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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의 반려수인이 되었습니다-120화 (110/191)

120화

아릴은 눈썹을 파르르 떨며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자극은 강했고 마찰이 일어나는 살결은 여렸다.

불에 덴 것 같은 감촉이 심장에도 불을 지핀 것처럼 쿵쾅대는 소리가 쏟아지는 빗물보다 거셌다.

정신이 혼미해지려는 차에 그가 맞닿은 입술을 느리게 문지르며 맞물고 있던 것을 놓아주었다. 촉,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가빠진 숨에 가슴이 오르내렸다. 아릴이 살며시 눈을 떴다.

긴 속눈썹이 걷히고 드러난 푸른 눈이 밤하늘에 깔린 별빛만큼이나 짙게 빛나는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습한 열기에 휩싸여 달뜬 이딜로스의 눈빛이 찰나 간 가라앉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아릴…….”

“응?”

이딜로스는 살짝 일그러트린 눈으로 아릴의 뺨을 엄지로 문질렀다. 그의 속이 꽉 막힌 것처럼 답답했다.

무지막지하게 뛰고 있는 심장이 그 크기를 배로 부풀려 마음을 숨 막히도록 채우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답답함을 해소하면,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도무지 그 혼자서는 이 참을 수 없게 거대한 마음을, 속이 아리도록 간지럽게 후비는 이 감정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딜로스는 숨을 얕게 내뱉고서 말을 이었다.

“네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좋다고 하면.”

“…….”

“난 미친놈인가?”

아릴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쿵쿵. 꼭 세상이 허물어지면서 나는 소리처럼 아득했다.

지척에서 올려다본 그의 눈은 제 말에 확신을 가하는 것처럼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좋아해.”

“…….”

“하루에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딜로스가 아릴의 손을 찾아 깍지를 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그의 입술이 벌어지며 그토록 고대하던 말이 발음되어 흘러나왔을 때.

“사랑해, 많이.”

사방에서 폭포처럼 쏟아지던 빗줄기의 소리가 돌연 뚝 멎었다.

아릴은 숨을 멈췄다. 눈가가 일그러질 듯 말 듯, 입가가 웃을 듯 말 듯,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를 바라봤다.

그러자 이딜로스가 픽, 하고 슬프게 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릴이 마침내 미소를 피워 내며 뱉은 말에, 이딜로스는 눈을 크게 떴다.

“나도.”

귀를 의심하던 이딜로스가 되물었다.

“날 좋아해?”

“응, 좋아해.”

“……얼마나?”

“많이.”

언젠가 아릴과 나누었던 대화였다.

이딜로스는 곧 있을 절망을 예상하면서도 머뭇거림 끝에 물었다.

“……마멜라보다도 더?”

“아니.”

망설임 없는 명쾌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딜로스는 멈칫하다가 허탈감에 웃음을 흘렸다.

그래, 역시 이건 혼자서 간직해야 했던 마음이었던 거다.

이딜로스가 아릴의 뺨에서 손을 내리려던 때였다.

아직 끝나지 않았던 건지, 이어진 그녀의 말이 이딜로스의 모든 움직임을 멈춰 세웠다. 심지어는 숨 쉬는 것조차도.

“마멜라에게 느끼는 것과는 달라.”

“…….”

“난 널 사랑해.”

그 순간 멈춘 것 같던 빗소리가 다시금 쏟아졌다. 이딜로스의 눈이 커졌다.

지금 저 사랑스러운 입술에서 흘러나온 말이 무엇인지, 분명히 들었음에도 곧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의 흐릿하게 굳은 표정을 보고 눈치채기라도 했다는 듯, 아릴은 이딜로스를 끌어당기며 재차 속삭였다.

“나도 사랑해, 많이.”

“…….”

“참을 수 없을 만큼. 다른 어떤 것보다도…… 사랑해.”

한때 품었던 바람대로 그에게 좋아한단 말보다 더 큰 말을 원 없이 쏟아 낸 아릴이 코앞까지 끌려온 이딜로스의 입술을 물었다.

말랑한 온기가 와 닿자, 이딜로스의 눈가가 흐려졌다.

먹먹하게 차올라 있던 것이 아릴의 말과 행동 한 번에 뜨겁게 녹아 속으로 흘러 내려갔다.

그 벅참이 주는 안도감에, 굳어 있던 이딜로스가 천천히 손을 움직여 아릴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아랫입술을 조심히 머금다가 놓았다. 조금 전까지 달콤한 말을 흘려보낸 입술이기 때문인지 마찰을 빚을 때마다 녹을 듯한 황홀감이 파도처럼 그를 덮쳐 왔다.

아릴이 팔에 힘을 주며 그의 침범을 허락하듯 좀 더 끌어당겼다.

“사랑해. 하루도 변치 않고.”

맞닿은 젖은 입술로부터 그의 속삭임이 넘어왔다.

기쁘게 내뱉으려던 아릴의 대답은 다시금 겹쳐진 입술 새로 삼켜지며, 두 사람은 오래도록 습한 온기 속에서 애정 어린 입맞춤을 나눴다.

* * *

“에취!”

“……괜찮아?”

“으응. 괜…… 에취!”

빗물에 쫄딱 젖은 채로 차가운 난간에 걸터앉아 오래 머물러서 그런가, 다음 날이 되자 콧물이 마구 흐르더니 재채기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이 상태로 바다에 들어가겠다는 건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이딜로스가 못마땅한 눈초리로 나를 타박했다.

처음엔 감기 기운을 숨기고 이딜로스를 끌고 바닷물에 빠져들려고 했었다.

그런데 막 옷도 차려입고 이딜로스와 함께 바닷물에 발을 적시려는 순간, 애석하게도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그 탓에 이딜로스에게 들쳐 업혀 곧바로 별장의 방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이불을 두른 채 침대에 앉아 있던 나는 창밖 너머 보이는 푸르른 바다의 전경을 흘끔대곤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그래도…….”

“안 돼.”

“…….”

“예쁜 표정 지어도 못 들어줘. 시간도 많은데 다 나으면 물놀이하러 가도록 해.”

단호한 이딜로스의 말에 나는 아랫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자 이딜로스가 내 입술을 손으로 꾹 눌러 집어넣어 버렸다.

“예쁜 표정 짓지 말랬지.”

“이게 왜…….”

“자, 딸기 맛이야.”

내 말을 멋대로 끊고는 이딜로스가 딸기시럽 같은 약을 숟가락 가득 떠서 건네었다.

내가 뚱한 낯으로 입을 벌리지 않자 이딜로스는 아까 내 입술을 밀어 넣은 손으로 친절하게 입을 벌리게까지 해 줬다.

결국 억지로 약을 받아먹게 된 나는 오만상을 썼다. 숟가락을 빼 가던 이딜로스가 내 못난 표정을 보곤 피식 웃었다.

“맛없어?”

“딸기 맛이 아니잖아…….”

“맞는데.”

“그냥 약 맛이야. 인위적이고 속 안 좋아지는 맛이란 말이야. 네가 내 입을 버리게 했어.”

“그래?”

뾰로통하게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쪽,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입술에 말랑한 온기가 닿았다가 사라졌다.

기습 뽀뽀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이딜로스가 즐겁다는 듯 눈매를 휘며 물었다.

“아직도?”

“가, 감기 옮으면 어떡하려고 그래!”

“애초에 내 감기 아니던가. 멋대로 가져가 버린 게 누군데.”

이딜로스의 예리한 말에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제 그 빗속에서 이딜로스가 감기에 걸릴까 봐 기운을 살금살금 밀어 넣었던 걸 그가 눈치채고 있었던 걸까.

나는 할 말이 없어져 입을 다물었다가 한참 만에 소심하게 칭얼거렸다.

“입술이 아니라 입 안에 약 맛이 남아 있는 건데…….”

그러곤 은근히 기대하는 눈길로 그를 올려다보자 이딜로스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검지로 내 이마를 꾹 밀어 버렸다.

침대 헤드까지 밀려난 나는 삐죽대며 이딜로스를 째려봤다.

나를 바라보던 그의 입가에 느슨한 웃음이 걸렸다.

“바라는 것도 많지.”

그가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있던 내게로 몸을 숙였다.

“앞으로 그 표정 금지야.”

차마 입을 열기도 전에 온기가 맞물렸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고개를 젖혀 침대 헤드에 머리를 완전히 기대자 이딜로스의 고개가 내게로 완전히 기울어졌다.

무심결에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지척에서 나를 보고 있던 잔잔한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손이 내 뺨을 감싸는가 싶더니, 겹쳐진 입술이 살짝 떨어졌다. 코끝을 맞부딪친 그가 조용히 속삭였다.

“입 벌려.”

그의 말대로 입술을 살짝 벌리자 곧바로 열기가 밀려 들어왔다. 더없이 안온한 행복을 가져다주는 떨림이 이어졌다.

* * *

짜악!

겁에 질린 숨소리와 함께, 산발이 된 여자의 고개가 홱 꺾여 돌아갔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다시 한번 말해 보거라.”

“제가 실언했습니다, 그러니……!”

“다시 말해 보라 했다. 그 간악한 입이 감히 무엇을 읊조렸는지 다시 말해 보란 말이다!”

황후의 손이 꿇어앉아 있는 여자의 적갈색 머리칼을 잡아채 들어 올렸다. 겁에 질린 수풀색 눈동자가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황후, 베르제나의 뒤로 선 수많은 황궁 시종들이 마치 꼭두각시처럼 빛을 잃은 눈으로 처참한 몰골의 여자를 바라봤다.

오싹함에 소름이 돋았다가, 여자는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했다.

“고, 고모님……. 제발, 이러지 마세요…….”

“누누이 입조심하라 했거늘. 또다시 내가 네 입에서 죽은 내 딸아이의 이름을 들어야 하느냐? 재수 없는 것. 차라리 네 입을 찢어 꿰매 버려야겠구나.”

제국에서 가장 기품 있고 우아할 것이 분명한 황후의 눈빛은 사탄의 것처럼 흉악하고도 음험했다.

여자는 그저 겁에 질린 얼굴로 섬찟해진 입을 사리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녀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던가.

그저, 카델라로트 공녀를 쉴 틈 없이 입에 올리며 제 딸아이가 마치 처음부터 공녀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 심지어는 죽은 황녀와의 추억까지도 카델라로트 공녀를 이입해 왜곡시키고 있는 황후에게 그러지 말라고 몇 마디 거들었을 뿐이었다.

그 입바른 소리의 결과물이 이렇게 진창으로 엉망이 되어 공포와 두려움에 떠는 것인가?

어린 황녀를 불의의 사고로 잃은 황후의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것은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 속 고아하고 인자한 황후는 아무리 숨이 끊기는 비애에 놓였다 하더라도, 결코 이리 광증으로 망가질 사람이 아니었다.

“명석한 것이 쓸모 있을 줄 알았더니.”

“……으윽.”

“카델라로트 공작 하나 꾀어내질 못해 일을 이렇게 만든단 말이야?”

쯧, 혀를 찬 베르제나가 적갈색의 머리채를 더럽다는 듯이 내팽개쳐 버렸다.

가까스로 그녀의 억센 손아귀를 벗어난 여자가 헐떡였다.

“엘리네.”

“네, 폐하…….”

“네가 일을 망쳤단 것을 나는 오늘도 용서할 수 없으니, 어김없이 지하실로 가야겠구나.”

녹음을 머금은 엘리네의 눈에 절망감이 세차게 몰아쳤다.

빛이 드는 작은 창살과 낡은 침구밖에 없는 작은 독방.

사람이 드나들 일이 없어 식사조차 제대로 나오질 않는 그 감옥 같은 곳이 머리를 스쳐 가자 엘리네는 다급히 베르제나의 드레스 자락을 쥐었다.

바닥에 바짝 조아려 올려다보자 마치 거대한 태산 같던 황후가 그녀를 선득하게 깔아 봤다.

그러나 입가엔 기묘한 웃음기가 걸쳐져 등골에 오한이 들었다.

“저런. 싫으냐?”

“폐하, 폐하……. 제가 잘못했어요. 제발, 고모님, 그러지 말고 아, 아버지를 뵙게 해 주세요. 돌아가 아버지에게 매질을 받고 근신 처분을 받을 테니 부디…….”

“네 아비는 어여쁜 제 딸이 누이의 품에서 귀한 보살핌을 받고 있을 거라 여기고 있단다.”

엘리네가 손을 떨며 그녀를 올려다보자 베르제나는 가엾다는 표정으로 쥘부채를 탁 접었다.

그러곤 특유의 뱀과 같은 미소를 지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넌 본래 참을성이 많은 아이가 아니더냐? 내 너의 그 모습과 명석함을 총애했던 거란다. 명석함마저 잃은 마당에 그 밖의 것까지 잃지는 않으리라 믿으마.”

“…….”

“조금만 참거라. 곧 나갈 일이 있을 테니.”

좌절감에 고개를 떨구었던 엘리네가 다시금 희망을 보고 고개를 들었다.

“폐하께 듣기론 첩자였던 것이 전하기를, 이딜로스와 그 계집이 라젠트로 떠난다고 하더구나. 아, 지금쯤이면 이미 떠났겠어.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갈 무렵엔 여객선을 타러 갈 것이라 했지.”

“…….”

“그때 널 바깥에 내보내 주마.”

엘리네의 숨이 덜컥 멎었다.

베르제나가 어떤 것을 지시하게 될지, 어떤 더러운 것을 제게 떠넘기려 하는 것인지…… 황후의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황후는 몸을 숙여 주저앉아 있던 엘리네의 귓가에 조용히 읊조렸다.

“그곳에서 그 계집을 없애고 오렴.”

“…….”

“넌 그것으로 네 쓸모를 보일 수 있는 거란다.”

타고나기를 명석했기에, 엘리네의 불길함은 이번에도 틀리는 일이 없었다.

그건 결국, 타고난 불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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