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아슐란이 방을 나서자마자 그는 기다리고 있던 이딜로스와 마주쳤다.
한껏 흐트러진 얼굴의 이딜로스가 물었다.
“아릴은 괜찮습니까?”
“네, 무사하십니다.”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이딜로스는 희미한 웃음을 짓더니 아슐란을 지나쳐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곧바로 팔이 붙잡혔다.
멈춰 서게 된 이딜로스는 자신을 붙잡아 세운 아슐란을 돌아봤다.
“왜 그러…… 윽.”
이딜로스는 갑작스레 머리가 띵해져 미간을 찡그렸다.
최근 들어 머리가 아픈 일이 잦았다. 눈앞이 살짝 흐릿해지며 머릿속이 뒤흔들리는 기분에 이딜로스는 잠시 비틀거렸다.
그는 간신히 벽을 짚고 서서 안정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 한참 만에야 이딜로스가 아슐란을 바라봤다.
“……미안합니다. 별건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딜로스의 여상한 말에 아슐란은 그를 위에서 아래로 한차례 훑어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공의 몸 상태가 성치 않다는 걸 모르십니까?”
“난 원래 이랬습니다. 그런 건 그다지 중요치 않습니다. 그보다는 아릴이…….”
“중요치 않다?”
돌연 아슐란이 말을 따라 읊더니 피식 웃었다.
낯선 태도에 이딜로스가 멈칫하곤 그를 바라봤다. 얼마 차이 나지 않는 눈높이였으나, 아슐란이 그보다 조금 높았다.
“역시 미련하군요. 옛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해야 할지.”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본인의 건강을 좀 더 보살피란 말입니다. 남을 걱정하기 전에.”
이딜로스는 말없이 표정을 굳혔다. 꼭 속이 꿰뚫리기라도 한 기분이었다.
오래전, 그가 가장 힘들었을 시기에 마주한 적이 있던 아슐란이기 때문일까.
그다지 자주 보는 사이가 아님에도, 아슐란은 제 몸은 잘 생각하지도 않는 이딜로스의 지독한 강박 증세를 알고 있는 것처럼 굴었다.
“보아하니 인간이 접해서는 안 될 것에 중독된 듯하군요. 제가 해결해 드리겠습니다.”
“중독이라니요?”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이딜로스는 어떤 중독을 말하는 것인지 알려 달라는 의향으로 되물은 것이었으나, 아슐란은 대답 대신 손을 뻗었다.
이딜로스의 팔을 붙잡았던 손이 그의 어깨에 닿았다.
이딜로스는 그 손을 바라봤다가, 다시금 아슐란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그러곤 뭘 하려는 것이냐 물으려 했으나…….
“윽……!”
몸이 비틀거렸다. 조금 전, 가까스로 돌아왔던 시야가 다시금 흐리게 변하더니 최면에 걸린 것처럼 빙빙 돌기 시작했다.
인상을 찌푸린 이딜로스는 벽을 짚은 손에서마저 힘이 서서히 빠지는 것을 느꼈다.
“대체, 무슨…… 짓을…….”
비틀거리던 이딜로스의 몸이 아슐란의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흐릿하게 깜빡이던 그의 눈은 굳게 감긴 후였다.
“그저 자고 일어나면 됩니다. 눈 좀 붙였다 깨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고 새로운 변화가 시작될 테니.”
아슐란은 제 어깨에 쓰러진 이딜로스를 무감하게 바라보다가, 주변을 둘러봤다.
마침 별장의 사용인이 지나가고 있었다.
아슐란은 카델라로트 공작이 갑자기 쓰러졌다고 말한 뒤, 급히 달려온 이들에게 이딜로스를 넘겼다.
그리고 소란과 함께 멀어지는 이딜로스를 바라보다 살며시 입매를 끌어당겼다.
이 판도를 위해서, 지금 카델라로트 공작의 역할은 여기까지였다.
“당신에게 걸겠습니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공.”
* * *
머리가 어지러웠다. 왜 이런 걸까, 잠시 생각하다가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고 보니 엘리네에게 밀쳐져 물에 빠졌었지 않던가.
엘리네에게선 희미하게 그 냄새가 났다.
넬라가 이딜로스의 차에 탔었던 그 무언가의 쌉싸름한 냄새.
내 예상이 맞다면 그건 아마 아천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일 터다.
설마 아천타는 황실로도 모자라서…… 일개 귀족인 엘리네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는 걸까.
그런 거라면 엘리네가 나를 밀친 건, 단순히 나를 향한 시기심 때문이 아니라 나를 없애라는 아천타의 명을 받은 걸지도 몰랐다.
‘아천타가 나를 죽이려는 건 확실해. 또 내 위치를 알고 있는 모양이고…… 그 차 사건으로 미루어 봤을 때 이딜로스를 위험에 빠트리려 하는 것도 분명해.’
그런데 나를 죽이려는 건 그렇다 쳐도, 이딜로스를 노리는 건 대체 무슨 목적이지?
그건 황제의 뜻인 걸까, 아천타의 뜻인 걸까…….
복잡한 생각을 자꾸만 이어 간 탓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문득 현실적인 걱정이 닥쳐왔다.
바다에 빠진 나는 어떻게 된 거지?
지금도 계속해서 바다 깊숙한 곳으로 침몰하고 있을까. 하지만 마냥 그렇다기엔 그다지 몸이 축축하거나 숨이 막혀 고통스러운 느낌은 들지 않는데.
‘내가 의식을 잃은 상태라 그런 걸까.’
이대로 계속 바다에 가라앉는다면, 나는 폐에 물이 가득 차 숨도 쉴 수 없고, 그렇다고 지상으로 올라갈 수도 없을 것이다.
‘……대단한 말로네.’
그 말은 수명이 다해 자연적으로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는 죽지도, 그렇다고 의식을 차리지도 못한 채 영영 무의식으로 바다를 떠다녀야 한다는 것 아닌가.
이딜로스를 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슬프게 다가왔다. 그뿐 아니라 마멜라도, 안셀도, 요나도.
나는 아무것도 해 준 적이 없는데. 내게 친절을 베풀어 준 인간들에게…….
그때 어디선가 부스럭대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가만, 손에 뭔가가 느껴져.’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가, 손을 더듬거렸다. 딱딱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왠지 모를 섬뜩함을 느끼곤 고개를 내저었다. 기이한 감각에 있는 힘껏 고개를 내젓길 반복하다가…… 돌연 눈이 번뜩 뜨였다.
나는 찡그린 눈을 몇 차례 슴벅였다.
사위가 어둡다. 그리고 낯선 냄새가 난다. 아니, 정확히는 익숙하고도 그리워 마지않던 이딜로스의 냄새와 뒤섞여 난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금세 어둠에 적응한 시야가 낯선 풍경을 눈에 담았다.
넓지만 호화로움과는 거리가 멀 정도로 검소하며 풍기는 분위기만으로도 거룩하고 고귀한 방.
‘여긴 어디지?’
머리가 지끈거리는 탓인지 정신이 몽롱했다. 나는 아까부터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내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바로 옆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익숙한 냄새와 익숙한 인영, 그리고 숨소리까지.
‘……이딜로스?’
이딜로스였다. 그가 분명했다.
그런데…… 이딜로스의 차림새가 평상시와는 많이 달랐다. 침대에 누워 있는 걸 보면 침의를 입고 있는 듯한데, 꼭 신전에서나 입을 법한 새하얀 차림새였다.
아닌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고…….
‘난 분명 물에 잠겨 있을 텐데 이딜로스가 왜 눈앞에 있는 거지? 여긴 또 어디고?’
나는 미심쩍게 눈가를 좁히다가 이딜로스를 깨워 보려고 손을 움직였다. 그런데 손은 내 의지와 다르게 꿈쩍도 하지 않았다.
왜 이러나 싶어 고개를 내린 순간 줄곧 움직일 기미가 없던 손이 저절로 움직여 천천히 들어 올려졌다.
이윽고, 한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가 보였다.
‘……단검? 이런 걸 왜 들고 있지?’
통제를 잃은 손은 단검을 붙든 채, 반대 손으로 검집을 벗겨 내던졌다.
창으로부터 들어온 푸른 달빛에 칼날이 유난히 시려 보였다.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뭐 하려는 거야. 왜 잠들어 있는 이딜로스의 앞에서 단검을 뽑는 거야.
이게 내 몸이 맞는 건가? 왜 멋대로 움직이는 것이며, 이 낯선 곳에 있는 거지?
머릿속으로 혼란이 몰아치는 동안, 두 손은 검의 손잡이를 쥐고 올렸다. 검 끝은 이딜로스를 겨눈 채.
나는 놀라 숨을 몰아쉬면서도 손이 움직이는 걸 막지 못했다.
눈앞에 두려움이 검은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손이 미친 듯이 달달 떨렸다.
‘왜, 왜 이러는 거야. 이러지 마…….’
별안간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일순 모든 사고를 멈췄다.
‘지금…… 내가 왜 우는 거지?’
지금 상황이 두렵고 당황스럽긴 하지만, 그저 끔찍할 뿐이지 눈물이 날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너무 비현실적인 상황이라 당혹감이 더 클 뿐인데.
망설이기라도 하는 듯 한참이나 가만히 검을 쥐고 있다가, 마침내 떨리는 손이 조금 더 들어 올려질 때였다.
줄곧 잠들어 있는 줄만 알았던 그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
그가 뭔가를 말하고 있다는 인식은 드는데, 어째선지 그의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이딜로스는 뭔가를 말하고는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있던 그의 눈썹이 미약하게 떨리더니 다시 뭔가를 말하기 시작했다.
“……으로…… 한 번이라도…… 싶어.”
“…….”
“……이니 안 되겠지.”
그의 미소가 희미하게 머물다 마침내 지워졌을 때.
나는 요란할 정도로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지도 않고, 덜덜 떨리는 손으로 검을 세게 쥐고 이딜로스를 향해 힘껏 내렸다.
‘안 돼…….’
안 돼!
“이딜로스!”
눈을 번쩍 떴다. 넘어갈 것 같은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그러다 차츰 호흡이 진정되었을 때, 시야가 익숙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딜로스와 함께 여행 온 라젠트의 별장이다.
나는 주변을 살피고, 내 얼굴을 더듬다가 마지막으로 두 손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꿈…… 이었구나.’
그렇게 생생한 꿈이라니. 꿈속에서 나는 이딜로스의 냄새도 맡았고 검 자루의 감촉까지 느꼈는데…….
눈을 질끈 감았다. 꿈이어서 다행이었다. 어떻게 그런 끔찍한 꿈을 꿀 수가 있는 거지.
내가 이딜로스를 해치려는 꿈이라니.
한숨을 내쉰 나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지금 이게 현실인 건 분명한데.
천천히 기억을 더듬었다. 바다에 빠져 의식을 잃기 전에 내게로 헤엄쳐 오는 이딜로스의 모습이 언뜻 보였던 것 같기도 했다.
내 손목을 감싸 쥐고 끌어 올리는 힘, 긴박한 표정, 입술에 닿은 온기까지.
‘이딜로스가 날 구해 준 거야…….’
나는 안도의 미소를 피워 냈다. 그런데 왜 이토록 가슴이 답답한 건지 알 길이 없었다. 아까 전의 그 꿈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대로 바닷속에 영영 잠겨 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괜히 그런 이상한 꿈까지 피워 낸 거야.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곤 바로 옆에 있던 설렁줄을 당겼다.
어서 이딜로스를 보고 싶었다.
이딜로스를 만나서, 무서웠는데 네가 구해 준 덕분에 안도할 수 있었다고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꿈과는 달리 이딜로스가 무사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
얼마 안 가 저 멀리서 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문이 열렸다. 별장의 사용인이었다.
허둥지둥 달려온 사용인이 반색했다.
“아가씨, 깨어나셨군요! 정말 다행이에요!”
“아, 응. 고마워. 있잖아, 공작님은 어디 계셔?”
나를 반겨 주는 모습에 기분이 살짝 좋아져 웃으며 물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사용인의 표정이 굳더니 곤란한 기색이 되었다.
나는 우물쭈물하는 그녀를 보다가 불길함을 느끼곤 웃던 걸 멈췄다.
“무슨 일이라도 있어?”
“그게…… 공작님께서 쓰러지셨는데 계속 의식이 없으세요. 그, 그리고…….”
“……뭐?”
시녀가 내 안색을 살피는 듯하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러 의원들을 불러와도 다들 공작님의 병상을 모르겠다고……. 깨울 방도가 없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