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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35화 (125/191)

135화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의 말 하나하나에 온몸에 전율이 이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상처 나고 지저분한 그의 뺨을 손으로 문질렀다.

“이딜로스…….”

그가 내 손을 잡아 고개를 기울였다. 그 행동이 정말로 내게 모든 것을 바칠 것이며 그가 오직 나만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희열이 몸을 휘감는 것 같았다. 그가 오로지 나의 것이라는 소유욕. 나만을 바라보고 믿을 것이라는 정복감.

황금색의 진중한 눈을 홀린 듯이 보며 도취되어 있기도 잠시, 뒤늦게 여기가 그의 기억 속이라는 걸 상기했다.

정신을 차린 나는 서둘러 말했다.

“이딜로스! 이렇게 네 과거와 무관한 날 끌어들이면 안 돼. 지난번처럼 갑자기 사라지고 말 거야.”

“지난번?”

“그때 함께 돌다리를 올랐었잖아. 그러니까 네 부모님이…….”

“아.”

내가 말과 표정을 흐리자 이딜로스가 깨달은 듯 입을 열었다.

“갑자기 사라져서 놀라긴 했어. 난 그때 중요한 말을 하고 있었는데 말이지.”

“……아, 소원을 들어 달라고 했지. 소원이 뭐였는데?”

이딜로스가 피식거렸다. 그가 한쪽 입매를 끌어 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넌 참 대단해. 아니면 내 취향이 한결같다고 해야 할지. 그때 난 널 기억하지도 못했는데 고작 한 달 만에 다시 너한테 빠지게 만들었잖아.”

“……응?”

“난 그날, 너한테 소원으로 입 맞춰 달라고 하려 했어.”

“뭐? 네가?”

상상도 못 한 그의 소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릴 적의 난 맹랑하기도 했지.”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됐어?”

“……뭘?”

“수줍음이랑 생각이 많아졌잖아. 얼굴 본 지 한 달 만에 뽀뽀하자는 그 모습은 어디 간 거야?”

“그래서 싫어? ……저돌적으로 굴길 바라는 건가?”

이딜로스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의 눈빛이 묘하게 진심이라, 나는 푸하하 웃음을 흘렸다.

“장난이야. 난 이딜로스의 그 모습이 좋아. 아니지, 난 그냥 너라면 다 좋아. 지금 여기서 이딜로스가 날 거꾸로 매달아 놓고 가도 난 좋아할 거야.”

“……날 이상할 정도로 좋아하는군.”

“난 처음부터 그랬는데. 그래서 지금 이딜로스가 날 이렇게 알아봐 준 게 너무 기뻐서 하늘을 날 수도 있을 것 같은걸.”

이딜로스가 작게 소리 내어 웃더니 고개를 숙여 내게 입을 연신 맞추었다.

“우리 집 고양이는 영특하기도 하지. 하늘을 날 수도 있고. 사람일 때나 고양이일 때나 못 하는 게 없어.”

“간지러워!”

“너무 예뻐, 넌.”

“잠깐만, 그만해! 우리 정신 차리자. 어서 여기서 깨어나야 하잖아.”

나를 껴안으려는 이딜로스를 애써 밀어내곤 눈을 치켜떴다. 내 기세에 이딜로스가 입꼬리를 올리는가 싶더니 순순히 물러났다.

이딜로스의 애정 어린 말에 여기가 어딘지도 잊고 휩쓸려 버리다니.

이곳이 그의 기억 속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인지, 왜인지 그와 나뿐인 세계에 있는 것 같아 그랬다.

날 물끄러미 보며 웃는 그에게 진지한 낯으로 물었다.

“원래 과거에서도 이곳에 왔었어?”

“응.”

“여긴 왜 온 거야?”

“교직을 관두셨던 데비드 선생님을 뵈러. 대신전에서 성직을 하시다가 이곳으로 자리를 옮겼다고 들었었거든.”

“그럼 어서 만나. 여긴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찾아볼까?”

“아니. 선생님은 여기 안 계셔. 도움을 요청하러 왔더니 이미 성직도 관두고 홀연히 떠나셨다더군.”

“그럼 허탕만 치고 돌아가는 게 다야?”

“대신 지금의 삼 사제님을 뵈었었지. 다친 날 치료해 줬어. 한 시간 정도 그림을 노려보고 있었더니 나한테 오시더군. 그때 데비드 선생님을 불러 달라 하였더니 그분은 이미 떠나고 없다는 말을 하셨지.”

한 시간씩이나 노려봤다니……. 잠시 말문이 막혔던 나는 곧 정신을 차리곤 물었다.

“아, 그럼……. 이딜로스, 우리가 여기 온 지 얼마나 됐지?”

“한 시간쯤?”

“뭐? 어서 그림 노려보러 가!”

이딜로스의 등을 떠밀어 그를 신상 앞으로 보내 버렸다. 이딜로스는 멀찍이 떨어진 나를 힐끔힐끔 돌아보더니, 내가 눈을 부릅뜨자 고개를 바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딜로스의 말대로 아슐란이 나타났다. 느긋한 걸음걸이로 예배실 안으로 들어온 아슐란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른 시간부터 기도를 하러 오셨군요.”

아슐란의 외양은 지금과 변함이 없었다. 이때도 시원스러운 선을 가진 빼어난 생김새에 사람의 정신을 쏙 빼게 만드는 기묘한 무언가가 있었다.

‘어떻게 6년의 시간 차가 있는데 지금과 같을 수가 있지? 강한 신성력을 타고나면 원래 이런 건가.’

마멜라만 해도 6년이라는 세월에 키가 두 배는 자랐는데, 아슐란은 어떻게 된 건지 지금의 모습을 빼다 박은 거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저 인간은 나이가 대체 몇인 거지. 알고 보니 백 살도 넘은 거 아니야?’

내가 홀로 아슐란이 가진 미모의 비밀을 파헤치는 사이, 이딜로스는 그에게 데비드에 대해 물었다. 아슐란은 유감스러운 낯으로 고개를 내저었다.

“저도 전해 들은 게 다지만, 그분은 사흘도 머무르지 않고 이곳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그렇습니까…….”

그 뒤로는 이딜로스의 말대로였다. 아슐란은 처음부터 관심을 기울이고 있던 이딜로스의 상태에 대해 언급하더니 그를 손수 치료해 줬다.

이렇게 낯선 이에게도 선뜻 도움을 주다니. 신전에서 날 괴롭히던 다른 사제들을 떠올리면 아슐란은 그냥 사제가 아니라 무슨 천사처럼 느껴졌다.

‘그래도 내 생각이 맞다면……. 날 괴롭혔던 인간들도 아마 아천타에게 정신이 지배되어 있었을 거야. 정말로 다들 내가 싫어서 그랬던 거라면 그건 정말 못된 거지만.’

그러한 생각을 하자니 나는 문득 아슐란이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아슐란은 어떻게 날 도울 수 있었던 거지? 신전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기엔…… 거의 2년이 되어 가는 지금까지도 날 돕고 있잖아.’

아천타가 2년 동안 아슐란에게 접근 한번 하지 않았을 리는 없는데.

신전의 모든 이들을 지배해 날 괴롭히라고 명할 정도로 집요하게 인간들을 통제하지 않았던가.

‘설마 다들 정말로 내가 싫어서 괴롭혔던 건가…….’

생각을 이어 가는 사이 이딜로스가 상처 하나 없이 멀끔해진 몸으로 아슐란에게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하곤 걸음을 돌렸다.

나는 이딜로스의 일이 끝났음을 눈치채고 먼저 예배실을 통과해 나갔다.

신전을 나온 이딜로스는 근처 숲에 묶어 두었던 말에 올라타며 말했다.

“과거대로 한다면 이제 난 황궁으로 가야 해.”

그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둘이서 말을 타면 불편해질 것 같아 고개를 내저었다.

“난 괜찮아. 네가 멀리 가면 알아서 널 따라 이동되니까.”

“……내가 왜 널 두고 혼자 가야 하지? 내가 외롭고 쓸쓸하게 돌아갔으면 좋겠어?”

“그건 아니지만…….”

“이리 와. 난 너랑 한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아. 이 기억 속에서는 더욱.”

그의 말에 나는 별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딜로스가 산뜻하게 미소 짓더니 단숨에 내 허리를 붙잡아 제 앞에 앉혔다.

그는 말을 몰기 전에, 한차례 나를 껴안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어 입을 연신 맞추었다. 내가 참다못해 몸을 비틀자 그제서야 출발했다.

말을 타고 달리던 중에, 나는 소심하게 입을 열었다.

“이딜로스, 네가 과거 속에 갇히게 된 건 아천타 때문이야. 네가 지난번에 마셨던 그 차가…… 인간의 정신을 통제할 수 있는 아천타의 비늘이 들어 있어서.”

“……그런 걸 마셨던 거라니, 갑자기 속이 안 좋아지는데.”

“아천타가 네게 그런 짓을 한 게 아무래도 내 탓인 것 같아.”

이딜로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하지만 아래에 보이는 고삐를 쥔 그의 손에 힘이 억세게 들어간 듯 손등에 핏줄이 불거진 게 보였다.

이 과거를 다시 돌이키게 했으니 어쩌면 나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그라면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만, 나는 사과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딜로스가 말을 가로채는 게 더 빨랐다.

“네 탓이 아니야.”

“…….”

“폐하가 날 미워하시니 좀 없애 달라고 아천타에게 부탁했을 수도 있는 거니까. 그리고 다리에서 네가 갑자기 사라졌던 것도, 어쩌면 네 탓이 아닐 수도 있고.”

“그게 무슨 말이야?”

나는 이딜로스를 돌아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그의 과거에 멋대로 참견해서 그런 게 맞는데, 내 탓이 아닐 수 있다니.

나를 마주 내려다본 그가 조금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했다.

“난 원래부터 그날의 기억이 온전치 않았어. 분명 내 두 눈으로 부모님이 사고를 당하시는 걸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결정적인 순간은 떠오르지가 않아. 지금도 그래.”

“지금도 그렇다니?”

“그 기억만 제대로 못 봤으니까.”

쉴 새 없이 말을 몰고 달린 끝에 황궁에 도착했다. 이딜로스는 지금쯤 귀족들을 모아 회의를 열고 있을 황제에게 망설임 없이 달려갔다.

“머, 멈추십시오.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그를 막아선 기사들은 이딜로스의 초라한 행색을 보곤 잠시 당황하는 듯했다.

서로 ‘의원을 불러야 하나’ 눈치를 주고받는 게 보였다.

“놓으십시오. 지금 날 들여보내지 않는다면 못 볼 꼴을 보게 될 겁니다.”

이딜로스는 막아서는 기사 둘을 제치고는 회장의 문을 벌컥 열었다. 그 소란에 회장 속 귀족들의 이목이 한순간에 그에게로 몰렸다.

갑작스레 들이닥친 불청객을 확인한 이들은 모두 한결같은 표정이 되었다.

이딜로스의 처참하고 지저분한 몰골에 놀라거나, 의아해하거나.

그건 황제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니, 오히려 그는 이딜로스의 등장에 당황한 것처럼 눈을 부릅떴다.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래, 이번에는 정말로 죽을 거라 생각했던 게 살아 돌아오니 놀랄 만도 하겠지.

“이딜로스, 네가 여긴 웬일이더냐. 꼴은 또…… 왜 그렇고?”

황제는 모른 척 발뺌을 시도했다. 나는 틈만 나면 이딜로스에게 거짓말하는 저 주둥이를 없애 버릴까 진지하게 고민했다.

“원래라면 아카데미에 있을 시간일 텐데, 학업을 이리 소홀히 하다니. 이래서야 가문은 어찌 이어받을 수 있을지 걱정이구나.”

도가 지나친 걱정이었다.

이딜로스는 이미 아버지의 작위를 이어받은 공작인데, 황제의 말은 마치 그를 가주로 취급하지도 않는 것 같았다.

이딜로스는 싸늘히 소리를 씹어 냈다.

“폐하.”

“아무래도 심하게 다친 모양이니 당장 의원을 불러야겠구나.”

“아니요, 그 전에 제 청을 들어주셔야 할 겁니다. 그 때문에 무례를 무릅쓰고 찾아온 것입니다.”

“……청이라?”

황제의 날카로운 시선이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이딜로스는 담대하게 입을 열었다.

“저 이딜로스 록센 카델라로트가 감히 폐하께 청하는 바입니다. 지금부터 카델라로트 공작가는 황실의 지원을 일절 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그간 감사하게도 보살펴 준 저와 제 여동생, 그리고 제 가문도 이만 자립하고자 합니다.”

“뭐? 너…… 지금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아는 게냐? 황실의 지원을 끊는다니, 지금 나더러 조카를 사지로 내몰라는 거나 다름없구나.”

“……이해를 하지 못하신 듯해 제대로 말씀드립니다. 앞으로 카델라로트는 황실의 혈족이기를 포기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황실 역시 더는 카델라로트에 일절 참견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딜로스의 발언에 귀족들이 시선을 교환하며 웅성거렸다.

황제는 귀를 의심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흉악한 눈초리로 책상을 내리쳤다.

“이딜로스!”

“이런 공적인 자리에서 제 이름을 부르시다니요. 전 카델라로트 공작입니다, 폐하.”

“너, 이…….”

황제는 당장이라도 욕을 쏟아 낼 것 같은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제 청을 받아들이셔야 할 겁니다. 폐하의 말씀대로 어린 조카를 사지에 몰아넣은 이가 되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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