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주변을 둘러봤다. 나는 정원 한복판에 홀로 서 있었다. 근처에 이딜로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려니 했다. 아슐란이 내 기억을 복구해 주었을 때 내가 그랬듯이, 이딜로스도 아마 제 과거를 다시금 경험하고 있겠지.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뭔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맹렬히 들리더니, 갑자기 내 발치 앞에 뭔가가 날아와 팽팽하게 꽂혔다. 광채가 번뜩이는 검이었다.
나는 기겁해 펄쩍 뛰었다. 너무 놀라 심장이 쿵쾅거렸다.
‘뭐, 뭐야…….’
서둘러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앞쪽에, 무장한 암살자들에게 포위된 두 명의 인영이 보였다.
내게도 익숙한 그들은 바로, 전대 공작과 그의 부인이었다. 그들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이들에 경계하며 뒤로 조금씩 물러나고 있었다.
휴양을 즐기러 온 그들에게 무기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었다.
나는 안타까움에 침음했다. 그 사고가 일어난 후에 여러 혈흔과 날붙이들이 있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나.
황제가 보낸 암살자들로 인해 공작 부부는 목숨을 잃게 되는 건가 보다.
‘이딜로스는 부모님이 살해당한 후에 이 광경을 보게 된 걸까……. 그래서 이미 온기가 식은 부모님의 시신을 하염없이 지키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그러나, 놀랍게도 상황은 다르게 흘러갔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내가 직감한 참극과는 전혀 달랐다.
다가오는 적 하나를 단숨에 제압한 공작이 그대로 무기를 빼앗아 반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작 부인을 지켜 가면서, 아무런 무리 없이 암살자들을 쓰러트리는 놀라운 실력에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가만 생각해 보니 이딜로스가 작위를 이으면서 카델라로트가 사업을 시작한 것이지. 그 이전까지는 상계를 독점한 가문은 아니었다.
대신에 당시의 카델라로트는 황실을 지키는 강인하고 굳건한 검이었다.
그래, 어딘가에서 본 기억이 난다. 전대 카델라로트 공작은 크로델리아 황실 제1 근위대의 단장이었다.
현 황제는 즉위하면서 그의 동생이었던 전대 공작에게 자신을 가장 가까이서 수호하는 기사단의 단장직을 하사했다.
빠르게 기억을 더듬던 나는 뭔가 들어맞지 않는 느낌에 미간을 찌푸렸다.
황제가 제위를 두고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면, 왜 즉위할 때 그 자리를 하사한 거지?
제 근처에 무장한 그를 두는 것만큼이나 위협적인 건 없었을 텐데.
복잡하게 머리를 굴리는 사이, 전대 공작은 군더더기 없는 매서운 실력으로 저를 포위한 이들을 모두 쓰러트렸다.
새삼 이딜로스의 그 검술 실력이 타고난 것임을 실감하게 되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실력이 나왔나 싶었더니, 아버지한테 물려받은 거구나.
나는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저 멀리서부터 이딜로스의 기척을 느꼈다.
이딜로스가 오고 있는 듯했다.
그런데…… 공작 부부는 여전히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했다. 이러면 기억과 다르지 않은가.
뭔가 이상하다. 저 암살자들이 벌인 일이 아니라면, 대체 이딜로스의 부모님을 살해한 건 누구란 말이지?
이 기억 속에 아천타의 힘이 남아 있을 거라는 내 예상과 달리 그런 것들도 딱히 보이지 않았다.
무사히 서로의 상태를 확인하는 부부의 모습을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지켜봤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질식할 듯한 음산한 기운이 치밀기 시작했다. 속이 뒤틀릴 듯한 구역질이 치밀어 나는 반사적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뭐지……?’
근처에서 수풀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머리칼과 솜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꼈다.
빠르게 수풀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멈추었다.
전대 공작도 이상함을 느낀 것인지 움직임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숨 막히는 적막이 이어졌다.
답답함에 눈가를 움찔한 순간이었다. 수풀이 사아악 파헤쳐지는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끔찍할 정도로 짙고 커다란 그림자가 부부의 인영을 모조리 집어삼켰다.
나는 반사적으로 뒷걸음질했다. 본능이 소리쳤다. 저걸 보아선 안 된다고. 하지만 고개를 돌릴 새도 없이 몸이 굳어 버렸다.
나는 온몸이 달달 떨리는 것을 느끼며 그 거대한 무언가를 직시했다.
틀림없다. 저건 아천타였다.
새까만 몸체에, 형상이 가려져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음산한 기운을 두르고 있는, 기껏해야 네발 달린 짐승이라는 것만 알아볼 수 있는 존재.
나는 입가를 틀어막은 손에 힘을 주었다. 간헐적으로 숨이 떨려 왔다.
도대체 얼마나 악독하면 신격체였던 것이 숨이 막힐 듯한 음기를 품을 수 있을까.
인간의 몇 배는 되는, 마치 책에서나 나오던 드래곤처럼 무지막지한 크기였다.
거대한 위압감을 가진 생명체가 부부에게 한 걸음씩 다가갔다.
같은 신격체인 나조차 두려움에 굳은 채였다. 한낱 인간인 부부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아천타는 상대를 가늠하듯 잠시 멈춰 섰다가, 흔들리는 수풀 소리가 멎기도 전에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삽시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돋아난 날카로운 송곳니와 그로부터 새어 나오는 낮은 울음소리가 순식간에 모든 걸 압살하고 부부를 처참하게 물어뜯었다.
그 순간 점차 가까워지던 이딜로스의 기척이 부자연스럽게 멈췄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잔인하고 가혹한 광경에 넋을 놓고 있던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바로 뒤편에 멈춰 선 이딜로스가 보였다.
충격을 머금고 흔들리는 이딜로스의 눈이, 겁에 질려 끊어질 것처럼 몰아쉬는 그의 호흡이. 그리고, 놀란 나머지 주저앉아 뒤로 물러나려는 모습이 보였다.
‘설마…….’
나는 그의 모습에서 다시금 아천타를 바라봤다. 거대한 네발의 짐승.
이전까지만 해도 동물을 무서워하지 않던 이딜로스. 그리고 지금, 두려움에 숨도 제대로 내쉬지 못하는…… 이딜로스.
깨달았다. 이딜로스의 짐승에 대한 트라우마는 아천타가 남긴 것이다.
나는 경계 어린 마음으로 아천타의 동태를 살폈다. 이딜로스가 털썩 주저앉는 소리에 아천타는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색을 가늠할 수 없는 날카로운 눈동자 속에 이딜로스의 모습이 담겼다.
그 순간, ‘툭’하는 소리와 함께 아천타의 입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전대 공작의 시신이었다.
이딜로스는 숨을 할딱이며 처참하게 찢어발겨진 제 아비를 한 번, 눈앞의 짐승을 한 번 바라봤다.
비릿한 피 냄새가 풍겨 와 일대를 잠식했다. 이딜로스는 입을 틀어막고 헛구역질했다.
그때 아천타가 이딜로스에게로 한 걸음씩 다가가기 시작했다. 검은 짐승이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묵직한 발소리가 천지가 뒤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벌어진 입가와 날카로운 송곳니 새로, 아마 그의 부모님의 것일 진득한 피가 뚝뚝 떨어졌다.
“오, 오지 마…….”
이딜로스는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분명 이건 이딜로스의 기억 속이고, 과거일 뿐이기에 그가 무사하다는 게 당연한 수순인데…….
어쩐지 아천타라면 이 기억과 정해진 미래라는 틀을 부수고 당장에 달려들어 이딜로스를 물어뜯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치미는 불안감에 심장이 불규칙적으로 요동쳤다.
아천타가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이딜로스로부터 몇 걸음 앞이었다.
나는 입을 틀어막고 있던 손을 덜덜 떨며 내렸다. 잘 생각해야 한다.
이딜로스의 이 끔찍한 기억을 마냥 흘려보내다가 기회를 놓쳐 또다시 그에게 이 기억을 반복하게 만들고 싶지 않다면.
‘지금 여기서 아천타의 기운이 응집되어 있는 건 저것밖에 없어.’
그 말은, 내가 없애야 하는 것이 저 괴생명체라는 것이다.
아천타는 아무런 움직임 없이 이딜로스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괴상하고도 낮은 울음소리와 함께, 인간의 말소리가 들렸다.
“카얀 노아르크…….”
그 말에 나는 몸을 움칠했다.
‘카얀 노아르크?’
처음 듣는 말인데 낯이 익었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이지?
긴장을 머금고 그를 보고 있자, 돌연 아천타가 섬뜩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갑자기 이딜로스를 향해 포악하게 이를 드러냈다. 멀리서 봐도 아천타가 이딜로스에게 적개심을 품었다는 걸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딜로스가 곧 졸도할 것처럼 겁에 질린 게 보였다. 숨이 넘어갈 듯 호흡을 헐떡대던 이딜로스가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손과 다리에 힘이 빠지는 건지 아무런 진전 없이 미끄러지기만 반복했다.
그 모습을 차마 지켜볼 수 없던 나는 이를 악물고 뛰쳐나가 이딜로스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의 기억에 참견하고 마는 꼴이었다. 하지만 참견하지를 않으면, 도대체 어떻게 눈앞의 괴물을 없애 버릴 수 있단 말인가?
설마 이딜로스에게 다시금 온갖 트라우마를 다 심어 준 뒤에, 아천타가 볼일을 마치고 떠나려 할 때 기어 나와 이걸 없애라고?
아니,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이딜로스에게 또다시 같은 트라우마를 남게 할 수 없었다.
이딜로스의 앞을 가로막고 선 나는 아천타를 노려봤다. 내 등장으로 빚어진 기억의 오류인 건지 뭔지, 아천타가 돌연 이를 드러내던 것을 멈췄다.
나는 서둘러 고개만 돌려 이딜로스를 살폈다.
이딜로스는 여전히 떨리는 숨을 내쉬고 있었지만, 나를 보곤 정신을 차린 듯했다. 그의 눈에 초점이 점차 돌아왔다.
그의 상태가 호전되었다는 걸 확인한 나는 다시금 아천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때는 이딜로스와 내가 만나기도 전이다. 아천타는 대체 왜 그의 부모를 죽여 이딜로스의 안온하고 평화로운 일상을 해치고 극심한 트라우마를 준 거지?
나는 까드득 소리가 나게 치아를 물었다.
이딜로스가 그렇게나 망가져 있었던 것. 그가 이토록 힘든 과거를 견뎌 온 것.
그래, 그 모든 건 눈앞의 존재 때문이었다.
화가 치밀었다.
고작 한 존재 때문에.
그 때문에 나로 모자라 이딜로스의 행복마저 무너졌다는 게, 지독하게 화가 났다.
격앙에 온몸으로 이상한 기운이 치솟는 게 느껴졌다. 아천타를 물리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눈앞의 존재와 비등한 힘이었다.
간절한 마음에 그 힘을 달게 받아들이는 순간, 시야가 훌쩍 높아졌다. 그 찰나는 마치 고양이가 될 때와 같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기 고양이가 가지는 작달막한 눈높이와 덩치가 아니었다.
나는 돋아난 커다란 앞발로 경고하듯 발을 세게 굴렀다. 땅이 뒤흔들리는 충격과 동시에 이를 드러냈다.
다음으로, 크고 기세 사나운 포효를 내뱉으며 눈앞의 짐승에게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목이 물린 아천타에게 신성한 기운을 쏟아 넣자 그것의 모습과 검은 기운이 먼지처럼 파스스 흩어졌다.
단 한 번에 아천타가 사라진 게 못내 아쉬워 으르릉 소리를 흘렸다. 좀 더 짓이겨 물어뜯고 싶었다. 나와 이딜로스가 겪은 고통만큼!
나는 거친 숨을 내뱉으며 겨우 진정을 찾았다. 고개를 돌리자 조금 전의 자세 그대로 굳어 있는 이딜로스가 보였다.
그에게 다가가려던 나는 그 자리에서 굳었다.
그의 눈에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그건 더 이상 조그맣고 귀여운 아기 고양이가 아니었다.
거대하고 늠름하며 매섭기 그지 없는…… 호랑이였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딜로스가 무서워할 거야……!’
그러한 생각에 지레 내가 겁먹고 말았다. 나는 최대한 몸을 옹송그린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고양이였던 내가 호랑이가 되다니. 하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내 본모습이 이것이고 껍데기 쪽이 고양이였다는 것을.
그간 고양이로 돌아갈 때마다 헤맬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한순간에 이해되었다. 내 모습이 아닌 것으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에…….
“……아릴.”
도리어 겁에 질린 나와 달리, 이딜로스는 결연한 낯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아까의 충격이 남아 있을 텐데, 그는 억지로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몇 차례 물러나다가 멈췄다. 그의 눈이 흔들리고 있긴 했으나 결코 나를 겁내는 표정은 아니었다.
내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곧장 내 목을 끌어안았다. 무리하고 서있었던 건지 이딜로스는 무너지듯 내 푹신한 털에 기대었다.
“고마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속상하다는 듯 말했다.
“말했었잖아. 이제 너만은 무섭지 않다고…….”
그의 말에 눈물이 차오르려 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빠르게 뛰는 그의 심장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마침내 종지부를 찍은 기억에 따라 점차 멀어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