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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22화 (112/191)

122화

“나 준비 다 됐어!”

외출하자는 이딜로스의 말에 나는 바쁘게 옷을 챙겨 입고 그의 방문을 두드렸다.

자고 일어나자마자 이딜로스의 얼굴을 보고, 뽀뽀도 하고. 기분이 너무 좋아 날아갈 것만 같았다. 오늘은 좋은 일만 한가득 생길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이 늦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한번 노크하곤 문고리를 잡았다. 그때가 되어서야 방 너머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하지만 나는 이미 문고리를 돌린 후였다.

“미안, 이제 씻고 나와서…….”

옷을 갈아입으려는 듯, 여미고 있던 가운을 풀던 이딜로스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젖은 머리칼에서 물이 톡 떨어졌다.

“…….”

“응?”

잠시간 눈을 깜빡이며 그를 보다가, 지나치게 살색이 많다는 걸 인식한 나는 문을 쾅 닫았다.

왠지 봐선 안 될 걸 본 것 같았다.

그가 나를 부르러 오는 것을 기다리기로 하고, 나는 얌전히 방으로 돌아갔다.

소파에 털썩 앉아 멍하게 있었다. 아까 본 잔상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일전에 고양이일 때 갓 목욕하고 나온 그의 상반신을 본 적이 있긴 했지만, 그땐 가운을 여미고 있었는데…….

기억보다도 더 다부지고 탄탄한 체격, 잘 짜인 굴곡에 날렵하면서도 굵은 선.

머릿속으로 아까 본 그 모습을 덧그리자니 이상하게도 귓가가 달아오르고 안달이 나는 기분이 들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어 버렸다.

똑똑.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을까. 노크 소리에 화들짝 놀라 퍼뜩 고개를 들었다. 곧 바깥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아릴.”

“아, 응!”

서둘러 문을 열었다. 말끔히 옷을 차려입은 이딜로스가 보였다.

휴양지이기 때문인지, 이딜로스는 평소 강박적으로 입던 꽉 매인 차림새를 내다 버리고 포엣 셔츠 정도만 편안히 갖춰 입은 차림이었다.

나는 이딜로스에게서 풍겨 오는 부드러운 비누 향에 침을 삼켰다.

지레 찔린 나는 그로부터 시선을 피하며 기어가듯 말했다.

“아, 아까는 아무것도 못 봤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살색인 것밖에 못 봤어. 진짜야.”

“……다 봤다는 거잖아.”

그의 말에 뜨끔하며 슬쩍 고개를 들자 의외로 담담한 낯을 하고 있는 그가 보였다.

‘부끄러워할 일이 아닌 건가……?’

나는 이딜로스를 살피며 천천히 방에서 나왔다.

그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내가 곁에 서자 나란히 걸음을 옮기기만 했다.

그에게 발맞추던 나는 왜인지 어색한 분위기가 도는 듯해 불편했다.

하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이고, 나만 의식하고 있다는 것처럼…… 옆을 보니 이딜로스는 아주 태연했다.

그를 흘끔흘끔 보던 나는 참지 못하고 대화를 꺼냈다.

“우리 바다에서는 어제도 놀았잖아. 오늘은 어디로 가?”

“별장 옆의 숲으로 갈 거야. 안으로 들어가서 언덕을 넘으면 꽃이 만개한 들판이 나오거든.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여서 풍경이 아름다울 거야.”

“우와.”

“아름다운 곳이니 너랑 함께 보고 싶어.”

걸음을 내디디며,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엷은 미소를 지었다.

“너와 보면 더욱 아름다울 것 같거든.”

눈가를 휘며 내뱉는 말에 심장이 펑 터져 버렸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이 나만의 착각이 아닌지, 이딜로스가 짓궂게 웃음을 흘렸다.

“이런 말을 좋아했어?”

“네가 막 그렇게 웃으면서 말하니까 그런 거야!”

“이렇게 웃는 게, 왜?”

그가 보란 듯 눈을 접어 웃었다. 나는 잠시 넋이 나갔다가 곧 정신을 차렸다.

나를 놀려 댄 그를 째려봤다.

“그렇게 웃지 마.”

“싫은데.”

“잡아먹어 버릴 거야.”

내 협박에 이딜로스가 피식 웃었다. 그 뒤로 그에게서 아무 말도 없자 나는 내 위협이 완전히 무시당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자존심이 상해서 저 얄밉도록 잘생긴 얼굴을 노려보곤 흥, 고개를 돌렸다.

별장을 나와 어느 정도 밖을 거닐자, 그가 말한 언덕으로 이어지는 숲이 나왔다. 비가 쏟아졌던 날, 이딜로스와 함께 왔었던 그 작은 숲이었다.

그땐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비가 내렸기에 제대로 보지 못했던 작고 울창한 숲을 지금에서야 둘러봤다.

이 일대는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는 건가…….

담뿍 쏟아진 햇살 아래로 번진 싱그러운 녹음이 입을 살짝 벌어지게 했다.

이딜로스는 숲을 보느라 여념이 없는 내 손을 붙잡고는 길을 잃기라도 하겠다며 앞장서 이끌었다.

작은 언덕을 이룬 숲을 헤쳐 나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수풀이 끊기는 경계가 있었다.

이딜로스는 내 손을 꽉 붙잡고 있으면서도 내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이 필요한지, 나를 돌아보며 그 경계를 지나갔다.

나는 그를 따라 우거진 수풀이 끊기는 경계를 건너갔다. 둘러싸였던 시야가 몇 걸음 만에 시원하게 트였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막힘없이 드러난 들판 너머, 하늘과 맞닿은 바다의 아득한 지평선이 보였다. 윤슬을 품어 푸르게 반짝이는 바다가 광활하게 펼쳐지고 있었다.

처음 보는 풍경에 멍하니 멈춰 서자 이딜로스는 내 손을 잡고 나를 천천히 들판 중앙으로 이끌었다.

저 너머에서부터 꽃 내음을 품은 산들바람이 밀려와 풀잎들을 뒤흔들고 머리칼을 나부끼게 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코끝에 싱그러운 향이 누볐다.

이딜로스와 함께 걸음을 멈춘 나는 홀린 것처럼 주변을 둘러봤다. 입 끝에는 절로 피어난 미소가 어렴풋이 걸렸다.

“예쁘다…….”

“마음에 들어?”

“응, 저기 좀 봐! 하늘이랑 바다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서 신비로워. 저 너머에 아무것도 없을 것 같아.”

나는 바다의 탁 트인 전경에 정신이 팔렸다. 그 어떤 장애물도 없이 물과 하늘만 가득한 세상을 보다가, 문득 시야로 엄지만 한 무언가가 지나가는 것을 발견했다.

“이딜로스, 저기 배가 있어!”

“그렇네.”

“우리도 저거 타? 응?”

들뜬 마음에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이딜로스가 소리 없이 웃음을 띠더니 사랑스럽단 눈길로 내 머리에 입을 맞추었다.

“응. 탈 거야.”

나는 두근거림에 가슴 졸였다. 배는 책에서나 그림으로 보던 것인데.

다시금 바다로 시선을 옮겨 사라지는 배의 꽁무니를 좇고 있을 때였다.

“그거 알아?”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를 빤히 보고 있던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지평선을 문 해수의 표면처럼 한없이 잔잔한 눈이 나를 잠자코 내려다보더니 말했다.

“지금 여기서 네가 가장 예뻐.”

그가 어렴풋한 미소를 지었다.

“가장 빛나는 것도 너고.”

내리쬐는 화창한 햇살 아래에서 이딜로스를 올려다봤다. 산들바람이 불어오자 머리칼이 보드랍게 나풀거렸다.

“가장 사랑스러운 것도, 가장 아름다운 것도.”

이딜로스의 상냥한 손길이 바람에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었다.

다정히 머리칼을 넘겨 주던 손은 뺨으로 넘어왔고, 간지럽히듯 문지르다가 다시 조금 내려와 턱을 가볍게 쥐었다.

“내겐 모든 게 너야.”

이딜로스의 눈빛이 진중하게 빛났다. 그의 반대편 팔이 내 허리를 조심스레, 그러나 놓치지 않을 듯이 꽉 감쌌다.

끝없는 바다와 창창한 햇빛을 등지고 선 그가 나직이 말했다.

“이곳에서 맹세할게. 한평생 너만을 사랑하고, 네 곁을 지키기로.”

그의 말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이딜로스가 조금 망설임 어린 미소를 머금더니 뒤이어 말했다.

“그러니 너도 계속 나와 함께해 줘.”

그의 눈빛이 살짝 떨렸다. 묘한 불안감을 머금고 있었다. 나는 그게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기에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응. 그럴게. 나도 맹세해.”

이딜로스가 안도하듯 웃었다.

그는 나를 놓아주곤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굽혔다.

“……이딜로스?”

“언젠가 너한테 말하고 싶었어.”

그가 내 손을 잡아가 정중히 입을 맞추었다.

“네가 나와 같은 마음일 줄은 몰라서…… 새로 준비는 못 했지만.”

이딜로스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팔각으로 된 조그만 상자였다.

이딜로스가 그걸 열었다. 의아하게 그를 보던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그건 내가 이딜로스의 약혼녀 행세를 할 때 끼곤 했던 반지였다. 세공된 다이아가 박힌 은반지를 바라보다 시선을 들자 이딜로스가 말했다.

“나와 정식으로 약혼해 줘.”

바람이 나부꼈다. 머리칼이 살랑살랑 날렸고, 가슴이 벅차 뛰었다. 나는 기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이딜로스는 울 것처럼 웃으며 내 왼손에 반지를 끼워 줬다. 그의 눈썹이 완전히 웃는다기엔 묘한 각도를 이루고 있었지만, 확실한 건 그가 기쁨에 겨워 보인다는 거였다.

일어선 그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사랑해.”

“응, 내가 더 사랑해.”

당당한 대답에 이딜로스가 픽 웃었다. 나는 배시시, 그의 뺨에 내 볼을 맞대곤 비비적대다가 말했다.

“그런데 이딜로스는 이걸 용케 별장까지 가지고 왔었네.”

“반지?”

“응.”

“난 늘 품에 지니고 다녔어.”

“뭐? 정말?”

“네 손에 맞는 반지니까.”

나는 그의 품에 고개를 기댄 채 왼손에 자리하게 된 반지를 만지작대며 웃었다.

만약 이때 조금만 더 미래에 대해 생각했더라면, 그에게 거짓말을 하게 되는 일도 없었을 텐데.

* * *

드세게 날갯짓을 하는 화려한 매의 인장이 박힌 마차가 쉼 없이 움직였다.

수도에서부터 출발해 넓은 바다가 펼쳐진 남부의 라젠트까지 이동하기까지는 긴 시간이 걸렸다.

긴 여정은 지치기 마련이고, 지리멸렬하게 굴러가던 마차가 멈추면 반가운 마음이 드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마차에 타고 있던 이는 창밖의 풍경이 멈추자 괴로운 듯 눈을 질끈 감았다.

마차의 문이 고장 나 열리지 않았으면.

갑작스레 비바람이 몰아쳐 모든 계획이 흐지부지되었으면.

“헤르핀드 공녀님.”

하지만 마차의 문은 마부의 손에 너무나 쉽게 열렸고, 그 너머에 보이는 하늘 또한 비구름 한 점 없이 창창했다.

바다의 짠 내음이 밀려왔다. 하늘을 가르는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울었다.

엘리네는 마차에서 내려 일대를 둘러봤다.

이곳 어딘가에 있을 테지. 설령 지금 이곳에 없다 하더라도 곧 같은 여객선에 타게 될 것이다.

엘리네는 황후가 알려 준 대로, 자신이 몸을 실을 거대한 호화 여객선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눈에 이제 그만 모든 걸 끝내고픈 지긋지긋함이 서려 있었다.

“이딜로스! 저기 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마차 창에 바짝 붙은 아릴이 창밖에서 한시도 시선을 떼지 못하고 이딜로스를 불렀다.

이딜로스는 조잘거리는 아릴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기꺼이 그녀의 말대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한눈에 봐도 무척 거대하고, 호화롭기까지 한 여객선이 바다 위에 굳건히 떠 있었다.

아릴은 저렇게 큰 게 어떻게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냐며, 제 몸도 바다에서 꼬르륵 가라앉는데 혹시 저 배가 자기보다 가벼운 거냐며 마구 의문을 쏟아 냈다.

이딜로스는 아릴의 순진한 의문을 마냥 듣고 있다가 끝내는 참지 못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신전의 신성력이 배를 띄우고 움직이는 동력이야.”

“그거 나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도 배를 띄울 수 있을까?”

“글쎄, 안 될 것 같은데. 네 몸 하나 물에 띄우지 못해서 내가 널 잡아 줘야 하잖아.”

처음 바다에 갔을 때, 무작정 물에 뛰어든 아릴은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다.

그날부로 이딜로스는 물에 들어갈 때면 꼭 아릴의 두 손을 잡고 물장구를 도왔다.

지난 일들을 상기한 이딜로스가 피식거렸다.

반면 아릴은 자존심 상한 눈빛으로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그는 이 고양이가 또 무시당했다 여겨 자존심에 금이 간 걸 알았다. 이젠 아릴의 낯만 봐도 그녀의 감정을 낱낱이 알아차릴 수준이었다.

이딜로스는 턱을 괴고 아릴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느덧 아릴은 다시금 창밖에 관심이 빼앗겨 있었다.

‘아릴이 지나치게 순수한 것 또한, 지혜를 겸비할 수인의 기억이 온전치 않기 때문이겠지.’

자연히 생각이 ‘수인’인 아릴에 관한 것으로 흘러가자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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