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저택의 풍경이 지금이랑 달라.’
이딜로스가 마멜라에게 선물한 화원들이 보이지 않는 걸 보니 이곳이 이딜로스의 기억 속이자 과거인 게 맞기는 한 모양이다.
‘아천타의 흔적을 찾아야 해.’
나는 주변을 두리번대며 걸음을 바삐 했다.
아천타의 흔적이 어디 있을까. 그리고, 분명 데비드는 ‘현재의 기억에 이르기 전까지’라고 말했는데…….
지금 이 기억 속의 이딜로스는 몇 살인 걸까?
‘적어도 몇 년 전인 것 같아.’
나는 저택 문을 슬쩍 열고 들어가려다가 몸이 그냥 통과되는 것을 보곤 깨달음을 얻었다.
‘아, 난 지금 유령이구나. 미지의 생물 연구 기록에서 봤어. 육체가 없는 영혼은 분명 이것저것을 통과한댔지. 그리고 엄청 흉측하게 생겼다고도…….’
나는 머뭇거리다가 지나온 문고리를 내려다봤다.
정말로 뭐든 통과해 버리는 걸까. 그럼 이딜로스를 만질 수가 없잖아. 그러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은데…….
그런데, 한번 붙잡아 보자는 마음으로 손을 뻗으니 딱딱하고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느껴졌다. 만지려는 의지만 있으면 만질 수 있는 건가?
“어우, 요즘 준비하느라 삭신이 쑤셔.”
“우편물도 얼마나 오는지 몰라. 바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니까.”
맞은편에서 갑자기 시녀 둘이 나왔다. 나는 미처 몸을 숨기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서 경직되었다.
‘여기서 난 명백한 외부인이잖아. 쫓겨나게 생겼어!’
황망한 마음과 더불어 과거에 이딜로스가 나를 무단 침입자로 여겼던 것이 생각나 낯이 질렸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시녀들은 나를 보지 못한 것처럼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며 지나갔다.
떡하니 서 있었는데, 설마 못 본 게 아니라 무시하는 걸까 싶어 그들을 불러 봤다. 뭐든 확실히 해야 할 것 아닌가.
“저기……? 저기요?”
“그래서 블루어 남작 영식이 글쎄……!”
제 이야기만 이어 가는 그들의 앞에 직접 가서 손까지 흔들어 봤지만, 그들은 보지 못할뿐더러 나를 그대로 통과해 지나가기까지 했다.
당연히 부딪힐 거라 생각하고 눈을 질끈 감고 있던 나는 벙벙하게 뒤돌아봤다.
‘날 보지 못하나 봐.’
하긴, 난 이딜로스의 과거 속에는 없던 사람이니 당연한가.
‘이딜로스를 찾아가 봐야겠어.’
눈을 감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내가 지금 유체 이탈 상태더라도 다행히 오감만은 살아 있었다.
“방에 있나 봐.”
나는 순식간에 이동해 이딜로스의 방문 앞을 기웃대다가 아무렇지 않게 그 문을 쏙 통과했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니 이딜로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욕실에 있는 건가?’
나는 욕실에서 느껴지는 기척을 듣고,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방의 분위기도 어쩐지 지금과는 다른 것 같았다. 분명 같은 장소인데, 현재보다도 생기 있다고 해야 할까…….
지금의 강박적인 깔끔함을 추구하는 모습과는 다르게 이곳은 여기저기 조금씩 흐트러진 물건들도 보였다.
과거이기 때문인지 훨씬 인간미가 있었다.
테라스 쪽도 살피는데, 불현듯 뒤편에서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반사적으로 테라스 커튼 뒤로 숨고 말았다.
‘이딜로스야.’
나는 욕실에서 나오는 그를 훔쳐봤다. 지금보다는 키가 조금 작은 것 같았다. 청년의 느낌보다는 소년의 느낌이 나는 걸 보니 이 기억 속의 그는 적어도 10대 중후반 정도로 보였다.
지금보다 어린 모습의 이딜로스라니…….
“귀엽다…….”
무심코 중얼거리자 이딜로스가 잠시 멈춰 섰다.
설마 내 중얼거림을 들은 걸까 싶었지만 곧 아무렇지 않게 서랍장에 다가가는 것을 보니 나 때문인 건 아닌 듯했다.
다른 이들처럼 내 소리를 듣지는 못하는 건가 봐.
조금 아쉬운 마음도 들었고, 그럼 그렇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좋지 못한 마음으로 커튼을 살짝 움켜쥐었을 때였다. 이딜로스가 나를 못 본다는 게 속상해서 잠시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을 뿐인데 이딜로스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분명 기척은 느껴지는데, 대체 어디를 간…….
“거기 누구지? 나와.”
내가 숨어든 커튼 옆으로 뭔가가 불쑥 나타났다. 이딜로스가 내 존재를 알아챘다는 본능적인 직감과 함께, 심장이 서늘해졌다.
워낙 외부인이나 침입자에 대한 경계심이 강한 그였다. 틀림없이 내게 검을 겨누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불안하게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보인 것은…….
‘……요술봉?’
나는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지금 이게 이딜로스가 나한테 겨누고 있는 게 맞나? 이딜로스의 손에 들린 게 진짜 요, 요술봉이라고?
그건 강렬한 분홍색에 날개까지 달린, 아무리 봐도 마멜라도 가지고 놀지 않을 듯한 요술봉이었다.
너무 당황해서 그대로 굳어 있었더니 그가 말했다.
“들켰으니 나와.”
그런데 침입자를 대하는 목소리라기엔 유난히 부드러웠다.
이딜로스가 저런 걸 들고 있다는 충격에 멍하니 있던 나는 이윽고 요술봉이 거두어지며 나타난 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 손은 그대로 커튼을 붙잡아 젖혔고, 목소리와 함께 기억보다 앳된 얼굴이 보였다.
“마멜라, 자객이 이렇게 엉성하게 숨으면 어떡해. 그럼 이제 벌칙으로 사랑과 정의의 심판을…….”
“…….”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이딜로스가 입을 벌린 채 말을 멈췄다. 들어 올리던 요술봉도 어정쩡한 위치에서 멈춘 게 보였다.
곧이어 이딜로스의 눈이 커졌다.
“당신, 누구…….”
하지만 내 정체를 캐묻기도 전에 이딜로스가 제 손에 들린 요술봉으로 시선을 내렸다. 이윽고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뒤로 재빠르게 물러나는 게 아닌가.
이딜로스는 당혹감이 여실히 느껴지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당신 누굽니까?”
그의 경계감 어린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방금 그 행동들이랑 저 말, 나한테 한 거야?
“내가 보여?”
“여긴 어떻게 들어왔습니까? 아니지, 당장 사람을 불러서…….”
과거나 지금이나 이딜로스는 이딜로스란 건지 내 말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제 말만 하는 게 아주 익숙한 모습이었다.
“자, 잠깐만! 이딜로스, 난 침입자 같은 게 아니야.”
“내 이름까지 압니까? 몰래 내 방에 들어온 걸로 모자라 내 그런 모습까지 보다니.”
이딜로스는 수치가 어린 눈으로 나를 째려보더니 요술봉을 어딘가로 던져 놓고 갑작스레 목소리를 높여 바깥의 사람들을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깜짝 놀라 그를 말렸다.
“어차피 불러도 다들 날 못 볼 거야.”
“그런 헛소리가 내게 통할 거라고 생각합니까?”
“아니, 진짜야! 그러니까 난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 아, 널 위한 수호 요정 같은 거라서…….”
“거기 아무도 없어? 빨리 와 봐!”
이딜로스의 외침에 호위 기사로 보이는 이들과 사용인 몇몇이 달려왔다. 그들이 오자마자 문을 열어 준 이딜로스는 흉흉한 낯으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누가 내 방에 무단으로 들어왔으니 붙잡아 가고 아버지께 보고해.”
“아니, 누가 겁도 없이 들어온 거지! 침입자는 어디 있습니까?”
“저기 있지 않나.”
이딜로스는 테라스 앞에 떡하니 서 있는 나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러나 이딜로스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긴 이들은 모두 의아한 얼굴이 되었다.
“어디요?”
“그러니까, 저기에 있다고……! 설마, 안 보이나? 저기 새하얀 머리를 가진 여자 말이야.”
다들 서로를 바라보며 눈빛을 주고받더니 곧 기사 한 명이 알겠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하하, 도련님께서 장난을 치시다니. 무척 오랜만이군요. 아, 혹시 아가씨와 놀아 주기 위한 거라면 지금 아가씨께 침입자가 나타났으니 찾으면 된다고 전하면 되는 겁니까? 흰머리의 여성은 조금 무서우니 새하얗고 거대한 토끼라고 해 두겠습니다.”
“아니…… 지금 내가 장난하는 걸로 보이나?”
이딜로스는 답답하다는 듯 그들에게 몇 차례나 내 외양을 설명하다가 한숨 끝에 그들을 돌려보냈다.
나는 제풀에 지쳐 다시금 나를 경계하며 다가오는 이딜로스에게 보란 듯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말했잖아. 난 이딜로스가 창피당할까 봐 미리 알려 준 건데. 다른 사람들 눈엔 내가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야.”
“……당신, 귀신 같은 겁니까?”
“나 누군지 모르겠어?”
“귀신을 보는 게 처음인데 내가 어떻게 압니까.”
“……너무해. 너 왜 날 악귀 취급해?”
“악귀 아니었습니까?”
이딜로스가 예민하게 내뱉는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이 없어졌다.
현재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경계심도 있고…… 그런데 어쩐지 덜 사납게 느껴진다고 할까. 현재의 이딜로스처럼 마냥 무섭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이딜로스가 날 모른다니. 당연히 그러리란 건 알았지만, 조금 섭섭했다.
나는 비장한 눈으로 이딜로스를 샅샅이 살펴봤다. 분명 아천타의 힘은 이딜로스를 옭아매고 있을 테니 그의 근처에 있을 거다.
그래, 지금 이딜로스의 소매 단추에서 피어오르고 있는 저 검은 기운처럼.
나는 이딜로스의 두 손을 덥석 붙잡았다. 생글생글 웃자 이딜로스가 당황하더니 뒤로 물러나려 했다. 물론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이딜로스의 소매 깃을 빠르게 문질러 아천타의 기운 위로 내 신성력을 덧대며 말했다.
“난 널 지키러 왔으니까 요정이 맞아. 책에서 요정은 사람들을 소소하게 돕는다고 되어 있었는걸.”
“……날 지키러 왔다고요?”
“응. 네가 날 볼 수 있어서 기뻐. 내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이렇게 너와 대화할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해.”
조곤조곤 속삭이는 말에 이딜로스의 얼굴이 조금씩 멍해지는 게 보였다. 지금의 이딜로스보다 훨씬 무해했다. 귀엽다.
나는 이딜로스를 와락 끌어안고 마구 뽀뽀하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듬직하게 말했다.
“난 뽀삐라고 해.”
“……뭐라고요? 설마 그게 이름입니까?”
“응.”
실은 내 이름을 밝혔다간 의도치 않게 이딜로스의 과거에 영향을 주는 꼴이 될까 봐 달리 괜찮은 이름으로 말한 거였다. 다른 후보로는 얼룩이, 미미, 흰검이 등이 있었다.
그런데 이딜로스의 표정은 이상하다 못해 조금 멸시까지 어려 있었다.
저 반응은 내가 인간일 적의 이름을 정할 때 생각한 후보를 늘어놓자 마멜라가 지었던 표정이기에 속뜻을 눈치챌 수 있었다.
“……이름이 별로야?”
“꼭 로제트 후작가에서 안셀이 키우는 말티즈 같은 이름입니다.”
그 정도로 별로란 말이야? 난 나름 좋은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시무룩하게 그를 올려다봤다.
“……그럼 네가 지어 줘.”
“내가 왜요? 한번 보고 말 사이에.”
이딜로스는 퉁명스레 대답하며 내 손을 쳐 내려 애썼다. 나는 그 하찮은 노력을 보며 싱글벙글했다.
“난 앞으로 너한테 계속 붙어 있을 거니까.”
“네?”
이딜로스는 끔찍한 걸 들은 사람처럼 날 바라봤다. 나는 붙잡고 있던 이딜로스의 손을 더 꽉 잡으며 눈을 반짝였다.
“이딜로스를 지켜야 해서 그래. 나한텐 그래야 할 의무가 있어. 그러지 못하면 여기서 못 떠나거든.”
그가 석연찮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온갖 경계심과 불신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내가 기대 어린 눈으로 그를 간절히 바라볼수록 어쩐지 그 눈빛이 무뎌지더니…… 끝내는 그가 말했다.
“……그럼 아릴로 하시던지요. 이름.”
“……뭐? 이딜로스, 설마 내가 누군지 기억났어?”
“아니요? 처음 본다니까 왜 자꾸 기억나느니 마느니 하는 겁니까. 처음부터 날 다른 사람으로 단단히 착각한 거 아니고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이름은 어떻게 지었어?”
“저 책.”
이딜로스가 탁자를 향해 눈짓했다. 그곳에는 『아리리(Ariri)』라는 제목의 표지에 용맹한 호랑이가 그려진 책이 있었다.
“저기서 따왔습니다.”
“저 책은…… 뭐야? 특별한 책이야?”
“그냥 여동생에게 읽어 주려고 놔둔 책인데요. 여동생이 좋아할 것 같아서.”
기억이 난다. 분명 안셀은 마멜라가 저 책을 무척 좋아한다고 했어. 이딜로스가 마멜라에게 읽어 줬던 책인 거구나.
나는 그 책을 보다가 시선을 들어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이렇게 좋은 남매 사이라니 왠지 감동이 우러나오려 했다.
“역시 이딜로스는 다정해.”
“…….”
이딜로스의 표정이 묘해졌다. 짧게 숨을 삼키고는 조금 멍하게 느껴지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의 손을 놓았다. 확인해 보니 아천타의 힘은 소멸한 후였다.
눈에 보였던 급한 불 하나를 껐고, 이딜로스가 나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으니…… 이제는 마지막으로 확인할 것만 남았다.
“이딜로스, 지금 몇 살이야? 그, 혹시 부모님은 잘 계셔?”
내 말에 다시금 멍한 낯을 지운 이딜로스는 순간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얼마 안 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전 지금 열입곱 살입니다.”
“그래? 생각보다 더 어리네. 귀엽다.”
“…….”
배시시 웃으며 무심코 그의 볼을 꼬집자 이딜로스가 경멸 어린 눈으로 손을 탁 쳐 냈다.
그러곤 한 걸음 물러나더니 말했다.
“그리고 부모님은 아까 외출하셨고요. 곧 돌아오실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