곳니가 날카로워지고 손톱이 길어졌다고 널 싫어할까 봐?”

“…….”

갑자기 아릴이 조용해졌다. 그의 말이 맞았던 모양이다.

이딜로스는 한숨을 내쉬다가 그녀를 떨어트리곤 진지하게 물었다.

“그게 왜 걱정이야?”

“넌 고양이인 내 모습은 익숙하지만 호랑이인 나는…….”

“고양이일 땐 귀엽고, 사람일 땐 예쁜데 이젠 호랑이가 되어 멋있기까지 하지. 네가 날 아주 단단히 옭아맬 작정인가 봐.”

아릴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이딜로스는 아릴의 눈가를 손으로 조심스레 문질러 닦았다.

“어떤 모습인들 어때. 네가 아릴이라는 건 변치 않고, 넌 뭐든 예쁜데.”

그의 말에 아릴의 눈이 또 한 번 물기에 일렁거렸다. 이윽고 아릴이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딜로스가 ‘윽’ 소리를 흘렸다.

“기쁘단 표현이 너무 과격한데……. 너 지금 힘이 너무 세.”

아릴은 배시시 웃으며 힘만 살짝 풀곤 그의 목에 고개를 묻었다. 이딜로스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침대에 몸을 푹 기대었다.

* * *

“아, 선생님.”

이딜로스는 밤이 되어서야 손님을 맞이했다.

곧 잘 시간인데 외출복 차림으로 찾아온 데비드는 제집처럼 편하게 아무 의자를 차지하며 말했다.

“앉아 봐.”

그가 무엇 때문에 찾아온 것인지 짐작하고 있었기에 이딜로스는 군말 없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어디 가십니까?”

“네가 석 달이나 잠들어 있던 바람에 내가 에펜도르를 너무 오래 비웠지 않느냐.”

“아…… 폐를 끼쳤군요. 죄송합니다.”

“됐다. 너만 무사하면 되는 것이지. 너는 내 수제자니까.”

장난스럽게 말을 꺼낸 데비드는 곧 진지하게 낯을 굳혔다. 그는 조금 착잡한 눈빛으로 말을 꺼냈다.

“너와 수인의 사이는…… 예상은 했다만, 생각보다도 더 돈독하더구나.”

“……네.”

“난 여러 해를 살며 많은 경우를 봐 왔어. 그러다 보니 알게 되는 게 있더구나. 애초부터 인연 같은 건 하늘이 점지해 봤자 소용이 없다는 거지. 제 의지에 따라 개척할 수도 있는 거고, 그리 얻어 낸 인연은 가시밭길일지라도 하늘이 엮은 것보다도 굳은 힘을 가진다는 거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의미 모를 말들에 이딜로스가 눈가를 살짝 찌푸렸다. 데비드는 얕은 웃음을 남기고는 말했다.

“별거 아니야. 단지 알고 있으란 거지. 네가 가진 인연은 신조차 끊어 낼 수 없다는 걸 말이다.”

“…….”

“사설이 길었군. 그럼 이제 이야기해 주마. 아릴에 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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