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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24화 (114/191)

124화

아릴의 자그맣고 가벼운 발걸음 소리가 다가왔다.

“이딜로스.”

풍겨 오는 달콤한 향기에 일순 심장이 쿵쿵거리는 것을 느끼며 이딜로스는 고개를 들었다.

가운을 느슨히 여민 채 물이 톡톡 떨어지는 머리칼로 수건을 들고 있는 아릴이 보였다.

이딜로스는 잠시 멍해졌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기겁했다.

아니, 정확히는 뭔가가 뚝 끊기는 소리에 제 멱살을 잡고 정신을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아릴은 그를 어리둥절하게 보다가 수건을 내밀었다. 그와 동시에 이딜로스가 벌떡 일어섰다.

“이딜로스, 나 머리 말려…….”

“미안. 난 좀 씻어야 할 것 같아.”

이딜로스는 아릴을 피해 도망치듯 욕실로 갔다.

그런데 너무 급하게 들어온 탓인지 이딜로스는 머리가 띵해져 비틀거렸다.

또다시 에펜도르로 향할 때처럼 머리가 지끈거렸다.

이딜로스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다가, 천천히 씻기 시작했다. 다행히 따뜻한 물이 닿으니 두통도 열기에 녹듯 서서히 사라졌다.

목욕을 끝낸 이딜로스는 물기를 닦은 잘 짜인 몸에 가운 대신 잠옷을 걸쳤다. 한 치의 노출도 없게 단추를 꽉 잠그고는 긴장을 머금고 욕실에서 나왔다.

분명 아릴이 기다렸다며 달려오거나 좋은 냄새가 난다며 끌어안거나, 왜 이렇게 늦게 나왔냐고 칭얼대겠지.

조금 경계하는 마음을 가지며 두리번댔다. 그런데 아릴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조금 의아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면서 타월로 머리의 물기를 털어 냈다. 머리가 제법 말랐을 때 수건을 내려놓고 아릴을 찾아 나섰다.

“아릴?”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그의 걸음과 시선이 멈춘 곳은 침대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분명 걷혀 올라가 있던 캐노피가 풀려 침대를 꼼꼼하게 가리고 있었다.

“……아릴?”

이딜로스는 혹시나 싶은 마음에 발소리를 줄이고 다가가 캐노피를 살짝 걷었다.

걷힌 캐노피의 틈새로부터 빛이 스민 어둑한 침대 안이 보였다.

그 속에서 아릴은 곤히 잠들어 있었다.

이딜로스는 아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기척이 느껴지지 않게 조심히 그녀의 옆에 걸터앉았다.

‘피곤했나 보네. 벌써 잠들고.’

왜인지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그걸 깨닫자마자 이딜로스는 질겁했다.

왜, 왜 아쉬움을 느낀단 말인가. 스스로가 조금 저질스러워져 인상을 찡그렸다.

“……짐승 같은 놈.”

정작 진짜 고양이인 아릴도 이렇게 순수하게 잠들어 있는데.

이딜로스는 생각을 떨쳐 내며 새근새근 잠든 아릴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내려갔다.

굳게 닫힌 우윳빛 눈꺼풀 위로 긴 속눈썹이 내려앉아 있다. 가냘프면서도 오뚝한 콧날을 천천히, 거닐듯 타고 내려가자 다물린 붉은 입술이 보였다.

도톰한 데다 윤기가 나는 것도 같아 훔쳐 물고 달아나 버리고 싶었다.

정신을 차릴 새도 없이, 이딜로스는 홀린 듯이 상체를 숙였다. 이제는 약혼도 한 사이인데, 굿 나잇 키스 정도는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입술을 살짝 벌리고 고개를 기울이며, 아릴의 턱을 살며시 쥐었을 때였다.

별안간 그의 팔이 확 잡아당겨졌다. 삽시간에 시야가 빙글 돌았다. 당혹감에 눈을 크게 뜨는 순간, 등에 푹신한 침대가 감겨 왔다.

자연스레 그가 붙잡고 있던 캐노피가 다시금 흘러내려 스며들던 모든 빛을 집어삼켰다.

그의 위에는 아까까지만 해도 곤히 잠들어 있던 아릴이 올라타 있었다. 이딜로스는 눈앞에 자리한 인영에 눈을 떼지 못했다.

급격한 움직임 탓인지 잠옷을 입고 있던 아릴의 한쪽 어깨끈이 살짝 흘러내렸다.

허리를 꼿꼿하게 핀 아릴이 그를 내려다보며 장난스레 웃음 지었다.

“속았지!”

“…….”

“내가 감쪽같이 속였나 봐. 이딜로스가 그런 바보 같은 표정도 짓고.”

아릴은 이딜로스의 날렵한 코끝을 손으로 톡 건드렸다. 그러곤 입을 살짝 벌려 빙그레 웃었다.

그때 이딜로스의 손이 올라와 그녀의 허리를 잡았다.

아릴이 여전히 웃음을 띤 채 천진하게 갸웃했다. 이딜로스가 뭘 하려 해 봤자 어서 자라고 옆자리로 밀어내려는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멈추지 않고 조금 더 올라와 아릴의 배에 닿았다.

간지럽다며 웃음을 피워 내던 아릴은 시선을 내렸다가 놀랐다. 이딜로스의 눈빛에 형언할 수 없는 무언가가 불길처럼 넘실대고 있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열감에 아릴이 멈칫하자, 서서히 그녀를 타고 오르던 손이 확 올라가 아릴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그대로, 아릴은 끌려 내려갔다.

주저 없이 맞부딪힌 입술로부터 여태의 입맞춤과는 다른 과격함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입술 너머로 열기가 밀어닥쳐 와 아릴을 헤집었다.

“으읍…….”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온 온기는 거친 것 같으면서도 섬세하게 입 안 곳곳을 파고들어 녹였다.

늘 하던 입맞춤과는 질을 달리할 정도로 농염한 열락이 느껴졌다. 정신이 어질어질해지는 뒤엉킴에 아릴의 눈썹이 서서히 힘을 잃고 풀어졌다.

숨 막힘 뒤로는 달콤함이 따라붙었다. 아릴은 그를 잠시 밀어내 숨을 몰아쉬고 싶다가도, 온몸이 녹아 버릴 듯한 온기를 영영 놓고 싶지 않기도 했다.

달뜬 숨을 주고받으며 깊게 맞물려 있던 입술이 한참 만에 떨어졌다. 그럼에도 아릴의 입술은 여전히 뜨거웠다. 따뜻한 물에 잠겨 있는 것만 같았다.

언제고 다시 입술이 맞닿을 거리에서 이딜로스가 아릴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 번지는 황금색 불꽃이 금방이라도 아릴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곧 이딜로스는 아릴의 코허리에 제 코를 문지르며 나른한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아릴…….”

아릴은 가슴에서 피어오르는 이상한 열기를 느꼈다.

목 뒤를 잡고 있던 이딜로스의 손이 아릴의 살결을 훑듯이 지분댔다. 그럴 때마다 아릴은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이, 이딜로스.”

“응.”

“간지러워…….”

“간지러워?”

웃음기 어린 되물음에 아릴은 심장이 두근거렸다.

왜 이럴까. 지금 이딜로스는 꼭 뭔가에 취해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 휩쓸려 취기 비스름한 걸 느끼고 있는 건 아릴도 매한가지였다.

목을 지분대는 이딜로스의 손길에 이상하게도 안달이 났다. 그 탓인지 생각을 거치기도 전에 말이 튀어나왔다.

“나 지금…… 너 잡아먹고 싶어.”

“…….”

“분명 먹어 없애고 싶은 건 아닌데, 자꾸…… 참지를 못하겠어.”

이딜로스의 눈빛이 묘한 빛을 띠었다. 아릴은 자신이 막무가내로 내뱉은 말 때문에 그가 또 겁에 질리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럼 그냥 잡아먹을래?”

불현듯 그가 내뱉은 말에 아릴은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대답을 믿을 수가 없어 바보같이 되물었다.

“뭐를……?”

“나를.”

이딜로스가 눈을 살짝 휘며 말했다.

웃음기 어린 그의 눈은 진심이었다. 아릴은 본능적으로 그가 말하는 ‘잡아먹다’가 정말로 씹어 먹는 행위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릴은 가슴 새로 묘한 벅참과 희열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리고 그와 눈을 잠시 맞추다가, 홀린 듯이 고개를 내려 입을 맞췄다.

정말로 그를 잡아먹는 대신, 눈을 감고 이딜로스에게 모든 걸 내맡기듯 몸을 기대었다.

이딜로스라면 답을 알고, 모든 것을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 주리라 믿었기에.

아릴의 목덜미에서 멈춰 있던 손이 느릿하게 내려왔다. 그리고, 아릴의 등에 매여져 있던 끈을 서서히 당겨 풀었다.

* * *

아릴이 잠에서 깬 건 어스름한 빛이 들기 시작하는 새벽녘이었다.

비몽사몽함에 젖어 눈을 깜빡이던 아릴은 자신을 끌어안은 온기를 느끼곤 이딜로스의 품에 고개를 파묻었다.

‘어떡해. 어떡하면 좋아.’

눈을 뜨자마자 아릴의 속은 야단법석이 되었다.

심장이 마구 쿵쾅거리고,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흐물흐물 녹아 없어져 버릴 것 같았다.

아니, 그뿐일까. 이딜로스를 날름 집어삼켜 먹어 버리고 싶었다. 정말로, 너무 좋아서 당장 죽는다 해도 행복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 같았다.

‘그간 소설에서 남녀 주인공이 밤에 뭘 하는지 몰랐는데……. 이런 거였다니.’

아릴은 붕 뜨는 마음에 코앞에 있는 이딜로스의 가슴팍에 뺨을 문질렀다.

‘30번만 더 하자고 할걸…….’

아니, 괜찮다. 시간은 많으니까!

지난밤에 이딜로스가 얼마나 멋있고, 사랑스럽고, 귀엽고, 예쁘고, 잘생겼고, 또 섹시했는지를 떠올린 아릴은 속으로 오두방정을 떨며 심장을 졸였다.

하도 품 안에서 뺨을 비비적대고 난리를 부리는 통에 이딜로스가 살짝 미간을 찡그리곤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럼에도 잠에 깨지는 않았다는 점이 쓸데없이 귀여워서 아릴은 또 한 번 심장 앓이를 했다.

‘평생을 함께할 내 반려.’

아릴은 잠든 이딜로스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지난밤, 이딜로스가 수고한 끝에 아릴은 깨끗한 몸에 옷까지 새로 갖춰 입은 참이었다.

배시시 웃음을 피운 아릴은 그의 턱에 쪽, 입을 맞추고는 그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정돈했다.

‘귀여워……. 지금 다시 깨워서 한 번만 더 하자고 하면 역시 안 되겠지.’

마른침을 삼킨 아릴은 꾸물꾸물 이딜로스의 품에서 벗어나 침대에서 일어났다.

뜬 눈으로 이딜로스의 품에 안겨 있자니 정말로 그를 깨우고 싶어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아릴이 주체할 수 없는 입꼬리를 올리며, 막 바닥에 발을 디디려던 때였다.

휘청, 다리에 힘이 풀려 그대로 엎어졌다.

반사적으로 앓는 소리를 내다가 이딜로스가 깰까 봐 입을 다물었다.

이미 넘어지면서 요란한 소리를 마구 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뒤돌아보니 이딜로스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하, 너…… 나랑 닿을 때마다, 네 기운이 나한테로 넘어오는 거 알아?>

문득 어젯밤 그가 했던 말이 떠오른 아릴은 그 후폭풍이 찾아와 이딜로스가 저렇게 잘 자는 건가 생각했다.

조심조심 몸을 일으킨 아릴은 조금 쑤시는 몸을 이끌고 객실을 나섰다. 잠이 도무지 안 올 것 같으니 잠시 산책이나 다녀올 요량이었다.

아릴은 배를 샅샅이 쏘다녔다. 지금은 불이 꺼진 낮에 갔던 레스토랑이나, 오락 거리가 모여 있는 곳이나, 바 같은 곳들을 둘러보다가 바다가 잘 보이는 맨 위층으로 향했다.

어스레한 빛이 지평선으로부터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아릴은 그 풍경을 홀린 듯 바라보며 난간에 다가갔다.

그리고 한참이나 새벽 공기를 마시며 바다를 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구두 소리를 듣고 뒤돌았다.

“어머, 이번에도 우연이네요.”

또 엘리네 헤르핀드였다.

아릴은 아까까지 가슴에 품고 있던 행복감의 절반이 싹 날아가 버리는 것을 느꼈다.

“……이 시간에 안 주무세요?”

‘내가 먼저 왔으니 방해하지 말고 가라’는 눈빛으로 말했으나 엘리네는 아무런 타격 없이 미소 지었다.

“잠이 안 와서요.”

엘리네는 아릴에게 다가갔다. 아릴은 그런 엘리네를 보다가 옆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피했다. 그랬더니 엘리네가 쫓아온다.

‘뭐야, 왜 이래? 우리가 무슨 친한 사이도 아니고. 설마 같이 있자는 건 아니겠지?’

엘리네를 떨쳐 내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왠지 계속 쫓아올 것 같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아 아릴이 한숨과 함께 멈춰 섰다.

아릴은 엘리네를 훑어보다 말했다.

“……안색이 더 나빠지셨네요?”

“로제트 영애는 눈치가 굉장히 빠르시네요. 요 근래 제가 고민이 조금 많았거든요.”

“무슨 고민을 하길래 안색이 그렇게…….”

“궁금하신가요?”

엘리네가 불쑥 가까이 다가왔다. 아릴은 질겁해 난간이 등에 닿도록 물러났다.

부담스럽게 왜 이러는 거지?

“별로 안 궁…….”

“당신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했어요.”

돌연 엘리네의 두 손이 아릴의 양어깨를 잡았다. 아릴은 반사적으로 코를 움찔했다.

“……정말 미안하지만, 당신은 사라져 줘야겠어요.”

엘리네가 아릴의 어깨를 힘차게 밀었다. 겨우 허리까지 오던 난간에 걸쳐져 있던 아릴의 몸이 한순간에 뒤로 기울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서조차도, 아릴의 정신은 다른 곳에 사로잡혀 있었다.

엘리네의 손이 얼굴 옆을 스치자마자 풍기던…… 기묘한 냄새.

마치, 넬라가 이딜로스에게 내었던 그 알 수 없는 차와 비슷한 류의 냄새……!

짐작한 순간, 아릴의 눈이 급속도로 수축하며 입이 벌어졌다.

“아천타.”

“네? 방금, 뭐라고…….”

엘리네는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녀는 서서히 바다로 추락하는 여자를 바라봤다.

바다보다도 맑은 푸른빛의 눈동자가 보였다. 엘리네는 뜬금없게도 생각했다.

공작이 데리고 다니던 그 고양이와 여자의 눈 색이 아주 닮았다고.

“아릴!”

그때, 뒤에서 절규 같은 부름과 함께 카델라로트 공작이 달려왔다. 그는 엘리네를 지나쳐 망설임도 없이 바다로 뛰어들었다.

아펠리아의 이름이 아닌, 다른 것의 이름을 부르며.

그 순간 엘리네는 희망을 봤다.

황성을 집어삼킨 아천타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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