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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30화 (120/191)

130화

눈을 크게 뜨고 이딜로스의 덤덤한 얼굴을 바라봤다.

열입곱 살,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

그 정보들이 저편에 있던 기억들을 끌어 올렸다. 그러니까, 전대 공작 부부의 기일 날 마멜라가 해 주었던 말을.

<우리 부모님은 6년 전에 돌아가셨어. 내가 여섯 살이고 오라버니가 열일곱 살 때.>

그들의 부모님은 이딜로스의 열일곱 살 생일 때 돌아가셨다. 이딜로스의 생일은 여름 무렵…….

심각하게 생각하던 때, 이딜로스가 의심스러운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그런 건 왜 묻습니까?”

“널 지키기 위한 일환이야. 그런데 열일곱이면 아카데미에 다닐 나이잖아. 넌 안 가?”

“여름이니까 방학을 맞아 내려온 겁니다.”

“아…… 그렇구나.”

나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었다.

그래, 지금은 여름. 사실 그건 내가 저택 앞에서 눈을 뜬 순간 쨍쨍하게 내리쬐는 열기로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렇다면 곧 이딜로스의 부모님이 돌아가실 사건이 일어나겠구나.

그리고 그건 내가 바꿀 수도 없을 것이다. 이 기억 속의 일들은 이미 현실에서 일어났던 것들이고, 그게 나의 참견으로 변할 수 있을 리가 없으니까.

나는 안타까움에 침음하며 옆에 있던 소파에 풀썩 앉아 몸을 기대었다. 무의식중에 내 집인 것처럼 굴었더니 이딜로스가 어이가 없다는 눈으로 나를 째려보더니 맞은편에 앉았다.

“당신이 정말 귀신이라고요? 귀신이 날 지켜 준다니, 대체 어떤 방식으로 그럴 셈입니까?”

“……내가 아까 요정이라고 하지 않았어?”

“여동생에게 읽어 주는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존재인데요.”

“그렇게 못 믿겠어?”

“당연한 거 아닙니까? 생김새는…… 그렇다 해도, 그밖엔 뭐가 있다고요? 차라리 비밀리에 찾아온 신의 사자라는 쪽이 더 신빙성 있겠습니다.”

과거의 이딜로스는 이렇게 말주변이 좋은 건가. 지금과는 달리 낯선 이에게도 말을 술술 내뱉는 모습에 잠시 놀랐다.

그러다 뒤늦게 이딜로스의 말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다.

“……신의 사자? 넌 신앙심 같은 게 없잖아. 차라리 요정이 낫지 않아?”

“그거 욕인 겁니까? 제국에서 신앙심 없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뭐?”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런 게 아니라면, 이딜로스는 분명 신앙심이 있음을 주장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이딜로스는…… 여러모로 현재 내가 아는 이와 다른 점이 많다.

내가 아는 이딜로스였다면 제 구역을 멋대로 침범한 낯선 이는 진즉에 죽일 기세로 달려들었을 거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남의 말을 곧잘 들어 주고 제가 하고픈 말을 술술 내뱉지도 않을 테고.

무엇보다도 요정보다 신의 사자가 낫다는 말은 하지 않을 거다. 내가 봐 온 이딜로스는 모든 미신 거리를 상식 밖의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믿지 않는 게 바로 신이었으니까.

“난 당신을 못 믿겠습니다. 갑자기 나타나선 날 지켜야 한다니. 어디 이유라도 말해 보십시오.”

“그건 말할 수 없어. 의심스럽겠지만…….”

곤란함에 입을 우물거릴 때였다. 바깥에서 조그만 인기척이 총총 다가오더니 발랄하게 방문을 두드렸다.

그 덕분에 이딜로스의 관심이 내게서 문으로 돌아갔다.

“오라버니!”

내 기억보다도 어린 목소리였지만, 이건 틀림없이 마멜라의 것이었다.

나는 눈을 반짝였다. 마멜라는 지금도 눈치가 빠르고 행동력이 좋은데, 어릴 때조차도 내게 도움만 주는구나!

이딜로스는 불안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더니 걸음을 옮겨 방문을 열었다.

제자리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니 꼬꼬마 한 명이 바깥에서 쏙 나타났다.

양 갈래로 땋아 둥글게 말아 올린 머리며, 고사리 같은 손. 지금의 반이나 될 법한 키. 통통한 볼과 앙증맞은 옷.

살면서 인간의 옷이 저렇게 작은 건 처음 봤다.

나는 참지 못하고 입을 살짝 틀어막았다.

마멜라가 저렇게 조그맣다니. 너무 귀여웠다!

문이 열리자마자 방으로 들어온 자그만 마멜라는 키를 낮춘 이딜로스에게 폭 안겼다.

아까까지 내게 지었던 표정과는 달리 풀어진 낯을 한 이딜로스가 마멜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심심해서 왔어?”

“네!”

“오늘은 뭘 하고 놀아 줄까. 하고 싶은 거라도 있어?”

마멜라는 고개를 내젓더니 전적으로 이딜로스의 선택에 따르겠다는 눈빛으로 초롱초롱 그를 바라봤다.

“미미 데리고 인형 놀이할까?”

“아니요!”

“그럼 그저께 하던 기사 놀이 마저 할래?”

“싫어요! 자꾸 제가 이겨서 재미없어요. 오라버니는 너무 비실비실해서 한 대만 쳐도 쓰러지잖아요.”

“……그럼 뭘 하고 싶은데? 책 읽어 줄까?”

아까부터 명랑하게 도리질만 하던 마멜라가 이번에는 기대 어린 눈으로 입을 방싯거렸다.

역시 지금의 독서광 아니랄까 봐, 어릴 때부터 책 읽기를 좋아했나 보다.

이딜로스는 픽 웃으며 마멜라의 손을 잡고 내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우뚝 멈췄다.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으로 두 눈에 경계심을 피워 낸 그가 마멜라의 손을 꽉 잡았다.

‘설마 내 존재를 잊고 있다가 이제야 기억하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

마멜라는 갑자기 멈추고서 이동할 기미가 없는 이딜로스를 갸웃하며 올려다봤다.

그 모습도 너무 귀여워서 이딜로스는 안전에도 없이 마멜라에게 시선이 완전히 사로잡혔다.

그러자 이딜로스가 마멜라를 제 뒤로 끌어당기며 말했다.

“마멜라, 혹시 저기에 누구 있는 거 안 보여?”

“어디요?”

“저기. 의자에 앉아 있는 거. 새하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야.”

“안 보여요. 저기에 뭐가 있어요? 귀신이에요?”

“응.”

그가 마멜라와 주고받는 대화에 발끈했다. 귀신 아니라니까 그러네!

이딜로스의 진지한 반응에 마멜라는 신기하다는 듯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내가 있는 곳을 바라보더니 갑자기 그를 제치고 내 앞까지 달려왔다.

“우와, 귀신이다! 어디 있지?”

갑작스레 내 앞까지 들이닥친 마멜라가 내 옆을 바라보며 기웃거렸다. 가까이서 보니 어릴 적의 마멜라는 정말,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귀여웠다……!

저 통통한 볼을 한 번만 만져 보고 싶었다. 애써 참으며 마른침을 삼키자, 한달음에 다가온 이딜로스가 마멜라를 안아 들더니 말했다.

“마멜라, 그냥 해 본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

“저도 보고 싶어요, 귀신!”

“안 돼, 닿으면 역병 옮아. 봤다간 정신도 이상해질 테니 네 방 가서 놀자.”

뭐……! 이딜로스의 말에 기가 차서 입을 벌린 나는 부글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이딜로스는 나를 석연찮은 눈으로 흘겨보더니 그대로 마멜라와 함께 방을 나서 버렸다.

그 후 이딜로스가 돌아온 것은 거의 저녁이 지나서였다.

식사까지 마치고 온 건지 느긋하게 방으로 돌아온 이딜로스는 방 안을 돌아다니던 나를 보곤 굳었다.

“왜 아직도 있는 겁니까?”

“너한테 계속 붙어 있겠다고 했잖아. 허락의 의미로 이름도 지어 준 거 아니었어?”

“진짜 이럴 줄은……. 설마 원하는 게 내 목숨입니까?”

“뭐? 지키기 위해 왔다고 몇 번을 말해.”

“…….”

“내가 못된 존재였으면 좋겠어?”

“……됐어요. 당신 존재를 이해하려 했다간 안셀보다 빨리 죽어 버릴 거 같습니다.”

이딜로스가 손을 내저으며 하는 말에 나는 어이가 없어 웃었다. 그는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니 걸음을 돌렸다.

“어디 가?”

“씻으러요.”

“그래?”

“자, 잠깐만요. 왜 따라오는 겁니까?”

“계속 같이 있겠다고 했으니까.”

한순간 이딜로스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실은 내 사심이 담긴 거였는데, 저 눈빛을 보니 꼬리를 내려야 할 것 같다.

아쉽게 포기하고서 이딜로스를 보내 주었더니 그가 욕실에 들어가고서 얼마 안 가 사용인들이 들이닥쳤다.

갑자기 뭔가 싶어 지켜보니 그들은 이딜로스를 따라 욕실에 들어가 버렸다.

‘뭐야? 저길 왜 들어가? 뭔데 내걸 훔쳐보려고……!’

잠깐만, 설마 목욕 시중은 아니겠지?

이딜로스는 남이 제게 간섭하고 접촉하는 류의 시중을 병적으로 싫어한다.

그 자리에 서서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자 곧 사용인들이 나왔고, 그로부터 한참 만에 이딜로스가 모락모락 김을 피워 내며 욕실에서 나왔다.

머리까지 말리고서 뽀송해진 그가 멍하니 있던 나를 보곤 눈가를 좁혔다.

“거기서 뭐 합니까?”

“옷도 시종들이 입혀 줘?”

이딜로스는 그게 뭔 생뚱맞은 질문이냐는 눈으로 날 쳐다보다가 대답했다.

“……입혀 준다기보단 거들어 주죠. 내가 뭐 애도 아니고.”

“이상해…….”

“뭐가요? 그보다 난 이제 잘 거니까 당신도 어서 요정 나라로 가 버리든지 뭐든…….”

나는 진지하게 생각에 잠긴 채로 익숙하게 이딜로스의 침대에 올라갔다. 그러자 이딜로스가 바보같이 입을 벌리더니 뒤로 세 걸음이나 물러났다.

“왜, 왜 내 침대에 오는 겁니까?”

“아. 미안, 같이 자는 게 습관이 되어서…….”

“습관? 누구랑요?”

이딜로스가 질색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너’라고 대답할 수가 없어 조금 생각하다가 말했다.

“가족이랑.”

“비키세요. 어서 당신네 집으로 돌아가란 말입니다.”

“아…… 나 집이 없는데 재워 주면 안 돼?”

그 말에 이딜로스가 벙벙한 표정을 짓더니 곧 귀가 빨개져선 소리치듯이 말했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정말 갈 곳이 없다면 바닥에서 자던지!”

“바닥은 추울 거 같은데…….”

“그럼 소파로 가던가요. 애초에 요정도 잠을 잡니까?”

“당연하지. 아, 혹시 비좁을까 봐 그런 거면 내가 고양이가 될게.”

“……고양이요?”

오랜만에 이딜로스의 체온을 조금이라도 느껴 보자는 마음에 욕심을 부리던 나는 말하고서 실수를 깨달았다.

눈앞에 있는 게 익숙한 얼굴이라 그런가 자꾸만 지금의 그를 대하듯이 행동해 버린다.

지금이야 고양이인 나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이딜로스이지만 이때의 그는 아닐 텐데.

이것 봐, 내 생각대로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 지 않았네?

오히려 의아한 낯을 한 그의 얼굴은 제법 누그러지기까지 했다.

그의 눈에서 호기심과 관심을 엿본 나는 여태껏 열일곱 살의 이딜로스가 내가 알던 것과 정반대에 가까운 성향을 보였단 것을 떠올렸다. 아, 여전히 성격이 나쁜 것만 제외하고.

나는 긴장하며 물었다.

“……혹시 고양이 무서워해?”

“아니요. 나보다 한참이나 작은데 왜 무서워합니까?”

“안 무서워? 정말?”

그의 여상한 대답에 놀란 나머지 가까이 다가가서 묻자 이딜로스의 눈썹이 이상한 모양이 되더니 그가 몸을 뒤로 뺐다.

“고양이는 안셀 같은 놈이나 무서워하는 거지…….”

“말도 안 돼, 날 봐 봐.”

믿을 수가 없어서 나는 그의 앞에서 망설임 없이 고양이의 모습으로 변했다.

어차피 날 요정이라고 소개하기도 했고, 여기는 현실도 아니니까 상관없을 거라 생각했다.

‘퐁’ 하고 변한 보송한 앞발을 그에게 내밀며 고개를 들자 이딜로스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게 보였다.

“무슨…….”

나는 이딜로스를 빤히 올려다봤다. 이딜로스는 나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한참 만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 요정이었다니……. 알았어요, 침대에서 재워 주기만 하면 되는 거죠? 대신 그 모습으로 있으세요.”

겁먹어야 할 그가 오히려 내가 요정이라는 걸 납득하더니 이불을 걷고 침대에 올라왔다.

나는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옆에 눕는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왜 날 안 무서워하지? 그보다, 날 받아들이는 게 왜 이렇게 빨라? 못해도 한 달은 걸려야 하는 거 아닌가? 이딜로스인데?

설마 어려서 현재보다 경계심이 없는 건가?

이딜로스는 가만히 있는 나를 신기하다는 듯이 보더니 갑자기 내 등에 손을 얹었다.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지자 나는 입을 세모꼴로 벌렸다.

“고양이일 때는…… 제법 귀엽네요.”

“…….”

그의 한마디에 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게 이딜로스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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