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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23화 (113/191)

123화

“와아, 도착했다!”

“조심해, 넘어지겠어.”

마차 문을 벌컥 열고 뛰어내리려는 아릴을 그가 제지했다.

이딜로스는 말괄량이 같은 아릴의 손을 붙잡으며, 선착장으로 다가갔다. 부두에 멈춰 선 거대한 배가 그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호화 객선만큼이나 부티 나게 빼입은 선원은 이딜로스에게 인적 사항을 몇 가지 물어보곤 선사의 승객 리스트를 찾아 시선을 내렸다.

“환영합니다, 카델라로트 공작 전하. 편안한 여정이 되시길 바랍니다.”

카델라로트 공작의 이름으로 예약된 두 사람을 확인한 선원이 여객선으로 정중히 팔을 뻗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딜로스는 그에게 가벼운 눈인사를 남기곤, 눈을 반짝이며 두리번대는 아릴을 끌고 승선했다.

배에 오르자마자 객실로 향했다. 그런데 객실이 있는 층에 도착해 다시금 선객 리스트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정말 죄송합니다. 전하께서 예약하신 객실 중 하나가 이중 예약 처리가 되어 먼저 오신 승객께서 사용 중이신 것 같습니다.”

이딜로스는 허리를 숙이며 연신 사과하는 선객을 얼떨떨하게 바라보다 미간을 좁혔다.

“남는 객실은 더 없는가?”

“예……. 정말 죄송합니다.”

“침대가 두 개인 방과 바꾸는 건…… 아니다.”

선원의 눈빛이 연인과 함께 왔는데 왜 굳이 침대 두 개를 찾느냐고 말하는 듯해 이딜로스는 말을 어물쩍 끝내 버렸다.

더구나 아릴이 옆에서 잘됐다며 그의 팔을 잡고 방실방실 웃고 있었다. 안 그래도 호텔 같은 곳에 묵을 때면 방을 두 개씩 잡아 두는 걸 늘 싫어하던 아릴이었다.

이딜로스는 결국 그 방에서 묵기로 했다.

다행히 객실 자체가 스위트룸이기에 둘이서 지내도 좁지 않을 테고, 아릴을 피해 누울 수 있는 소파도 있을 것이다.

“여기, 호실 안내표와 열쇠입니다.”

이딜로스는 선객이 주는 것을 받고 아릴과 함께 객실로 향했다.

“우와, 호텔 같아!”

들어가자마자 짐부터 내려놓은 그와 달리, 처음부터 손이 가벼웠던 아릴은 아기 고양이 때처럼 탐색이라도 하듯이 객실 안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침대로 풀썩 누웠다.

이딜로스는 푹신한 침대로 뛰어들어 뒹구는 아릴을 막막하게 바라봤다.

항해하는 동안 같은 객실을 써야 한다니…….

아릴이 애정 표현하는 걸 좋아해서 시도 때도 없이 껴안고 입을 맞춘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정말이지 눈앞이 캄캄해지는 기분이었다.

자신이 순수한 아릴에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딜로스는 비장한 마음을 먹고서 그녀를 불렀다.

“아릴, 바다 보러 가자.”

“응!”

바다라는 말에 아릴은 벌떡 일어나 그의 앞으로 총총 달려왔다.

그는 자신을 바라보는 초롱초롱한 한 쌍의 눈을 마주 보곤 웃음을 흘리며 밖으로 향했다.

바다가 잘 보이는 층으로 향하자마자 아릴은 감탄을 터트렸다. 나오기 전 그가 씌워 준 챙 모자도 벗어 버리곤 난간으로 달려가 몸을 쭉 뺐다.

“아릴, 위험해.”

“이딜로스, 저기 봐. 저기!”

이딜로스는 아릴의 허리를 끌어안아 그녀를 말렸다. 그러면서도 아릴이 보라는 대로 그녀가 쭉 뻗은 손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굽이치는 바다 위로 뭔가가 첨벙첨벙 배 옆을 지나갔다.

“돌고래 맞지? 응?”

“응.”

“귀여워! 만져 보고 싶다.”

아릴의 홀린 듯한 중얼거림에 이딜로스는 아차 싶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배를 통째로 빌릴 것을. 그러면 잠시 멈춰 세워 아릴이 원하는 대로 돌고래를 구경시켜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리고…….

“이딜로스?”

아릴이 바람에 깃털처럼 흩날리는 머리칼을 귀 뒤로 넘기며 돌아봤다. 이딜로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경계하듯 훑어보고 있었다.

그가 아릴이 벗어 둔 챙 모자를 다시금 씌워 단단히 묶어 줬다.

“모자 벗지 마.”

“왜? 답답해.”

아릴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아릴이 묶어 둔 끈에 손을 가져다 대려 하자 이딜로스가 그녀의 손을 붙잡으며 나무랐다.

“다들 널 쳐다보잖아.”

“날 왜?”

아릴이 던진 의문에 이딜로스는 조금 황당해졌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머리 색도 푹신한 눈처럼 사랑스러운 흰색이고, 눈도 저 바다보다 맑은 하늘빛인데 눈에 띄지 않을 리가 없지 않나.

이딜로스는 잠시 말없이 그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한참 만에 대답했다.

“예뻐서 그런가 보지. 난 누가 널 보는 거 싫어.”

그러곤 아릴의 턱 아래에 있는 모자 끈을 더욱 꽉 매듭지어 버렸다. 그러다 아릴이 ‘아야’하고 작게 소리를 내자 멈칫하곤 다시 살짝 풀어 줬다.

이러나 저러나 아릴은 모자를 쓰게 된 게 탐탁지 않아서 뾰로통하게 그를 바라봤다.

볼을 살짝 부풀리고 입을 앙다문 게 외양에 맞지 않게 아이다운 모습이었다. 그런데 그게 또 못 견디게 사랑스러웠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선 입을 맞출 수도 없어서, 이딜로스는 억누르는 마음으로 고개만 옆으로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의 뺨이 덥석 붙잡혀 다시금 아릴에게로 돌아갔다. 얼떨떨하게 시선을 내려 보니 아릴이 성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공평해. 이딜로스도 모자 써.”

“뭐? 나는 왜.”

“나도 다른 인간들이 이딜로스 보는 거 싫어. 넌 내 거야. 나만 마음껏 볼 수 있어.”

새삼스러운 아릴의 말에 이딜로스는 잠시 멍해졌다.

‘넌 내 거야, 나만 마음껏 볼 수 있어…….’

그녀의 말을 재차 곱씹어 보던 이딜로스의 입꼬리가 급속도로 올라갔다.

이딜로스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주변에 사람들이 있든, 쳐다보든 무슨 상관인가.

아릴의 입에 촉, 하고 빠르게 입을 맞췄다 뗀 그가 녹을 듯한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렇게 예뻐서 어쩌지.’

누군가 채 가진 않을까 싶은 유치한 마음이 들어 이딜로스는 소유를 주장하듯 아릴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물론 그 소유는, 제가 아릴의 것이라는 소유 주장이었다.

아릴은 홀린 눈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나 방금 엄청 설렌 것 같아.”

이딜로스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려고 했을 때였다.

“어머, 카델라로트 공 아니신가요?”

갑작스러운 불청객에 이딜로스가 멈칫했다. 순간 그의 낯이 짜증스레 굳었다.

‘이 목소리는…….’

먼저 알아들은 아릴이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했다. 아릴의 눈빛이 싸하게 굳었다.

햇살 아래이기 때문일까, 유난히 붉게 보이는 적갈색 머리칼과 총명한 녹안을 가진 여자였다.

이딜로스는 세상 귀찮음과 짜증이 묻어난 표정을 잠시 짓다가 낯을 갈무리하곤 자세를 바로 해 그녀를 바라봤다.

“헤르핀드 공녀. 이곳에서 만나다니, 우연이군요.”

“네. 휴양차 왔는데 이곳에서 공과 공의 약혼녀분을 마주칠 줄은 몰랐네요.”

엘리네 헤르핀드의 시선이 이딜로스에게서 천천히 내려와 아릴에게 향했다.

엘리네는 아무 말 없이 잠시간 아릴을 바라봤다. 아릴은 왠지 모를 위화감을 느꼈다.

아무런 대화도 없이 주고받던 불편한 시선이 끊긴 것은, 이딜로스가 아릴을 제 뒤로 살짝 당기면서였다.

아릴을 숨기며 이딜로스는 태연히 말을 꺼냈다.

“어쩐 일로 겨울 연회에서는 영애가 보이지 않더군요.”

“아…… 그날은 사정이 있어 참석하지 못했답니다. 혹시 공께서 저를 찾으셨나요?”

“아닙니다.”

“조금도요?”

“예.”

“그러시군요.”

엘리네는 내색 없이 미소 지으며 다시금 이딜로스의 뒤편에서 빼꼼 고개를 내밀고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는 아릴을 바라봤다.

숨겨지고 있는 건 아릴인데, 자신을 숨기고 있는 이딜로스를 지키려고 위협적으로 쳐다보고 있는 것 또한 아릴이었다.

대체 누가 누굴 숨기고 있는 건지 모를 광경이 아닌가.

엘리네는 눈을 게슴츠레 좁히다 물었다.

“데비드 님의 여식이라고 하셨지요? 그러니까…… 아펠리아 로제트 영애라고요.”

“네.”

왜 저런 걸 묻는 거지? 아릴은 미심쩍은 마음으로 대답했다.

엘리네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낯으로 아릴을 빤히 바라봤다.

지난번 연회에서의 황후처럼 곧 안 좋은 말이라도 할 것 같았다.

이를 눈치챈 이딜로스는 미리 사달을 막을 작정으로 입을 열었다.

“공녀, 인사도 끝났으니 그만…….”

“저기요.”

그런데 이딜로스가 엘리네를 돌려보내려던 차에, 아릴이 엘리네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그것도, 이상한 호칭으로.

엘리네의 눈이 찰나 가늘어졌다. 그녀의 표정을 확인한 아릴은 이게 아닌가 싶어 다시 호칭을 정정했다.

“공녀님.”

“네, 로제트 영애. 말씀하세요.”

아릴을 의심스레 쳐다보던 그녀였으나, 곧 엘리네는 친절함을 만면에 띠웠다.

조금 의외였다. 품위가 없다며 지적할 줄 알았는데.

아릴은 한 차례 엘리네를 훑듯이 보곤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혹시 어디 안 좋아요?”

“……네?”

“안색이 조금 안 좋아 보여서요.”

엘리네는 아릴에게서 그러한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는 듯 눈을 둥글게 떴다.

아릴도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걱정스레 건네는 말이지 않은가. 엘리네 헤르핀드는 엄연히, 제 것인 이딜로스를 탐내는 못된 인간인데.

그러나, 아무리 모른 체하려고 해도 엘리네의 안색은 파리할 정도로 안 좋았다. 처음부터.

아니, 말이 안 좋다지, 실은 심각할 정도로 나빴다.

“제 안색이…… 안 좋다고요?”

이딜로스의 무시에도 낯빛 한번 바뀌지 않던 엘리네가 당혹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아릴은 제가 못 할 말은 한 건가, 숙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결례인가 싶어 이딜로스의 뒤로 다시 숨었다.

딱히 비꼬려고 한 말도 아니었고, 진심으로 걱정스러운 마음에 한 말이었기 때문에 엘리네가 저 말 때문에 화를 낸다면 조금 억울한 마음도 들 것 같았다.

이딜로스는 제 뒤로 숨은 아릴을 살피다가 말했다.

“미안하지만 이만 가 보겠습니다. 좋은 시간 보내다 가십시오.”

“아……. 자, 잠깐……!”

엘리네가 급히 손을 뻗었다. 그러나 이딜로스는 부러 못 들은 척 아릴을 이끌고 자리를 옮겼다. 아릴만 힐끔 그녀를 돌아볼 뿐이었다.

그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엘리네는 그들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다가 가볍게 쥔 주먹을 가슴 위로 가져갔다.

“어떻게…… 내 상태를 알아본 걸까.”

엘리네는 아릴의 눈동자만큼이나 푸른 바다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곤 수상한 점투성이고, 머지않아 자신이 처리해야 할…… ‘아펠리아 로제트’에 대해 천천히 생각했다.

* * *

아릴은 처음으로 낯선 인간들이 가득한 레스토랑에서 이딜로스와 저녁 식사를 했다.

이상하게도 긴장이 돼 주변을 계속 의식했지만, 식사는 아주 훌륭했다.

이딜로스는 간간이 아릴에게 먹어 보라며 포크로 이것저것을 집어서 건넸다. 아릴은 아기 새처럼 곧잘 받아먹고 배부르게 객실로 돌아왔다.

그런데 객실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분위기가 급격히 어색해졌다.

아릴은 답지 않게 가만히 서서 주저하고 있는 이딜로스를 의아하게 바라봤다.

그러나 곧 신경을 거두고 어둠이 깔린 창밖을 내다보는데, 이딜로스가 개미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먼저 씻어.”

“응, 알았어!”

아릴은 군말 없이 그의 말에 따랐다.

이딜로스는 욕실로 들어가는 아릴의 꽁무니를 보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의식하지 마. 평소처럼 대하자.’

그는 윙 체어에 앉아 한참이나 심각한 낯으로 스스로를 세뇌했다.

함께 잤던 게 한두 번도 아니고. 물론 그건 다 아릴이 몰래 제 침대에 숨어들면서 벌어진 일들이지만…….

적어도, 고양이일 때도 아릴은 아릴인 것이니 같이 잠들었던 날은 수없이 많았다.

그래, 잡아먹히거나 잡아먹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을까, 욕실 문이 달칵 열리는 소리에 이딜로스는 크게 흠칫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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