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아…….”
당황한 나머지 나도 모르게 흘린 소리에 이딜로스의 눈썹이 파문이 인 것처럼 얕게 떨렸다.
나를 단단히 붙잡은 그의 팔이나, 어쩌다 보니 걸터앉게 된 그의 무릎 위나. 그리고 그의 이마를 짚은 손과 입술이 닿을 듯한 위태로운 거리나…….
이딜로스와 접촉한 모든 것에 심장이 덴 것처럼 반응했다. 그가 내쉬는 황홀한 숨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의 눈을 마주 보다가 정신을 차린 나는 이마를 짚은 손을 내리고서, 그 손을 그의 귓가로 뻗었다.
“이딜로스. 너 지금 열나.”
“…….”
“아까보다 더 빨개졌어.”
원체 체온이 서늘하던 이딜로스였다. 그런데 나보다 뜨겁기도 하다니.
나는 미지근한 손등을 이딜로스의 귀에 가져다 대고 그의 귀를 식혀 주기 위해 노력했다.
이런다고 열이 내려갈지 모르겠지만……. 이럴 줄 알았으면 출발하기 전에 그의 상태를 살피는 건데.
지금이라도 기운을 넣어 그를 푹 재울까. 그런다면 좀 괜찮아질지도 모르겠는데.
“으음, 안 되겠다. 기다려 봐.”
“뭘…….”
고심한 끝에 이딜로스의 귀를 식혀 주기 위해 대고 있던 손을 뗐다.
그러곤 내려다본 이딜로스의 눈빛에 어서 나를 밀어내고 싶어 하는 기색이 보인 것 같았지만 나는 못 본 척했다.
이딜로스가 부끄럼타는 게 어디 한두 번이던가. 거기다 지금은 귀가 아주 시뻘게질 정도로 열이 나고 있는 상황인데.
이딜로스의 어깨를 손으로 짚은 나는 그에게로 몸을 숙였다.
“가만히 있어 봐.”
나는 그대로 이딜로스의 얼굴을 지나쳐 그의 귓가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러곤 그의 귓가를 식혀 주겠단 일념으로 후우 하고 바람을 불었다.
그 순간, 뻣뻣하게 굳어 있던 이딜로스가 기겁하며 소스라쳤다.
“아릴!”
갑작스러운 부름에 놀란 나는 몸을 살짝 떼고 이딜로스를 바라봤다. 고개를 갸웃했다.
“왜?”
“지금, 방금…… 뭐, 뭘 하려는 거야. 아니, 무슨 생각으로……!”
횡설수설 말하는 이딜로스의 눈이 혼란으로 빙빙 돌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이상 반응을 보이는 그를 희한하다는 듯 쳐다보다가 여상한 투로 말했다.
“식혀 주려고. 왜?”
“하…….”
이딜로스가 고통스레 눈가를 찡그리더니 뭔가를 인내하는 낯으로 내 어깨에 툭 이마를 기대었다.
‘몸이 많이 안 좋은 건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가까이 있던 이딜로스의 귀를 한 번 더 후 불었더니 이딜로스가 고개를 홱 들었다.
그의 원망이 깃든 눈을 보자마자, 이딜로스가 내 허리를 붙잡아 번쩍 들어 올리더니 옆자리에 내려놨다.
그러곤 마차 벽에 바짝 붙고는 나를 등지듯이 몸을 옆으로 트는 게 아닌가.
“……이딜로스, 왜 그래? 괜찮아?”
“나 좀 내버려 둬.”
“응? 나 봐 봐.”
“제발, 아릴.”
목소리에서 간절함까지 묻어나자 나는 꼬리를 내릴 수밖에 없었다.
열이 너무 많이 나서 소리가 울리는 걸 수도 있으니까…… 일단 최대한 그를 건들지 않기로 했다.
‘어서 별장에 도착해야 할 텐데.’
도착하면 이딜로스에게 찰싹 붙어 온종일 간호해 줘야겠다.
* * *
“와아! 이딜로스, 저기 바다가 보여!”
아릴은 반짝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바다를 한 번 바라봤다가, 이딜로스를 한 번 바라봤다가를 반복하며 설레발쳤다.
신난 그 모습에 이딜로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마차를 타고 오래 이동했으니, 우선 들어가서 쉬자.”
“지금 바로 바다에 들어가면 안 돼?”
“……헤엄은 칠 줄 알고?”
“응! 아마 알지 않을까?”
천진난만한 대답에 이딜로스는 한숨을 내쉬며 아릴의 손을 잡고 별장으로 질질 끌고 갔다.
멋대로 뒀다간 수영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아니 그 정도면 다행인가. 물에 뜰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바보 같은 고양이가 바다에 풍덩 입수할 기세였다.
“그럼 조금만 쉬다가 튜브 챙겨서 나가자.”
“튜브? 재밌겠다!”
아릴이 싱글벙글 소리쳤다.
막 별장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그랬다.
“…….”
시무룩하다 못해 울 거 같은 표정이 된 아릴이 커다란 창밖을 내다봤다.
쏴아아,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냥 비도 아니다. 닿았다간 몸이 묵직함에 기우뚱할 것 같은 기세의 사나운 장대비였다.
별장에 들어온 지 한 시간쯤 지났을 무렵에 갑작스레 하늘이 잿빛으로 물들더니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딜로스 미워.”
아릴이 창가에서 고개를 살짝 돌리며 내뱉는 말에 이딜로스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물론 미안하긴 했지만, 이게 뭐 자신이 알고 그런 것은 아니지 않나.
오히려 그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괜히 밖에 나가서 아릴이 물놀이를 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비가 쏟아져 그녀가 바닷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것보다는 나았다.
“시간은 많아. 내일 물놀이하러 가면 되지.”
“…….”
달래려고 한 말에 입술을 삐죽 내민 아릴이 그를 원망스레 쳐다봤다.
지금은 어떤 말을 해도 토라진 아릴을 쉽사리 달래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위로 대신 대화의 화제를 바꿔 보기로 했다.
“뭐 하고 놀까? 일단 차라도 마실래? 아니면 네가 좋아하던 퍼즐…….”
“나갈래.”
아릴이 퉁명스레 말했다.
이딜로스는 아릴의 심통 난 얼굴을 한 번, 창문을 매섭게 두들기고 있는 바깥 날씨를 한 번 바라봤다.
“나가겠다고? ……지금?”
“같이 나가자.”
심술을 부리려고 저런 말을 하는 걸까 싶었다.
그러나 창밖에서 시선을 떼고 다시금 바라본 아릴의 얼굴은, 정말로 기대하는 듯한 들뜬 기색이 감돌고 있었다. 그래서 더 황당했다.
“왜 굳이 저런 날씨에 나가려고 해. 우산을 써도 다 젖을 것 같은데.”
“재미있을 것 같아. 이딜로스는 비 맞아 본 적 있어?”
어느새 그의 앞까지 다가온 아릴이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릴의 눈에선 진심이 묻어나고 있었다.
이딜로스는 가까이 다가와 대답을 재촉하는 아릴을 얼떨떨하게 보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맞아 본 적…… 있지.”
“언제?”
“……부모님의 장례를 치를 때.”
아릴의 앞이기 때문일까, 기억만으로도 마음이 무거워지는 그 말이 아무런 불편함 없이 나왔다.
이딜로스에게 비는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못한 존재였다.
그저 우울한 마음을 대변해 주는, 그가 내비치지 못하는 슬픔을 하늘이 대신 흩뿌려 주는 딱 그 정도의 존재.
“아…….”
총명하게 반짝이던 푸른 눈이 한순간에 빛을 잃었다. 잔뜩 부풀어 있던 기대는 어디 가고, 미처 입 밖에 내지 못할 미안함과 자책이 스미는 것이 보였다.
이딜로스는 아릴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다가, 마침내 애써 괜찮은 척 미소를 띠는 것을 보았다.
“미안, 역시 이 날씨에 나가자는 건 내가 너무 고집부리는 건가 봐. 네 말대로 그냥 여기서…….”
“가자.”
“으응?”
“비 맞고 싶다며. 바다에 들어가지도 못했는데, 비라도 맞아야지.”
이딜로스는 눈을 휘둥그레 뜬 아릴을 잡아끌며 씩 웃었다.
여전히 비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뿐더러 기분을 음울하게 만들기까지 하는 불쾌한 것이었지만, 아릴과 함께 맞는다면 그 의미가 어쩐지 조금 다를 것 같았다.
설령 여전히 불쾌하기 짝이 없다 하더라도, 아릴이 기뻐한다면 그걸로 됐다.
아니, 아릴이 기뻐하는 모습을 눈앞에서 보게 될 텐데 불쾌해질 리가 없었다.
겉옷을 벗어 시종에게 넘기고서, 흰 셔츠 위 진녹색 조끼만 입은 차림으로 둘이서 써도 넉넉할 우산을 집어 들었다.
이딜로스는 근심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아릴에게 여트막한 미소를 짓고서 그녀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갈까.”
“……정말 괜찮아?”
“안 괜찮을 건 뭐가 있지? 너랑 같이 나가는데.”
그가 시종이 열어 주는 문으로 아릴의 손을 잡고 나갔다.
바깥 공기가 와 닿는 순간 바람이 돌풍처럼 몰아쳤다. 비 냄새와 뒤섞인 산뜻한 풀 내음, 저 멀리서 밀려오는 바다의 짭조름한 내음이 선선한 바람과 뒤섞여 코 안을 가득 누볐다.
함께 손을 잡고 문턱을 넘는 순간 우산이 팡, 하고 팽팽하게 펼쳐져 쏟아지는 빗방울들을 막았다.
이딜로스는 여전히 머뭇대는 아릴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기고서 흠뻑 젖은 땅을 밟았다.
그리고, 아릴이 괜한 마음에 사로잡혀 괜찮으니 돌아가자고 말하기 전에 그대로 그녀를 붙잡고 정문 밖까지 달려갔다.
“이, 이딜로스!”
“괜찮아.”
아릴이 놀라 그의 옷자락을 꽉 붙잡았다. 바닥에 고인 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첨벙, 하고 신발이 젖어 들었지만 걸음을 막지는 못했다.
물기를 머금은 시원한 바람이 발목을 스치자 이상하게도 상쾌해지는 기분이었다.
먹구름이 낀 하늘은 여전히 잿빛이고, 쏟아지는 비는 묵직해 분명 그의 음울함을 대변하던 것과 다를 바 하나 없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거침없이 빗속을 내달리니 마음이 뻥 뚫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렇게나 후련할 수가 없었다.
옆을 돌아보니 망설이던 아릴도 어느덧 그에게 기꺼이 맞춰 달리며 웃음을 차츰 피워 내고 있었다. 어두운 우산 속에서도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순수하게 기쁨을 담아냈다.
그러다 시선이 마주쳤을 때, 갑작스레 바람이 세게 불어닥쳤다.
그러잖아도 빗속을 가로지르느라 물기에 젖어 있던 이딜로스의 손에서 그만 우산이 미끄러져 바람을 타고 붕 날아갔다.
헉, 아릴이 당혹스러운 소리를 흘렸다.
머리 위를 가려 주던 우산의 부재로 순식간에 두 사람은 세찬 빗방울들에 폭삭 젖고 말았다.
너무나 갑자기 일어난 일이라 어안이 벙벙해 걸음도 멈춘 두 사람은 곧 눈이 마주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이딜로스, 너 지금 완전 흠뻑 젖었어!”
“너도 만만치 않거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따로 없어.”
이딜로스가 빗물에 축 처진 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귓가를 파고드는 빗소리에 서로의 목소리도 간신히 들리는 지금, 이딜로스는 물에 푹 젖은 채로도 신이 나는 건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맑게 웃는 아릴의 모습을 무심코 홀린 듯 바라봤다.
아릴이 두 손바닥을 모아 빗물을 받아 내다가 이딜로스를 돌아봤다.
“어쩌지 이제?”
“저쪽에 비를 피할 만한 곳이 있기는 한데. 조금 더 가야 해.”
“그럼 어서 가자!”
이번엔 아릴이 먼저 이딜로스의 손을 잡고 그를 끌어당겼다. 이딜로스는 풋 웃음을 터트리더니 아릴을 제지했다.
“그 방향 아니야. 저쪽이야.”
“저쪽으로 쭉 가면 되지?”
“응.”
“나 되게 빠르니까 잘 따라와야 해!”
이딜로스가 알려 준 방향으로 아릴이 그를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를 내달렸을까, 별장 옆의 작은 숲이 보이더니 이딜로스가 말한 곳임이 분명한 희고 자그만 가제보가 모습을 드러냈다.
서둘러 그곳으로 피신했지만, 이미 그들은 물속에 들어갔다 나온 거나 다름없는 몰골이었다.
이딜로스는 담뿍 젖은 아릴의 머리칼을 넘겨 주며 물었다.
“괜찮아?”
“응, 시원해서 좋아.”
경쾌한 대답에 이딜로스의 입가에서도 기분 좋은 웃음이 나왔다. 네가 좋다면 나도 좋은 거지.
아릴은 미소를 살며시 흘리다가 가까이 다가와 있는 이딜로스를 물끄러미 올려다봤다.
물이 뚝뚝 흐르는 아릴의 머리칼을 정리해 주던 이딜로스가 문득 그 시선을 느끼고 마주 내려다봤다.
그의 부드러운 금색 눈을 마주하자, 아릴은 몸을 살짝 떨었다.
그의 시선이 와 닿는 곳이나, 그의 손이 스치는 곳이 유독 뜨겁게 느껴진다면 그건 단지 빗물에 젖어 체온이 내려갔기 때문일까.
“이딜로스.”
“응.”
아니, 쏟아지는 빗소리를 뚫을 정도로 벅차게 쿵쿵대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단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젖은 옷자락을 두고 맞닿은 서로에게서 피어나는 온기에 심장 소리가 자꾸만 울렸다.
‘분명 이딜로스에게 들릴 텐데…….’
물기를 머금었기 때문인지 아릴을 바라보는 그의 금색 눈은 유독 짙고도 집요했다.
아릴이 눈을 깜빡이자 속눈썹 끝에 물방울이 툭 하고 떨어졌다. 이를 따라 시선을 내리던 이딜로스의 눈길이 물기를 머금은 젖은 입술에 닿았다.
아릴은 불에 덴 것처럼 움찔했다.
어지럽게 후각을 자극하는 그의 향기가 뭔가를 점차, 그러나 거칠게 머릿속에서 깨부수는 것 같았다.
무의식중에 이딜로스에게 한 발자국 다가간 아릴의 신발이 찰박, 바닥의 얕은 웅덩이를 밟았다.
그 소리가 시작을 알렸다.
참을 수 없는 충동과 함께, 아릴이 그의 옷깃을 끌어당겼다. 비슷한 찰나에 이딜로스도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렇게 누가 먼저 닿았는지도 알 수 없는 순간에 빗물로 젖은 입술이 맞부딪히고 서로의 온기가 빈틈없이 맞물렸다.
아릴이 발돋움질하고 이딜로스가 고개를 기울이자 더욱 깊게 서로에게 파고들 수 있었다.
숨이 막히도록 심장이 뛰었다. 무덥고 축축한 소나기를 가르고 그보다 더 뜨겁고 습한 온기를 나눴다.
마찰을 빚어 가며 맞물려 있던 입술이 벌어졌을 때, 이딜로스가 그녀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더니 한순간에 들어 올려 가제보의 난관 위로 앉혔다.