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이 인간이 바로 이딜로스의 스승이라던…….’
커튼의 펄럭임이 멈추자, 방 안에는 다시금 어둠이 찾아들었다. 데비드는 주변을 둘러보더니 못마땅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원, 이리 어둑해서야. 혹 어두운 곳을 좋아하나? 미안하지만, 내가 눈이 침침해 커튼 좀 걷지.”
손수 커튼을 양옆으로 활짝 걷기 시작하는 그를 꺼림칙하게 쳐다봤다. 한낱 인간이 어떻게 내 귀를 피해 인기척도 없이 들어온 것일까.
그리 의심하던 때, 꼭 내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가 말했다.
“많이 상심한 모양이지. 내가 창문을 타고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
“안셀 녀석은 저만치 버려두고 왔는데, 그리 경계하는 것을 보니 같이 올 걸 그랬군.”
안셀과 같이 왔다는 말에 나는 경계심을 아주 살짝 누그러뜨렸다.
하지만 아천타로 인해 엘리네에게 밀쳐져 바다에 빠진 마당에, 그 누구도 믿을 수가 없어 곤히 잠든 이딜로스를 조금 끌어당겼다.
데비드는 인상 좋아 보이는 서글한 웃음을 짓더니 다가왔다.
“안심해도 된다. 난 이딜로스와의 약속으로 온 거야. 모처럼 멀끔하게 차려입고 너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갑자기 저 녀석이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온 것뿐이야.”
그 말이 거짓은 아닌 건지, 창밖 저 너머에서 ‘형님!’하고 그를 찾아 헤매는 안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이딜로스를 끌어당기던 손에서 힘을 뺐다.
내가 경계를 풀었다는 걸 눈치챈 데비드가 성큼성큼 다가와 맞은편 침대 머리맡에 섰다.
“날 믿어도 후회할 일은 없게 만들지.”
나는 그를 흘겨봤다.
‘……이 인간은 내가 수인이라는 걸 모르나? 다른 인간들처럼 존대도 안 하네.’
여태껏 수인인 내게 깍듯이 대하던 인간들만 봐 와서인지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너무 자연스럽고 여유롭게 느껴져서 이상하게 여겨지진 않았다.
데비드는 턱을 매만지며 이딜로스를 내려다보다가 시선을 들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어디 보자…… 따님? 조금 이상한데. 내가 널 뭐라고 불러 주면 좋겠나?”
“그냥 남들이 날 부르는 것처럼…….”
“수인님, 뭐 이런?”
“내가 수인인 걸 알아?”
“아까 내 제자의 몸으로 아무렇지 않게 손을 집어넣어서 이상한 걸 꺼내는 모습을 봤는데, 모르면 천치지.”
“……그런데도 존대를 안 하네?”
“아, 원한다면 해 드리지. 존대하는 것이 썩 익숙지는 않지만 말이야.”
“……그냥 편하게 아릴이라고 불러. 존대는 나도 불편할 것 같아.”
“그럼 그러지. 그런데 말이야, 난 분명 내 딸아이의 이름을 아펠리아라고 들었는데.”
“그건 내가 인간인 척할 때의 이름이야.”
“그래? 재미있군. 앞으로는 아릴이라고 부르마.”
왠지 성격이 저런 걸 보면 사제직을 관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했다.
이딜로스가 신을 믿지 않는 건 이 인간의 영향인가? 수인에게 반말할 생각부터 하다니.
공경심도 없는데 대체 어떻게 사제가 되었던 거지?
“우선 말하자면 난 아천타의 흔적을 쫓으며 연구하는 평범한 사람이야.”
“그 말은…… 아천타에 대해서 아는 게 많다는 거야?”
“그래.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데비드는 침대 옆에 있던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방금 네가 하려던 대로 했다간 이딜로스는 심각한 내상을 입고 영영 깨어나지 못할 거다.”
“뭐?”
“그 증세는 근본적인 것을 없애야 해결되는 거야.”
나는 의문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데비드는 이해하지 못한 내 낯을 확인하더니 시선을 내려 이딜로스를 살피며 말했다.
“우선 상태를 봐야겠군. 음……, 잠깐 나가 주겠나? 보아하니 밤낮 가리지 않고 간호했나 본데.”
“뭐? 그럴 순 없어. 네가 믿음직한 인간인지도 모르겠고, 난 이딜로스의 곁에 있어야 해.”
“그리 경계하다니 섭섭하군. 그래도 내가 아버지인데.”
“서류상이잖아.”
“서류상이면 아버지로 쳐 주지도 않는 건가? 난 얼굴도 모를 딸을 드디어 보겠단 마음에 설레서 달려왔는데, 너무하군.”
“…….”
“진짜야. 그리 못 미덥다면 내 동생을 데려오도록 하지.”
돌연 데비드가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어두운 실내에서 푸른빛이 아래로부터 피어나기 시작했다.
나는 공연히 시선을 내렸다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래에 이상한 고대어와 문양이 둥글게 생겨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빛이 번쩍이더니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다.
“아이고! 이게 무슨……! 헉, 형님? 아릴 님까지……?”
“불러왔으니 되었겠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나와 데비드를 번갈아 바라보는 안셀의 모습에 나는 입을 벌렸다.
‘이건 워프잖아. 아슐란 정도나 되어야 곧바로 할 수 있는 건데…….’
나는 놀란 안셀을 다독이는 데비드를 믿을 수 없는 눈으로 바라봤다.
내 기억 속 신전엔 데비드가 없었다. 그럼 데비드가 신전을 나간 것이 내가 태어나기 전이었다는 건데.
그때 데비드가 신전의 최고위 사제 정도에 속해 있었기에 이 정도의 힘을 쓸 수 있는 거라면…….
그리고 아천타에 대해 아는 것이 많기까지 하다면.
이 인간은 틀림없이 내게 도움이 될 거다. 비록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꼭 내가 없어야만 이딜로스의 상태를 살필 수 있는 거야?”
“그렇다기보다는 네게 쌓인 피로가 보여서 그만 쉬러 가라고 하는 거다. 제 몸도 돌보지 않으면서 어떻게 남의 몸을 돌보겠어? 네가 보기엔 어떻지, 안셀?”
데비드는 여전히 우왕좌왕하는 안셀의 등을 팡팡 두들기며 물었다.
안셀은 내가 있다는 걸 새삼 상기한 사람처럼 갑자기 등허리를 펴고 헛기침을 하더니 말했다.
“확실히…… 아릴 님이 피로해 보이시기는 합니다. 밤을 지새우며 전하를 간호한 것이지요? 그럼 이제 저희에게 맡기고 이만 쉬러 가시지요.”
“하지만…….”
“내일 다시 전하의 곁을 지키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하지요. 번갈아 가며 간호를 하는 것으로요.”
안셀은 언제 허둥지둥했냐는 듯 온화한 미소를 걸쳤다.
나는 데비드를 재차 훑어보다가 망설임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딜로스를 부탁해.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곧바로 알려 줘야 해.”
“하나뿐인 딸의 말이니 명심하지.”
이윽고 나는 걸음을 돌렸다. 문을 열고 나갈 때, 뒤편에서 안셀이 데비드에게 ‘어찌 수인이신 아릴 님께 존대를 하지 않느냐’며 타박하는 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이어지는 호쾌한 웃음소리도.
‘……믿어도 되는 거겠지?’
* * *
이딜로스를 간호하는 동안 눈도 제대로 붙이지 못했기 때문인지 나는 돌아가자마자 기절에 가까운 잠을 자고 이른 아침에 깨어났다.
막 채비를 마치고 방을 나섰을 때 복도에서 나를 데리러 온 안셀을 마주쳤다.
“아, 아릴 님. 편히 주무셨습니까?”
“이딜로스가 걱정이 되어서 마냥 편하지는 않았어.”
“그 마음 이해합니다. 역시 아릴 님은 심성이 따뜻하시군요.”
“넌 보는 눈 하나는 있다니까.”
안셀은 나와 걸음을 맞추며 이딜로스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안셀이 열어 주는 문으로 들어가자 여전히 어제와 같은 모습으로 침대에 누워 있는 이딜로스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엔 의자에 앉아 팔짱을 끼고 코를 골고 있는 데비드의 모습이…….
안셀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허억, 아깐 분명 말똥하게 깨어 있었는데! 형님, 형님, 일어나십시오!”
“아. 안 잤으니 걱정 말 거라.”
“코까지 골으셨으면서 무슨!”
나는 짜게 식은 눈으로 데비드를 바라봤다. 안셀은 그런 내 눈치를 살피더니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서글서글 웃으며 나를 이딜로스 쪽으로 이끌었다.
나는 데비드의 얼굴을 탐탁지 않게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떻게 됐어? 이딜로스의 상태를 본다고 했잖아.”
데비드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살펴보니 아천타의 기운이던데.”
“……역시 그런 거였구나. 그럼 그건 아마 수인인 나 때문일 테고.”
“글쎄. 이딜로스에게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 것일 수도 있지. 그리 생각 말 거라.”
내가 힐끔 시선을 들어 그를 보자 데비드는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아천타의 힘이 인간의 몸에 해를 끼치려면 직접적인 방식으로 접근해야 해. 보아하니 몸속에 오래 묵힌 기운과 최근에 새로 생긴 기운이 한데 엉켜 단단한 응집체를 만든 모양이구나.”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데비드는 잠시 너털웃음을 흘리더니 말했다.
“연구의 성과인 거지. 그래서 최근 이딜로스가 아천타와 접촉한 적이 있느냐인데, 우리 따님은 아는 것이 있나?”
“형님, 제발 좀!”
안셀이 데비드를 다그쳤다. 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최근에 이딜로스가 아천타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 이상한 차를 계속 마셔 오긴 했어.”
“그 차의 특징은?”
“다른 건 다 평범한데…… 묘하게 쓴 냄새가 났어. 그런데 그것도 인간들은 맡지 못하나 봐. 나만 느꼈어.”
“쓴 냄새라……. 아천타의 비늘이군.”
데비드의 낮은 중얼거림에 나는 멈칫했다.
아천타의 비늘이라니, 그건 나를 다치게 했었던 ‘아천타의 검’의 주재료였다. 새까맣고 윤택이 나는 매끄러운 비늘.
나를 죽이려 했던 것이 이번엔 이딜로스마저 해치고 있다.
나는 황망함에 혼란스러운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많은 생각이 오갔다.
그건 수인인 나에게도 독한 건데 인간에게는 얼마나 심할까. 그럼 운 좋게 살아남은 나와 달리 이딜로스는…….
“아천타의 비늘은 수인에겐 치명적인 독이지만 인간에게는 그 정도로 위협적이지는 않아.”
내 생각을 읽은 듯한 데비드의 말에 나는 두 손을 모아 쥐었다.
“그게 정말이야?”
“음, 다만 몸속에 퍼져 정신을 제어할 수는 있지.”
……제어한다니? 설마 아천타가 인간의 정신을 조작해 다룰 수 있다는 건가?
“표정을 보니 이해한 모양이군. 다행히 이딜로스의 몸에 있는 아천타의 힘은 경미한 수준이야. 조종하기엔 부족하다는 것이지.”
“……그래서? 이딜로스를 구할 수 있는 방법이 뭐야?”
“내가 근본적인 걸 없애야 한다고 한 걸 기억하나?”
“응.”
“내가 살펴본 바에 따르면 지금 아천타의 비늘은 이딜로스의 의식을 기억 속에 묶어 통제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 답은 나온 셈이지.”
“뭐가 나왔는데?”
“네가 들어가.”
“어디를?”
“여기.”
데비드가 손으로 이딜로스의 머리를 가리켰다. 나는 진심인가 싶어 그를 쳐다봤다.
“저긴 내가 아기 고양이가 되어도 못 들어가.”
“그래? 가능할 것 같은데.”
“농담할 기분 아니…….”
데비드가 팔을 내게로 팍 휘둘렀다. 그의 손바닥이 내 코앞에서 멈췄다.
나는 놀라 굳기도 잠시, 몸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이게 뭐…….”
“아릴 님! 혀, 형님, 지금 무슨 짓을……!”
발끝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구름을 밟고 선 것 같기도 하고, 그냥 바람을 타고 날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대체 데비드가 내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리고 시야는 왜 점점 올라가는 것 같지…….
점점 높아져 데비드마저 내려다봐야 할 지경이 되었을 때 이상함에 고개를 내렸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내 몸이 이딜로스의 침대에 쓰러지듯 엎드려 있었다.
“무, 무슨…….”
옆에 있는 안셀은 나를 보지 못하는 듯 축 처진 나를 연신 흔들어 대고 있었다.
그러나 데비드는 둥실둥실 떠오르는 나를 보고는 즐겁게 웃고 있었다.
“육신과 혼을 분리한 거다. 일반적인 방법으론 들어갈 수가 없으니까. 마음의 준비가 된다면 보내 주도록 하지.”
그의 미소에 일순 알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가슴이 뭉클하며 조금은 편안한 것 같기도 한.
나는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대체…… 정체가 뭐야, 너?”
“신이 세 번째로 사랑하는 존재 정도로 해 두지.”
데비드는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혼이 빨려 드는 듯한 기분이 들더니, 점차 시야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들여보내마. 아마 이딜로스의 과거를 보게 되는 것이니 긴장해야 할 거다.”
대답도 내뱉기 힘들 정도로 머릿속이 울렁거렸다. 마침내 시야가 완전히 꺼지기 전에 데비드가 경고했다.
“들어가서 곳곳에 퍼져 있는 아천타의 흔적을 모조리 지우도록 해라. 또한, 이딜로스가 현재의 기억에 이르기 전까지는 모든 일을…….”
그의 목소리가 끊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소리들이 귓가에 들어차기 시작했을 때,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시야에 빛이 차오르더니 점차 선명해졌다.
가장 먼저, 눈앞에 있는 것을 확인한 나는 숨을 들이켰다.
쨍쨍한 해가 내리쬐는 화창한 여름날의 카델라로트 저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