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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31화 (121/191)

131화

열일곱 살의 이딜로스와 지내게 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나갔다. 이곳에서의 한 달이 현실에서도 한 달일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이곳의 시간이 실제 시간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그러는 과정에서 나는 여러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첫째, 지금의 이딜로스와 열일곱 살의 이딜로스는 무슨 이유인지는 몰라도 괴리가 크다.

‘처음엔 가짜인 게 아닐까 싶었지만…… 원래 인간들은 잘 변하니까.’

나로서는 이곳으로 보내 준 데비드와 눈앞의 이딜로스를 믿는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곳 이딜로스도 성격이 그리 좋지 못한 걸 봐서는 가짜는 아닌 것 같단 말이지.’

둘째, 이때의 이딜로스는 고양이를 상당히 좋아한다. 동물을 무서워하지 않는 것 같다.

내가 옆에 딱 붙어 지내는 것에 체념한 그가 종종 내게 고양이의 모습이 되어 달라고 수줍게 부탁할 때도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셋째, 이딜로스는 주말마다 가족과 함께 신전을 방문해 기도를 올릴 정도로…… 독실한 신자였다.

‘정말 다시 생각해도 충격적이야.’

이딜로스를 따라 신전에 가면 여긴 어디고 나는 누구며 옆에 있는 게 이딜로스가 맞긴 한 건지 혼란이 찾아오곤 했다.

‘지난번에는 내가 신화에서나 등장하는 수인 같다고도 했었지. 얼마나 놀랐었던지…….’

그래도 요즈음엔 나를 베개 삼아 끼고 자는 걸 보아 그냥 하찮은 요정 정도로 여기는 듯했다.

가만 생각해 보자니 이때의 이딜로스는 적응력 또한 만만치 않았다.

나를 진짜 요정이라고 믿는 건지 내가 졸졸 따라다니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사사건건 말을 걸 때도 착실히 반응해 준다. 물론 싫은 티를 팍팍 내기는 하지만.

그래도 이때의 이딜로스는 눈매가 유순해서 그런가, 질색하는 모습도 여간 귀여운 게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넷째. 이 세계에는 아천타의 잔해가 무수하게 많았다.

‘그러니까 지금 눈에 보이는 것처럼…….’

이딜로스의 방에서 포크를 입에 물고 있던 나는 티 테이블 위를 노려봤다. 흘긋 시선을 들자 여상하게 차를 마시고 있는 이딜로스가 보였다.

나는 검은 잔해가 묻은 케이크들을 푹푹 떠서 입에 넣어 버렸다. 이딜로스가 먹으려 하면 도로 빼앗아 와 입에다 넣었더니 그가 날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러나 익숙하다는 듯 다른 쿠키를 집어 먹고선 말했다.

“혹시 식탐의 요정이셨습니까?”

“맞아. 네가 통통해지는 걸 막으려고 온…… 켁.”

우걱우걱 밀어 넣은 걸 먹으며 대답했더니 사레가 들리고 말았다. 이딜로스는 퍽 한심하다는 눈길로 날 쳐다보더니 찻잔을 직접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천천히 드세요. 안 뺏어 먹습니다.”

“으응…….”

다급히 차를 받아 마셔 목에 걸린 게 넘어가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케이크에 묻은 정도의 기운은 나한테 영향을 끼치지 않아 다행이야.’

처음엔 이걸 입에 넣는 것도 무서웠지만, 이 기운은 나와 닿는 게 아닌 이상 없앨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눈 딱 감고 입에 넣어 본 거였다.

내가 만진 음식을 이딜로스가 먹을 리는 없으니까…….

결론적으로는 서로 상극인 아천타의 힘과 내 힘이 만나면 좀 더 약한 쪽이 소멸해 버리는 거라는 결과를 얻어 냈다.

물론 아천타의 검처럼 유독 치명적인 것도 있는 듯했지만.

나를 희한한 생물 보듯 쳐다보고 있던 이딜로스가 물었다.

“맛있습니까?”

“응.”

“난 안 먹을 거니까 이것도 드시든가요.”

이딜로스는 ‘어차피 다 빼앗길 거 그냥 너 먹어라’라는 표정으로 케이크 접시를 내 앞으로 옮겨 줬다.

“아.”

나는 얕게 눈가를 찡그렸다.

접시를 얼마나 대충 밀어 줬던지, 내 손에 케이크가 묻었다.

이딜로스는 무성의하게 사과했다.

“아, 미안합니다. 보기에 지저분하니 닦으시죠.”

“…….”

별일 아니라는 듯 재수 없는 소리를 내뱉는 이딜로스를 보다가 그의 얼굴로 손을 뻗었다.

“뭐…….”

순식간에 코에 크림이 묻게 된 이딜로스는 황당하게 눈을 깜빡였다.

나는 이딜로스의 얼굴을 보곤 한껏 놀리듯이 웃었다.

“묻히고 먹기나 하고, 칠칠치 못하게.”

“당신이 묻혔으면서……!”

“따지고 보면 나한테도 크림 묻힌 건 넌데? 보기에 지저분하니까 어서 닦아.”

“허…….”

“이딜로스는 완전 애네.”

“저기요. 처음부터 날 지나치게 애 취급하던데, 당신은 몇 살이길래 그럽니까?”

“난 이딜로스랑 다르게 어른이거든.”

내가 의기양양하게 말하자 냅킨으로 크림을 닦아 낸 이딜로스가 눈가를 찌푸렸다.

“몇 살인데요.”

“두 살쯤 됐어.”

“뭐라고요?”

내가 으쓱하며 내놓은 답에 찌푸려진 이딜로스의 눈가가 풀어졌다. 그러다 갑자기 웃음을 터트리는 게 아닌가.

이딜로스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이유를 알아챈 나는 자존심이 상해 소리쳤다.

“나랑 인간의 성장 속도가 달라서 그래. 난 1년이면 성체가 된다고!”

“고양이라서요? 귀엽네요.”

“난 너보다 일찍 어른이 됐거든? 얕보지 마.”

“내가 언제 얕봤다고요.”

“아까 내가 두 살이란 거 듣고 비웃었잖아.”

“아닌데요? 그냥 귀여워서 웃은 거지.”

나는 흉흉하게 눈을 치켜떴다. 이딜로스는 쿡쿡 웃어 댔다.

내 기억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이딜로스는 상대하기가 꽤 힘들었다. 내숭도 없고, 한마디도 지지를 않고.

무엇보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능청스럽고 장난스러울 수가 없었다.

원래라면 휘말리는 쪽은 늘 무덤덤하던 이딜로스였는데, 지금은 내가 휘말리고 있지 않나.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고서 성난 눈을 했다. 이딜로스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며 웃음을 참는 듯하더니 말했다.

“알았어요. 그럼 당신이 나보다 일찍 어른이 되었으니까 내가 좀 더 공대해 주면 되겠어요?”

“그건 당연한 거잖아.”

“그럼 뭐…… 달리 바라는 게 있습니까?”

“호칭 좀 바꿔.”

말하자니 은근한 서운함이 밀려왔다. 늘 나를 부를 때는 ‘아릴’이라고 이름을 불러 주던 그였는데. 이곳의 그는 내게 이름을 준 것도 잊어버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날 ‘당신, 저기요’정도로 칭했다.

내가 시무룩해지자 이딜로스는 내 손등에 묻어 있던 크림을 무심하게 닦아 내 주며 말했다.

“뭐라고 불러 주기를 바랍니까?”

“그냥 어려울 거 없이…….”

“누나 같은 호칭이요?”

“뭐?”

“누나.”

이딜로스는 크림을 닦아 낸 냅킨을 치우며 웃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호칭에 당황해 입을 벌리고 있던 나는 얼굴이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그냥 아릴이라고 부르면 되잖아. 아, 공대해야 하니까 아릴 님이라고 불러!”

“누나가 더 좋은 거 같은데요? 누나도 이쪽을 더 좋아하는 거 같…….”

“안 돼!”

왠지 죄를 짓는 기분이라 나는 테이블을 두 손으로 팡 내리쳤다. 이딜로스는 내 반응이 즐겁다는 듯이 소리 내어 연신 웃었다.

‘이 괘씸한 인간……!’

나는 옆에 있던 케이크를 손가락 가득 퍼 그의 뺨에 묻혀 버렸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눈을 깜박이던 이딜로스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허, 지금 해 보자는 겁니까?”

그 말을 끝으로 이딜로스가 순식간에 내 이마에 당근 케이크의 크림을 듬뿍 묻혔다. 내가 새초롬하게 쳐다보자 이딜로스가 어깨를 으쓱했다.

“먼저 한 건 ‘아릴 님’이잖아요? 애처럼.”

“뭐라고……!”

이딜로스의 도발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사이, 그가 내 코에도 연달아 크림을 묻혔다. 그러곤 ‘푸흡’ 소리를 내며 웃었다.

자존심이 상한 나는 옆에 있던 슈를 확 던졌다.

“아. 이건 좀 아픈데요.”

“아프라고 던진 거거든.”

“그래요? 내 앞에도 슈 많은데.”

이딜로스가 도발적으로 슈를 집었다.

그 후로는 엉망진창인 케이크 싸움이 이어졌다. 뒤이어 찾아온 시종들은 방 안의 꼴을 보곤 ‘에구머니나!’ 하며 놀랐다.

아마 그들의 눈에는 이딜로스 혼자서 벌인 짓으로 보일 테니 아주 이상해 보였을 거다.

이딜로스는 시종들에게 짤막하게 변명했다.

“길고양이가 들어와서 난동을 부렸어.”

그러곤 딴청을 부리며 나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치자 그가 미소 지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표정은 제법 즐거워 보였다.

저녁이 되어서야 화해를 한 나와 이딜로스는 지저분한 꼴에서 멀끔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이딜로스는 소파에 멀뚱히 앉아 있는 날 보더니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다.

“씻지도 않았으면서 어떻게 그리 깨끗해지는 겁니까?”

“글쎄?”

이딜로스는 내가 대충 얼버무린다고 생각한 건지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답한 거였다.

이곳이 현실이 아니기에 내 의지만 있다면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게 아닐까, 나 역시 추측하는 게 다였으니까.

이딜로스는 가느다랗게 좁힌 눈으로 날 쳐다보더니 갑자기 수건을 던졌다. 반사적으로 수건을 받아 낸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보송한 것이 새 수건이었다.

의아하게 그를 쳐다보자 이딜로스는 시선을 피하더니 헛기침 후에 말했다.

“그러고 보니 씻는 걸 본 적이 없는데. 씻지도 않고 더럽습니다.”

“나 더러워? 그렇지만 넌 잘 때 내가 고양이로 변하면 좋은 냄새가 난다고 끌어안잖아.”

“그, 그건 당신이 잠든 줄 알고 그런 건데……. 깨어 있었어요?”

“응.”

“그럼 왜 밀어내지 않고…….”

“네가 안고 자면 따뜻해서 좋아. 냄새도 좋고 포근해.”

그리고 난 그편이 익숙하니까.

뒷말은 삼키고 그를 빤히 바라봤더니 이딜로스의 귓가가 어쩐지 달아올라 있었다. 이딜로스는 머뭇거리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물도 받아 두었고, 목욕만큼 기분 좋은 것도 없으니 권하고 싶은 겁니다. 당신은 해 본 적이 없을 거 같아서.”

나는 눈을 깜빡였다. 실은 그가 욕실에 들어갈 때 조금 부러운 눈길로 쳐다볼 때도 간간이 있었는데, 이딜로스가 그걸 눈치채고 있었던 것일까.

“지금 나 배려해 주는 거지?”

“……알아서 생각하세요.”

이딜로스의 소심한 대답에 나는 설핏 웃었다.

“고마워.”

그의 배려에 나는 간만에 따뜻하고 기분 좋은 목욕을 즐겼다.

물이 닿으려면 온몸에 힘을 주고 형체를 유지해야 해서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지만, ‘오늘도 이딜로스가 나를 끌어안고 자겠지’라는 생각에 온몸에 좋은 냄새가 폴폴 나도록 뽀득뽀득 씻었다.

‘개운해! 역시 사람은 목욕을 해야 해.’

욕실에서도 곳곳에 보이는 아천타의 잔해를 박멸한 나는 노곤해진 몸을 이끌고 욕실을 나왔다. 일을 마쳐서 그런가 기분도 상쾌했다.

나와 보니 테이블 위에 펼쳐 둔 커다란 가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는 차곡차곡 정리된 옷가지들이 있었다. 언뜻 봐도 그건 여행 가방이었다.

“이딜로스, 뭐 해?”

“아, 짐 싸는 중이에요.”

“어?”

“사실…… 말하지 못했는데, 곧 있으면 내 생일이라 가족과 함께 별장에 가기로 했거든요.”

이딜로스가 제 입으로 생일을 언급하는 게 민망하다는 듯, 겸연스레 웃었다.

나는 손에서 수건을 툭 떨어트렸다. 미처 다 말리지 못한 머리칼에서 물이 몇 방울 떨어졌다.

“내일이면 떠날 겁니다. 당신이라면 날 따라갈 테니 오늘은 일찍 자는 게 좋겠네요.”

미미하게 올라가 있는 그의 입꼬리를 본 나는 입을 달싹였다. 통탄이 비집어 나오려 했다.

나는 애써 안타까움을 뒤로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의 옆에 가 짐을 싸는 걸 돕는 것밖에 없었다.

이건 단순히 내 고집으로 막는다고 해결될 일이 아닐 테니까.

아침은 금세 찾아왔다.

고양이의 모습으로 이딜로스의 품에 안겨 있던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결국 피로함을 견디며 그를 따라야 했다.

마멜라는 공작 부인과 이동하는 듯했고, 이딜로스는 공작과 함께 마차를 탔다. 나는 이딜로스의 옆에 따라 앉았다.

부자지간의 조금은 서툴면서도 단란한 대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앞으로 닥칠 일들을 예상하며 눈을 감았다.

‘이딜로스가 괴로워하는 만큼 내가 위로해 주면 되는 거야. 괜찮을 거야.’

그런 내가 조는 것이라고 생각한 건지 이딜로스는 말없이 나를 당겨 어깨에 기대게끔 했다.

이딜로스의 온기가 익숙하고 부드러운 만큼 나도 모르는 새에 꾸벅꾸벅 졸았다.

그 탓에 야속하게도 도착은 눈 깜짝할 새에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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