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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34화 (124/191)

134화

안타까운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한시라도 빨리 이 악몽에서 깨워 주자는 마음으로 더욱 악착같이 그를 따라다니며 아천타의 흔적을 지웠다.

그렇게 그와 함께 괴로운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딜로스가 아카데미를 다녀온 사이였다. 마멜라가 사라지고 없었다.

이딜로스는 그나마 양심이 있는 한 시종으로부터 마멜라가 어떤 이들에게 끌려갔다는 걸 들었다.

그는 그 길로 곧장 백모와 백부를 찾아갔다.

백주 대낮에 황궁에서 공녀가 납치된 거다. 모든 상황적 증거가 그들이 사주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황제 부부는 시종일관 모른 체하며 시답잖은 일로 찾아오지 말라고 이딜로스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끝에 가서는 무슨 생각인 것인지 갑자기 말을 바꿨다.

“지금 세트로프로 가면 네 여동생의 얼굴 정도는 볼 수 있겠구나. 유일하게 남은 가족인데. 그래, 작별 인사 정도는 하게 해 주마.”

이딜로스는 더 들을 것도 없이 곧바로 황궁을 나섰다. 그는 수도로부터 서쪽에 위치한 세트로프로 말을 타고 달렸다. 이딜로스의 낯은 쫓기는 사람처럼 창백했다.

사실 나는 급히 달려 나간 이딜로스를 놓쳤지만, 신기하게도 주체인 그로부터 멀리 떨어지자 내 몸이 자연히 그의 근처로 이동했다. 이곳이 그의 세계이기 때문인 듯했다.

이딜로스는 밤이 새도록 달려 도착한 세트로프를 샅샅이 뒤졌다.

그 끝에 그는 어느 인적이 드문 숲에 멈춰 선 낡은 수레 마차를 발견했다. 나무로 된 수레 칸에는 마멜라가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마멜라…….”

마멜라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한 이딜로스는 무너지듯 주저앉아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미안해, 마멜라……. 오라버니가 이것밖에 안 돼서, 널 지킬 힘이 없어서 미안해…….”

흐느낌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근처 나무 뒤에서 지켜보던 나는 착잡함에 입술을 물었다.

다행히 마멜라는 별달리 다친 곳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마음을 놓기가 무섭게, 인근에서 수풀을 스쳐 가는 여러 기척이 느껴졌다. 그리고, 연이어 검을 뽑는 날카로운 소리가 열 번도 넘게 울리는 걸 들었을 때. 나는 이딜로스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포위된 일대를 둘러본 이딜로스는 허망한 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눈치챘듯이, 그 역시 알아차린 거겠지.

황제가 이곳의 위치를 알려 준 것은, 결국엔 확실하게 이딜로스의 목숨을 끊기 위한 것이라는 걸.

“마멜라, 잠시 다녀올게. 혼자 두진 않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이딜로스는 수레 모퉁이에 있던 볏짚을 끌어와 마멜라의 몸을 덮었다.

그리고 그는 무장한 적들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허리춤에 맨 검이 서늘한 소리를 긁으며 뽑혔다.

불현듯 이딜로스가 시선을 옆으로 흘렸다. 적들의 옆에 위치한 수풀 속.

정확히 내가 숨어 있던 부근이었기에 나는 놀라 몸을 낮췄다.

‘왜 이쪽을 본 거지……?’

잠시 몸을 숨기느라 바깥의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는 사이에 접전의 소리가 팽팽하게 울려 퍼졌다.

승부는 길었다. 검술의 수재답게 이딜로스는 그새 장성한 자객 몇을 쓰러트린 후였지만, 그는 아직 쓰러트린 수보다도 많은 상대를 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제법 지쳐 보였다. 빈틈없이 칼날을 모조리 쳐 내는 듯했지만, 머릿수를 이길 수는 없었다. 칼날들이 호시탐탐 이딜로스의 목숨을 노렸다가 빠져나갔다.

나는 그 모습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봤다. 바닥에 흩뿌려진 적의 피보다 이딜로스가 흘린 피가 더 많아지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다가 주변 바닥을 둘러봤다.

아주 사소한 정도라도 좋으니 돕고 싶었다.

그러나 주변엔 도통 그를 도울만한 것이 없었다. 돌이나 나뭇가지는 코빼기도 안 보였고, 온통 잎사귀들만 있었다.

초조함에 입술을 깨물기도 잠시, 시야에 익숙한 생김새의 나뭇잎이 들어왔다.

‘이건…… 아포트리프 나무야.’

그건 언젠가 마멜라의 방에서 읽은 적이 있던 식물도감에서 본 거였다.

[아포트리프 나무는 몸의 보호를 위해 잎사귀의 표면에 상흔을 입었을 때, 진득한 점액질의 맹독성 물질이 흐르게 된다.]

한순간에 결단을 내린 나는 재빠르게 나뭇잎 몇 개를 뜯어냈다.

‘이딜로스는 이곳에서 죽지 않아. 이딜로스는 저 싸움에서 분명 이길 거야. 그러니 어차피 이기는 싸움이라면…….’

내가 조금 도와준다 해서 크게 영향을 주는 것은 없을 거야.

오로지 그러한 믿음이었다. 나는 내가 생각지 못한 미래들과 내 선택이 불러올 나비 효과의 참사를 모조리 배제하고 나뭇잎의 표면을 무작정 손톱으로 긁어냈다. 손끝이 따끔거리더니 곧 벌겋게 부어올랐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모든 나뭇잎에 상처를 내고는 신성력을 둘렀다.

이윽고 바람이 부는 순간 나뭇잎들이 날아갔다.

세찬 바람을 타고 날아가던 나뭇잎들은 표적을 찾아가듯이 각기 남아 있는 적들의 몸에 찰싹 달라붙었다.

“뭐야, 이건!”

“잠깐만, 모, 몸이…….”

그들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고통스러워하며 하나둘 힘을 잃고 검을 놓치는 모습을 지켜봤다.

맨살이 녹는 것 같고 오장육부가 타들어 가는 기분.

그들의 고통을 굳이 보지 않아도 알았다. 억지로 나뭇잎을 긁어낸 내게도 그 견디기 힘든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고 있으니.

이딜로스는 그들의 이상 행태에 잠시 의아해하는가 싶더니 곧 그들을 손쉽게 제압해 모두 쓰러트렸다.

그는 곧장 검을 집어넣고 마멜라에게 달려갔다. 나는 눈만 빼꼼 내민 채 이딜로스의 상태를 빠르게 훑었다.

한눈에 봐도 이딜로스는 상처투성이였다. 옆구리에는 깊은 자상도 있어 지금도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을 그는 손으로 겨우겨우 틀어막고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서 고개를 돌리곤 힘겹게 숨을 내쉬었다.

‘독은 생각보다 아픈 거구나…….’

부어오른 손을 바라보다가, 손끝에 신성력을 모아 이딜로스에게로 둥실둥실 날려 보냈다. 그가 조금이라도 아프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뭐지?”

이딜로스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바깥을 내다보자 신성한 기운에 둘러싸여 두리번거리는 그가 보였다. 다행히도 이딜로스의 상처는 피가 멎은 듯했다.

나는 기진맥진하게 나무에 기대었다.

이딜로스는 빈 마차를 끌고 그 자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서서히 멀어지는 수레바퀴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힘겨운 신음과 함께 눈을 감았다.

이딜로스가 마차를 끌고 향한 곳은 황궁도 카델라로트 공작저도 아니었다.

나는 낯선 저택 앞에서 멈춰 선 마차를 의아하게 지켜보다가, 곧이어 저택의 정문에서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자 알아챘다.

이곳은 바로 로제트 후작저였다.

“이딜로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아니, 네 꼴이 왜 이래?”

아카데미에서 찾아보려고 부단히 애를 써도 보이지 않던 얼굴 아닌가.

‘알고 보니 휴학을 했던 거였지…….’

안셀이 지금보다 훤한 낯으로 대문을 나왔다.

“저 수레는 뭔데?”

안셀은 마차를 훑어보며 물었다. 이딜로스는 말없이 안셀을 바라보다가, 걸음을 돌려 수레 칸에 볏짚으로 숨겨 두었던 마멜라를 안아 올렸다.

안셀은 이딜로스가 등을 토닥이며 데리고 온 어린아이를 살피다가 고개를 들었다.

“네 여동생이잖아. 네 꼴도 그렇고 저 수레도 그렇고…….”

“안셀.”

이딜로스는 황망히 입을 여는 안셀의 말을 끊었다. 그러곤, 안고 있던 마멜라를 안셀의 품에 멋대로 넘겨 버렸다.

얼떨결에 마멜라를 안아 들게 된 안셀은 당혹스럽게 눈을 슴벅였다.

이딜로스는 마멜라를 떠넘긴 손을 처량하게 거두어 가고는 고개를 떨궜다. 이윽고 물기에 억눌린 목소리가 들렸다.

“부탁한다. 이젠…… 정말 믿을 데가 너밖에 없어.”

“대체 무슨 일이야. 그간 네 소식은 들었어. 그런데…….”

돌연 이딜로스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안셀은 말을 멈추고 이딜로스를 봤다. 그건 언제고 메말라 부서질 것 같은 힘없는 웃음이었다.

안셀은 잠시 침묵하는가 싶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그래. 너한테도 사정이 있겠지. 넌 약아빠져도 아무런 이유 없이 일을 벌이는 성격은 아니잖아.”

“……고맙다.”

안셀과 간단히 안부를 주고받은 이딜로스는 마멜라를 잘 부탁한다는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다.

안셀이 치료라도 받으라고 했으나, 그는 그리 아프지 않다며 거절했다.

‘이딜로스, 괜찮은 걸까…….’

진즉에 마차를 끊어 내고 말을 몰기 시작한 이딜로스는 한참을 달린 끝에 작은 신전 앞에서 멈췄다. 로제트 후작가의 근처에 있던 어느 신전이었다.

나는 신전의 크고 오래된 오크 나무 문을 열고 들어가는 그를 보다가 뒤따라 벽을 통과했다.

신전의 예배실은 양측 벽면에 스테인드글라스로 된 커다란 유리창이 곳곳에 나 있었다. 이른 아침이기 때문인지 이딜로스를 제외하고는 인간들이 아무도 없어 유독 넓어 보였다.

내가 나고 자란 대신전에는 조금 못 미치지만 이곳도 충분히 성결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주었다.

나는 예배실에 있는 여러 의자들 중 하나에 몸을 숨기곤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좀 더 가까이서 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이딜로스와 닿을 수 있으면, 그리고 그의 상처를 직접 보듬어 치료해 줄 수 있다면…….

하지만 나는 지난번처럼 그의 과거에 차질이 생길까 봐 섣불리 나설 수 없었다.

이렇게 눈으로 좇기만 하면서도 그에게 종종 참견하곤 하는데, 그와 직접적으로 엮이면 내가 모르는 새에 또 어떤 것을 침범하게 될지 모른다.

‘애초에 내가 나타나지 않기 시작한 후로 이딜로스가 딱히 나를 찾는 기색도 없었는걸.’

어쩌면 내가 잠시 사라졌다가 돌아온 새에 그의 기억이 불순물과도 같은 나를 이 기억에서 걸러 버린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열일곱의 이딜로스가 나를 완전히 잊은 걸지도.

어쩐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지만 고개를 내저었다.

‘처음부터 당연한 거야. 이곳은 이딜로스의 과거이니 내가 들어갈 자리는 없어.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천타의 기운을 한시 빨리 없애 이딜로스를 깨어나게 하는 것뿐이야.’

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아천타의 기운도 잘 보이질 않던데…….

나는 흘긋 시선을 들었다. 이딜로스는 신전 정중앙에 걸린 성스러운 신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새삼 독실한 신자구나 싶었다.

이런 상황에, 저런 몸을 이끌면서까지 신전을 오다니.

이딜로스가 어째서 그토록 남을 경계했었는지는 그간 따라다니면서 알게 되었지.

그런데 이딜로스가 신을 믿지 않게 된 계기는 대체 뭐지?

마침 그런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조용한 교당에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간 당신을 믿고 그토록 경외해 왔는데, 당신은 단 한 번도 제게 구원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십수 번도 넘게 외친 제 간절한 부름에 한 번을 응해 주지 않으셨습니다.”

버석하기 그지없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목소리였다.

“여태는 그저 제가 부족해 저를 지켜보기만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을 겪으며 정말 죽음이 문턱까지 오니 알겠더군요.”

이딜로스가 고개를 들었다. 제 키보다 한참이나 높은 곳에서 저를 내려다보는 신상을 분노가 깔린 눈으로 노려봤다.

“당신은 나를 굽어살필 생각이 없어. 아니, 당신이 존재하는지도 모르겠고. 정말 힘들 때조차 내게 작은 도움도 주지 않는 당신을 그토록 믿었던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이딜로스의 목소리는 그가 느끼는 원망과 분노를 모두 담아내고 있었다. 내가 신격체여서일까, 마음이 억눌려진 것처럼 답답했다.

“지난번에는 하지 못했을 말, 이번에는 확실하게 하겠습니다.”

나는 숨을 죽인 채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게 신은 당신이 아닙니다. 나의 신은 지금부터 단 한 사람뿐입니다.”

이딜로스가 내뱉은 말의 뜻을 생각해 보던 차였다. 갑작스레 이딜로스가 등을 돌렸다. 나는 서둘러 몸을 웅크렸다.

그의 발걸음은 굳건하고도 일관되게 한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그 방향은 예배실을 나가는 문이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가장 외곽진 곳.

내가 있는 곳이었다.

“아릴.”

나는 놀라 숨을 삼켰다. 이대로 바닥을 통과해 땅속으로 꺼져 버릴까, 하고 생각한 것이 쏙 들어갔다.

‘어떻게 날…….’

그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들자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초라한 행색의 이딜로스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나도 모르게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도대체 내가 있는 것을 어떻게 안 것인지, 그리고 왜 숨어 있기만 했던 나를 보며 신상에게 보냈던 원망 대신 온화한 눈길을 띠는 것인지. 혼란스러워 굳은 채 그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딜로스가 일그러트리듯 미미한 웃음을 흘렸다. 바스라질 것만 같은 웃음. 하지만 안도의 따뜻한 물결이 넘실대는, 그런.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굽혔다. 그에 따라 바짝 들고 있던 고개를 점차 내리게 된 나는 떨리는 눈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나를…… 알아보겠어?”

“못 알아보는 게 이상하지. 넌 날 지키러 온 사랑스러운 요정이고, 내 하나뿐인 고양이인데.”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의문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게 말로 성립되기도 전에 나를 끌어안는 움직임과 속삭임에 나는 생각을 덜컥 멈췄다.

“고마워.”

“어……?”

“네가 날 위해 이 지난한 꿈속에서 나를 도와 온 걸 알아.”

“…….”

“고마워. 이 비참한 과거의 버팀목이 되어 주어서. 내가 미치지 않게 해 주어서, 나를 구원해 주어서…… 고마워.”

그의 모습은 여전히 열일곱의 이딜로스였다. 이곳은 여전히 그의 기억 속의 세계였으며, 그는 변함없이 처참한 몰골이었다.

하지만, 이윽고 내 입술 위로 온기를 겹쳐 오는 그는 다름 아닌 내가 가장 잘 아는 이딜로스였다.

“이 지옥 같은 꿈속에서…… 네가 곁에 있다는 건, 내 모든 것과 맞바꿀 정도의 축복이야. 그러니 내 세상의 신은 오로지 너뿐이야, 아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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